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75화 (75/142)

“말도 안 돼.”

조지나 스피넬이 말했다.

영상 속의 에스퍼들 수십, 수백이 동시에 힘을 잃어가는 듯했다.

그래서 하루 동안 베이징의 민간인들을 쓸어버리려던 계획이 오전부터 어그러졌다.

조지나는 호텔 방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인도, 영국에서 각각 파견된 센터 인원 11명이 지금 호텔을 둘러싸고 있다고 합니다. 그중 S급 에스퍼가 두 명인데요. 어떻게…….

뚝.

조지나는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전화는 그냥 끊어버렸다.

대신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로 스위트룸 거실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베이징 시내를 중계하는 영상을 보았다.

‘대체 뭐야.’

정말로 SSS급 가이드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SSS급이어도 불가능해.”

조지나는 또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도 대강 들어 알고는 있었다.

한국 센터 역삼 본부의 강화연 가이드가 C급 정도 에스퍼들의 그릇 입구를 조작하는 짓을 할 수 있다는 걸.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 가이드, 강화연.

조지나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평가였다.

그레이마저도 그녀를 천재라고 평가한 적 있었다.

‘재능뿐인 비선별이 아냐. A급에서 S급이 된 노력형 천재라고 봐야지.’

‘백율의 서포터로서, 여태껏 보여준 기본적인 가이드 능력도 매우 출중하고. 생각보다 더 경계해야 해.’

조지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비천한 A급 출신의 능력 따위야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래서 똑같이 시도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런 시도를 해 보았다는 사실은 그레이에게 알리지 못했다.

치욕적이니까.

‘별 의미도 없어 보이는 능력이었어.’

‘C급 에스퍼들 따위야, 어차피 가시거리 안에 있으면 S급 가이드의 능력으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릇을 잠시 막아둘 필요랄 게 없었다.

강화연의 쇼는 우스웠다.

‘한참 저등급의 에스퍼들 힘을 못 쓰게 해서 뭘 어쩔 건데? 유치원에서 보여 줄 장기자랑?’

조지나는 사람들에게 강화연의 능력을 장기자랑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달랐다.

‘정말 저 수천 명을 동시에 통제하고 있는 거야?’

‘정말로 거의 영구히 힘을 못 쓰게 막을 거라고?’

‘게다가 여러 명한테 동시에?’

쾅!

조지나는 분을 못 이겨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던져버리고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베이징에 있는 에스퍼들이 대체 몇 명인데!!’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하는 데에 그런 미친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아냐.”

그런 건 여태껏 없었다.

앞으로도 불가능할 것이다. 불가능해야만 했다.

‘가이드의 물리력 유지는 길어봐야 30초야. 보통 인간들은 그 정도 집중력을 3초도 유지 못 해.’

‘그릇을 막는다고 해도, 며칠 지나면 다 회복돼.’

조지나는 과거처럼 속으로 비웃어주기로 했다.

에스퍼들이 며칠 힘을 못 쓴다고 해도, 그리 큰 손실이 아니었다.

“거짓말이야.”

어차피 며칠이면 효율이 다할 장기자랑일 뿐이었다.

‘사실상 영구한 그릇 막기?’

‘실패할 거야.’

‘저걸 할 수 있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수천 명한테 3초만 쓴다고 해도 저건 진짜 미친 능력이라고!’

그러다 조지나는 깨달았다.

지금 베이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강화연의 작품이 아니라는 걸.

영상 속에 잠시 등장한 강화연은, 백율만을 서포트할 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 짓을 할 가이드가 누가 남아 있는가.

S급 가이드들의 목록이 차르륵 조지나의 머리를 쓸고 지나갔다.

가이드의 물리력 같은 것을 쓰던 어떤 거슬리는 가이드 하나가 떠올랐다.

“…….”

포에버.

본명, 심영원.

“K의 가이드.”

그 가능성밖에는 없었다.

그 색소 옅은 동양인이 대체 무슨 짓을 해내고 있는 건가.

‘아냐.’

‘아니야.’

조지나는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계속 부정했다.

“그레이…… 그레이!”

조지나는 급하게 SOS를 칠 사람을 찾았다.

인이어를 급하게 귀에 끼워 넣고 지금 필요한 사람의 이름을 열심히 불렀다.

약간 기다린 끝에야 연결되었다.

―나도 보고 있어.

그는 조지나가 말하지 않아도 먼저 용건을 알아주었다.

“지금…… 올 수 있어?”

그러나 조지나가 기대하지 않은 답변을 주었다.

―이창결에게로 가.

“…….”

―원래 스케일이 커지는 싸움은 누구도 예측 못 한 방향으로, 난잡해지는 법이지. 거기서 방해해. 최대한 오래 끌어.

홀로 S급 던전에 들어간 김여현도 아니고, 홀로 서 있는 심영원도 아니고, 장제권의 서포트를 받는 이창결을 그레이는 가장 약한 고리로 찍었다.

―내가 갈 때까지, 그쪽의 싸움을 끌어.

조지나에게 명령을 거부할 힘은 없었다.

“……응.”

―승리에 취할 때, 진짜 지옥을 보여줄 거니까.

그리고 그레이는 약속했다.

―네가 죽기 전에는, 갈게.

조지나는 그래도 안심했다.

목소리를 듣기 전보다야 기분이 나아졌다.

인이어를 통한 그레이와의 대화는 바로 끊기지 않았다. 그레이는 계속 말했다.

―동아시아 ‘청소’는 어디에서 시작되든 깨끗하게 해낼 거고.

―스카이도 진짜 굉장한 걸 보여줄 때가 됐지.

―던전석도 수백만 개는 얻어 왔어.

웃음소리를 끝으로 대화가 중단되었다.

***

와장창.

그레이는 유리 캐비닛을 깨뜨려 오래전 보관해두었던 검은 유리병을 꺼냈다.

당장, 그 안에 든 아르케미-크리스탈이 필요했다.

조지나와 대화를 마친 뒤, 신체 컨디션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바다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 컨디션 난조가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잔여 시간 240시간]

이 고통은 10일이나 더 이어질 터였다.

손이 덜덜 떨렸다.

챙.

후두둑.

그레이는 뚜껑을 여는 대신 검은 유리병을 깨고, 안에 있던 동그란 구슬들을 한 손에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와그작. 와그작.

그는 딱딱한 구슬들을 거칠게 씹어 삼켰다.

“하아.”

그 이후에야 한숨이라도 쉴 수 있었다.

‘고통은 고통대로 극심하고.’

‘무엇보다, 갈증이 일어.’

악의가 살상에 대한 욕구를 불어넣고 있었다.

되찾은 악의가 이런 충동을 불러일으키리라 예상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욕구는 예상보다 더 거셌다.

아르케미-크리스탈로도 부족했다.

아르케미는 기본적으로 연금술사들이 고통을 견디기 위해 사용하는, 강력한 진통제일 뿐이었다.

막대한 연금술이 낳는 고통이야 세상 어떤 것보다 잘 해결해줄지 모르나, 죽이고 싶은 근본적인 욕구가 아르케미로 해결되지는 않았다.

‘뭐, 진통제의 효과만도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그레이는 깨진 검은 유리가 흩어진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고, 고개를 숙인 뒤 숨을 골랐다.

고통이 거의 멎었다.

아르케미의 효과는 확실했다.

‘한동안은 사용하지 않았지.’

‘고통을 느낄 일도 없었고, 만들어내는 과정도 쉽지 않고.’

다만 문제는, 이제 남은 양이 거의 없다는 것.

와르르.

조금은 회복된 신체로 손에 닿는 찬장을 전부 쏟아내 확인해도 방금 전에 꺼낸 병이 마지막인 듯했다.

‘이쪽 세상엔, 아르케미 제작업자도 없는데.’

아르케미의 제작에는 인간의 신체 일부가 들어가야 했다.

그레이는 더 많은 희생의 결과물이 첨가된 맞춤제작 쪽을 선호했다.

그래서 그 제작 과정이 더 복잡했는데, 이쪽 세계에는 그런 작업을 의뢰할 작업자들도 없어 스스로 수고를 해야만 한다는 게 늘 문제였다.

“하.”

그래도 그레이는 인상을 쓰기보다는 웃었다.

‘더 만들면 돼.’

“하하.”

또 웃었다.

손에 힘이 도는 느낌, 그 힘으로 약을 제작할 과정을 상상하는 게 모두 즐거웠다.

‘한동안은 이 힘도, 이 갈증도 느껴본 적이 없었지.’

그레이는 한국 센터 멤버들이 제 계획을 완벽하게 어그러뜨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색문어의 던전에서처럼, 그들에게 지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차피 별 도움도 안 되는 저등급들이니 없어도 돼.’

그레이는 힘과 갈증만 생각했다.

차오르는 악의는, 꼼꼼한 계획에 따라 차근차근하게 단계를 밟아오던 그레이의 사고를 변화시켜가는 중이었다.

‘괜찮아. 이게 더 좋아.’

영원이 끔찍하게 경계해 온 느낌을, 그레이는 끔찍하게 좋아했다.

‘베이징?’

‘거기 아니어도 돼.’

그레이는 나약한 것들을 쓸어버리는 쇼는 직접 보여주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만들고 싶은 것도 만들고.’

‘연금술사라면, 아르케미-크리스탈 없이는 살 수가 없지.’

재료로 쓰일 인간들이야 지구상에 거의 80억이었다.

“그래, 좋아.”

그레이는 영원과의 시간들을 돌이켰다.

계속 패배해온 지난 시간 속의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계단 우림에서 물러난 것은 힘을 절반쯤 덜어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옆에 백업할 가이드도 없었다.

두 번째, 오색문어의 던전 안에서도 가이드가 없었다. 계단 우림에서보다야 나았지만, 힘을 전부 되찾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세 번째, 베이징에서의 패배.

그건 스스로 그 자리에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

그레이는 스스로 그렇게 평했다. 그러면서 소리 내어 말했다.

“마땅히, 이래 줘야지. 이렇게 재밌어져야지.”

하하.

그레이는 진심으로 즐거워했다.

이제야 전력을 다해서 박살 내어 줄 상대를 찾았으니까.

싸울 상대, 굴복시킬 상대가 생긴 것. 그 끝에 희열을 느끼게 될 것. 모든 게 흥분을 고조시켰다.

“이럴 것 같았어.”

그는 색소가 옅은, 심영원의 차가운 외양을 세심하게 복기해냈다.

“즐거움을 줄 것 같았어.”

힘이 계속 차올랐다.

K도, 그의 가이드도, 이제 박살을 내주고 싶었다.

그레이는 강력한 연금술이 낳은 ‘악의’를 오래도록 봉인해두었던 모든 이유를 잊었다.

삑. 삑.

그레이는 같은 섬으로 돌아와 있는 이반과 스카이에게 연락했다.

―네.

“나를 위한 살상이 좀 필요해.”

용건을 전한 뒤, 그레이는 찬장과 함께 반쯤 깨진 거울을 통해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았다.

‘좋아.’

거슬릴 만한 많은 것들이,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원래 이런 붕 뜬 미친 느낌을 좀 즐기기도 했었지.’

죽이지 않으면 재미가 없고, 더 때려 부수지 않으면 무엇도 충족되지 않는 공허함에 하루하루가 갑갑해지고는 했었다.

갑갑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죽이면 된다.

모든 걸 때려 부수면 된다.

파직.

그레이의 손끝에서, 여러 화학반응이 일었다.

어쩌면 처음에 K의 가이드를 향해 피어오른 건, 나름대로 따뜻함을 가진 애정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달콤함은 증발해 사라졌다.

남은 것은 파괴욕과 추악하게 농축된 소유욕뿐이었다.

‘우선 박살을 내야지. 그다음엔, 가두어둬야지.’

‘인간도 소유할 수 있어.’

그 생각이 그레이의 기분을 더, 더 고조했다.

‘흥분이 돼.’

그레이는 S급 게이트에 K가 홀로 들어갔다는 소식도 어제 들었다.

K가 실패할 것 같지 않았다.

‘그것도, 재밌어.’

‘그래, 뭐. 그래야지.’

영원으로부터 시작된 변화는 김여현을 바꾸었고, 그레이 딘하우스 역시도 이러한 모습으로 바꾸어냈다.

딘하우스는 계속 웃었다.

이제 정말 모든 열의를 다해 끔찍한 난장판을 벌일 것이다.

그때가 목전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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