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74화 (74/142)

영원이 비선별자에게 진짜 약육강식이 무엇인지 알려줘야겠다고 생각했을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 A급, B급 각성자들이 모여 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란을 백율과 화연이 높은 빌딩의 옥상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S급은 아직 한 명도 합류하지 않았네요.”

“그러네.”

“도착하기 전에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영원 가이드님 준비되면, 바로요.”

“응.”

화연의 판단에 백율 역시 동의했다.

둘이 있는 곳은 그레이가 점령의 시작점으로 점찍은 덕에, 현재 중국 각성자군軍이 통제하는 구역의 중앙부였다.

둘은 공식적으로 중국 정부의 양해를 받아 그 내부로 출입할 수 있었다.

“연락이 닿는 각국 센터에는 방금 작전 영역 밖으로 나가달라고 부탁했어요. 혹시라도 뭐에 휩쓸리지 않게.”

“그럼 저기엔 각성자군뿐인가?”

“네.”

둘은 멀리 있는 각성자들의 대열을 훑어보기도 했다.

사실상 각성자군 수뇌부의 전원이 그레이의 편에 서겠다고 변절한 덕에 각성자들을 막으러 나온 군인들의 사기는 형편없었다.

그들은 어제까지 아군이자 상관이었던 자들과 싸워야 할 판이었다.

율과 화연은 건물 아래 8차선 도로를 점령한 비선별자 집단을 관찰했다.

“○○○○○○○○!”

“○○○○○!!”

확성기를 이용해서 내지르는 소리 덕에 도로 주변이 대단히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한국어가 아니어서 의미를 바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자주색 맨투맨. 카메라 3대.”

그러다 율이 덩치가 커다란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마이크 들고 무슨 개인방송 하는 것 같은데.”

“네, 제가 신원 파악해 볼게요.”

화연은 자주색 맨투맨을 입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다음 난간에 올려둔 노트북 자판을 두드렸다.

율과 화연은 지금 그들이 이용하기에 적절한 생중계 인터넷 방송을 찾는 중이었다.

이 시각, 사람들을 설득할 선전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레이만이 아니었다.

율과 화연 역시, 세상에 더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날려 보낼 적절한 수단을 찾고 있었다.

그레이를 비난하는 주요 언론들은 각성자들의 고문 및 살해 협박에 몸을 사려 군이 통제선을 쳐둔 현장 내부에 들어와 있지 않으니, 생중계 중인 개인 미디어의 화면을 하나 차지하자는 게 둘의 계획이었다.

이미 영향력 있는 개인 미디어가 있는 누군가의 협력을 구하기엔, 그 상대를 신뢰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역삼 센터의 SNS나 특정 채널을 개설하기엔, 그를 홍보하는 데 노력을 들일 시간이 없었다.

“채널 찾았어요. 중국인. 비선별 A급 에스퍼인 것 같아요. 이름은…….”

“그건 됐어.”

“네?”

“이름 안 궁금해. 뇌에 낭비할 용량 없다.”

“네. 동의합니다.”

자주색 맨투맨의 이름이야 알아둘 필요가 없을 정보였다.

둘은 실질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는 것에만 집중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라이브 보고 있는 건 몇 명?”

“560만…… 명이요. 다른 클립들 훑어보니까, 엄청난 저질 채널인 것 같은데요.”

“그레이 추종 강경파?”

“네. 자극적인 영상들로 유명해졌는지 구X링으로 대강 검색해봐도 나오는 결과도 많고, 구독자 수도 상당해요.”

화연은 인상을 쓴 채로 노트북 화면의 스크롤을 쭉쭉 내리며 답했다.

“560만 명?”

“네.”

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말세다 싶지만, 뭐, 좋아.”

그녀의 입술에 밝지 않은 웃음이 걸렸다.

“이딴 식으로 굴었다가는 인생 그대로 X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학생들이 560만 명이나 수업을 기다리고 있다니.”

“음, 이제…… 570만 명이요.”

화연이 숫자를 정정해주었다.

시청자 수가 계속 늘어가는 중이었다.

각성자 쿠데타 방송의 핵심이 시작될 시간이 가까이 오고 있으니 당연했다.

570만은 금방 580만을 넘어섰다. 600만까지 이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방송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중인지 좀 들어볼게요.”

화연은 멀리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가이딩 밴드와 인이어의 통역 기능을 켜 그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잠시 들어주었다.

감각에 집중하면, 멀리서 떠드는 말도 꽤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이제 지배할 때다!”

“힘을 보여주자!”

“각성자의 지배!”

화연은 금방, 귀는 의지에 따라 닫을 수 없는 기관이라는 것을 안타까워하게 되었다.

안 그래도 들을 가치가 없는 내용이 점점 수위를 높여갔다.

번역 기능을 사용해서 확인하는 SNS나 채팅창도 마찬가지였다.

화연의 요약을 기다리던 율이 물었다.

“뭐래?”

“뇌 용량 낭비하실 필요 없을 것 같아요.”

화연은 단호히 답했다.

오랜 파트너이자 직장 상사인 율의 기분을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래, 그럼.”

율은 팔을 양옆으로 뻗어 스트레칭을 한번 한 뒤 옥상 난간 위에 섰다.

―도착했습니다.

마침, 지정된 자리에 영원 역시 도착한 듯했다.

“화연아.”

“네.”

“갈까.”

화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준비 마치고 대기할게요.

―스탠바이.

영원의 음성이 추가로 들렸다.

“잠시.”

율은 영원에게 답하면서 화연에게 눈짓했다.

“금방이면 됩니다.”

율이 말을 마칠 때쯤 화연 역시 난간 위로 올라와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카운트합니다.”

8차선 도로에는 비선별, 선별을 불문하고 각성자들이 빽빽했다.

쾅!

율은 그들이 모두 위를 바라보도록, 커다란 폭발을 허공에 만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ㅇ…… 어!”

“배…… 백율!”

가슴을 덮는 길이의 흑발과 검은 에스퍼 정복의 실루엣.

그것만 보고도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보는 이들이 있었다.

“S…… S급님들 어디에 계셔!”

“찾아, 빨리 찾아!”

나름대로, 방문을 예고하고 왔기 때문에 놀랄 일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그녀를 올려다보는 많은 각성자들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스스로 망측한 최면에 걸려서 미친 곳에 왔는데, 이제야 현실은 상상이 아니었다는 걸 안 거지.’

‘편향의 알고리즘은 이래서 문제인가.’

‘물 같은 S급들 몇 온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나?’

율은 그들을 조금도 동정하지 않았다.

“5.”

“4.”

“3.”

“2.”

“1.”

두 사람이 가볍게 상공에서 뛰어내렸다.

“개시.”

도로에 있던 이들은 율의 말을 끝으로 엄청난 공격이 쏟아부어질 거라 예상하고, 겁에 질려 도망쳤다.

혹은, 긴장에 넋이 빠져 그대로 얼었다.

타박.

그러나 율은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다음,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잡아주길 바랐던 모든 화면이 자신을 비춘다는 걸 안 상태에서 만족스럽게 입을 열었을 뿐이었다.

“여러분.”

700만 명을 넘어선 시청자들, 또한 전 세계의 그레이 추종자들을 향한 말이었다.

“유익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지금은 인류애에 호소할 때가 아니었다. 공포에는 공포로.

유서 깊은 방식으로 응수해줄 생각이었다.

“각성자가 되어서 그동안 즐겁지 않으셨습니까.”

굳이 그레이나 그 추종자들만큼 잔인하고 자극적인 것을 만들어내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각성자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이 잔인한 장면도 아닐 터였고.

“특히 에스퍼 여러분. 그 힘이 주는 충족이 어떤 건지, 저도 잘 압니다.”

율은 무미건조한 표정,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히어로가 된 것 같고. 갑자기 특별한 존재가 된 기분에 심취했겠지.”

고저 없이 내뱉어서 더 집중하게 되는 묘한 마력에, 그녀를 지켜보는 이들이 사로잡혔다.

그녀가 사용하는 언어를 정확히 이해할 수 있는가, 이해할 수 없는가도 이 순간에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끝입니다.”

율은 서서히 에스퍼의 힘을 사용했다.

아름다운 꽃밭을 이룰 꽃들이, 그녀의 발을 중심으로 한 송이, 두 송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S급 환상계 에스퍼들이 그 힘을 구현하기 위해 특별히 사용하는 무기.

백율의 경우에 그 무기는, 피어나는 꽃밭이었다.

사락.

사라락.

꽃이 만들어내는 절대 방어의 경계가, 영원이 서 있는 곳까지도 번져갔다.

빌딩이 가득하던 도시에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색색의 장관이 펼쳐졌다.

이제껏 백율이 펼쳤던 것 중 가장 넓은 꽃밭이었다.

“이…… 이!”

“도망쳐!”

꽃들에 둘러싸인 에스퍼들은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치려 했지만, 그들이 달려가는 속도보다 꽃밭이 펼쳐지는 속도가 빨랐다.

율은 환상계 S급 에스퍼의 힘으로, 또한 그녀의 목소리에 의지를 입혀, 그 목소리를 듣는 A급, B급 에스퍼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게 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제,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에스퍼의 힘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겁니다.”

모국어와 무관하게, 이제 이들은 전부 율의 말을 알아들을 터였다.

“자세한 방법이야 몰라도 됩니다. 그냥, 그렇게 될 테니까. 힘이 사라지는 걸 경험하세요.”

“…….”

“오랜 시간. 삶이 다할 때까지.”

“…….”

“이제 금방 평범했던 시절로 돌아가서 절망에 빠질 겁니다.”

“…….”

“줬다 뺏는 것만큼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게 없잖습니까.”

그리고 그 무렵이었다.

―개시.

영원 역시도 ‘개시’의 응답을 보냈다.

“지금,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영원은 홀로 자신의 자리에서, 에스퍼들의 힘을 막아버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힘이 막혀가고 있을 겁니다.”

율은 영원의 시도가 완벽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말했다.

“너희의 그 힘이 사라져가는 순간이 생중계되고 있습니다.”

“…….”

사위가 조용해졌다.

율은 에스퍼들이 이제껏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을 것을 걱정하도록 만들었다.

“거짓말이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압니다. 무슨 수로? 그런 의문을 가지겠지.”

“…….”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이들은 사태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한 채로 어리둥절하게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

사태의 심각성을 누구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 알게 될 겁니다.”

그즈음 확실하게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어.”

무언가 변화를 느낀 사람이 나타났다.

“어……?”

그 생중계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더, 더 몰려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