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72화 (72/142)

영원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마지막으로 다시 도시 전체를 스캔해보았다.

‘며칠 되지 않았지만 지리는 적당히 익숙해졌어.’

영원은 자신의 암기력을 자신했다.

‘그 외에도 기본적인 조건은 다 좋아.’

여현의 견고한 보호를 받을 수 없으니 공격에 노출될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지만 센터에서 이창결의 진심 어린 방해 공작에 대응하며 연습해 온 걸 생각하면, 여현이 초보 에스퍼들의 공격을 막아주지 못하는 상황이 두렵진 않았다.

‘불의를 추구하겠다는 열정을 불태우며 이 도시로 몰려든 비선별들은 대부분 빌런 새싹들이야.’

‘아니면 등급이 그렇게 높지 않거나.’

등급이 높은 이들은 각국의 소요사태에 동원되어, 다른 지역에서 깽판을 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각 지역, 특히 유럽 도시들에서 반란의 기반을 다질 필요가 있기에 그들이 유럽 도시들을 내팽개치고 모두 베이징으로 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여기 모인 애들은 이창결 부장님한테 댈 게 아니지.’

게다가 백율 부장이 곁에 있었다. 여현을 제외하면 그녀보다 든든한 방어막을 찾기도 어려웠다.

‘그레이가 없으니까, 내게로 올 공격은 정말 문제가 아니고.’

지금 영원을 긴장하게 하는 건, 오직 ‘자신이 맡은 일을 정말 해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었다.

인간은 마네킹이 아니기에, 의자에 따라 제멋대로 움직인다. 그 움직임의 경로나 변화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고통에 저항하고, 모두 저마다의 고유한 개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 모든 경우에도, 그들을 모두 한 번에 통제해야만 한다.

‘사람을 상대로 해본 적 없는 일이야.’

‘선례도 거의 없지.’

‘하지만 할 수 있어.’

영원은 여현이 시베리아 S급 게이트에 진입한 뒤로 수 시간이 지났다는 속보를 확인했다.

가이딩 밴드 사이의 정보 교환도 여전히 잘 유지되고 있었다.

가이딩 밴드에 미쳤다 싶은 양의 S급 던전석을 꾸역꾸역 발라두었기에, 연락이 끊길 일은 없을 터였다.

‘이래서 던전석 플렉스가 좋은 거구나.’

삐빅.

새로고침하여 재차 확인해도 여현의 상태가 양호하다는 정보가 드러났다.

잠들기 전에도 여러 번 같은 방식으로 여현의 안위를 확인했다.

혹시 모를 연락에 대비해 알림 진동의 세기를 매우 세게 조정해놓기도 했다.

불안할 건 없었다.

정말로, 그냥 잘 해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영원 가이드님, 부장님, 저희 그럼 이제 가볼까요.”

“네.”

“좋아. 힘내서 금방 끝내고 게이트 처리 도와주러 가든지 하자.”

영원은 어쩌다 듣게 된, 이창결 부장이 게이트에 진입하기 전에 백율 부장과 나눈 통화 내용을 떠올렸다.

―금방 끝내고 도우러 갈게.

그게 약간 백율 부장의 기분을 긁은 듯했다.

“누가 먼저 ‘도우러’ 가게 되는지 보자고.”

약간……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된 듯했다.

셋은 에스퍼와 가이드 정복의 착장을 점검하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전가옥을 나섰다.

***

여현은 얼어붙은 게이트 내부에 있었다.

시베리아 게이트의 내부는 시베리아보다 더 시베리아 같았다.

모든 곳이 얼음의 산, 빙하의 벌판이었다.

생명의 흔적은 물론, 움직임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곳에서 고요하게 선 여현은 영원처럼, 가이딩 밴드로 연결된 상대의 현 상태를 확인했다.

삐빅.

혹시라도 모를 위기상황을 놓치지 않을 수 있도록.

그는 위기상황에 대한 알람을 최고조로 설정한 뒤, 먼 빙하지대를 보며 마스크를 벗었다.

흉터 없는 얼굴이 드러났다.

슥.

여현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미남으로 손꼽히는 그 누구와 곁에 있어도 뒤처지지 않을 외양이었다.

그의 얼굴은 소년 같으면서도 소년 같지 않았다.

매우 날 서고 차가워 보였지만, 그래도 영원을 생각할 때면 분위기가 조금은 유해졌다.

“…….”

여현은 느리게 몇 번 눈을 깜빡이며, 눈을 통해서도 주변 지리를 확인했다.

레이더뿐 아니라 양 눈을 사용해 주변 환경을 파악하는 일은 오랜만이었다.

다소 낯설기는 했지만, 어렵지는 않았다.

어느 때보다 호흡이 편안했다. 고통 없이 숨 쉴 수 있다는 것을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있었다.

‘모든 순간이 기적이 되지.’

여현은 이 느낌과 이 감정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더라도.

휘잉.

갑자기 거친 바람이 여현과 들판을 휩쓸고 지나갔다.

여현은 변치 않는 표정으로 먼 곳의 산악지대를 보았다.

이 기회를 충분히 누릴 생각이었다.

S급 게이트는 시련이 아니었다.

오히려, SSS급이 된 후 필요했던, 최대 출력을 실험해 볼 기회였다.

감시의 시선도, 관찰의 시선도 없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SSS급 에스퍼]

[동일 등급 에스퍼 미존재, 랭킹 반영 일시 보류]

여현은 저 등급에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더 강해지고 싶었다.

‘그레이 딘하우스는 더 강해진다.’

그만 더 강해지도록 둘 수는 없었다.

‘현실에서 만나 싸워 본 적은 없어.’

지금보다 어렸을 때, 자신의 힘에 화상을 입은 여현에게 그레이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K.’

‘누구시죠.’

양 눈을 붕대로 가리고 있는 여현의 병상 옆에 앉으며 그레이는 웃었다.

‘그레이 딘하우스.’

‘…….’

‘누구인지 더 설명해야 할까?’

‘…….’

‘그보다는 너에게 이딴 상황을 겪도록 강요한 녀석들에 관해 더 심도 있게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레이는 너를 이렇게 만든 센터를 배반하라며 여현을 회유했고, 여현은 그를 거절했다.

그때 그레이는 여현을 힘으로 누르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소 의견 충돌은 있었지만, 실제 무력 충돌은 없었다.

그레이는 여현의 생각이 분명 바뀔 거라 자신하면서 그 자리를 떴다.

‘그 순간 이후로, 여태껏 만나 싸움 비슷한 걸 했던 건 모두 던전 안이었지.’

여현은 자신 역시 더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원에게 지켜주겠다는 말을 듣는 거야 벅찬 느낌을 주는 일이었지만, 정말로 영원의 힘에 기대어 보호만 받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지키고 싶었다.

‘진짜는 밖에서야.’

‘이제는 정말 목숨을 걸고 싸우게 될 거야.’

여현은 손끝에 힘을 실었다.

아주 정교하게, 미세하게 힘을 조작했다.

힘이 넘쳐난다고 해서, 더 강해졌다고 해서 힘을 낭비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파직.

상처가 사라진 몸을 따라, 힘이 흘렀다.

더 파괴력 있는 힘에 관하여, 생각했던 모든 실험을 해볼 계획이었다.

영원과 무정지 가이딩-에스퍼링을 한 기억도 돌이켰고, 명동 게이트에서 폭주 직전에 이르렀던 기억도 돌이켰다.

한계 상황을 겪은 경험은 그를 성장시켰다.

파직.

기관과 힘은 모두 정확한 의지에 따라 움직였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완벽했다.

***

그리고 같은 시간, 서울.

“…….”

의총은 정신을 잃고 외진 창고의 구석에 갇혀 있었다.

그는 생명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는 수면 상태에 빠진 채로, 창고 구석의 캐비닛 안에 모로 눕혀져 있었다.

끼긱.

철컥.

아무도 없던 창고의 문을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한하늘과 함께 별관 보안 지대에 잠입했던 검은 남자였다.

톡톡.

가이딩 밴드를 두드리는 미미한 소리가 났다.

“응.”

검은 남자가 누군가에게 답했다.

“알겠어.”

그는 저편에서 인이어를 낀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레이.”

그리고 그는 한동안 조용히 그레이의 말을 듣는 듯했다.

“아쉽지만, 스카이가 박의총은 찾아내지 못했어. 내가 그녀는 아직 성장해야 할 구석이 많다고 했잖아. 뭐, 어쩌겠어. 도망친 것 같은데. 안타까운 일이지.”

끽.

그 무렵이었다. 캐비닛 구석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난 것은.

“그래. 응. 괜찮아.”

또각. 또각.

구둣발 소리가 캐비닛으로 향했다.

“어. 알았어. 떠날 때 또 연락할게.”

통화가 종료되었다.

달칵.

캐비닛 손잡이가 잡혔다.

쿵.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의총의 몸이 밖으로 넘어졌다.

의총은 필사적으로 힘을 써서 남자를 밀어내려 했다.

툭.

그러나 모든 시도가 순식간에 가로막혔다.

압도적인 힘의 격차에 의해.

“…….”

최소 S급 에스퍼. 덤빌 수가 없는 힘이었다.

동시에 의총은 두 눈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쿵.

심장이 긴장으로 굳었다.

‘대체 여기에 어떻게?’

‘내부 변절자들은 강화연 가이드와 장제권 가이드가 암호 코드를 찾아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이반 하이제렌.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자가 의총을 보고 있었다.

“…….”

“…….”

이대로 죽는 건가, 의총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나 점점, 그러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이 강해졌다.

그가 의도적으로 흘린 미약한 힘이, 너무나 익숙했다.

“……환성?”

“그래, 나다.”

대한민국의 S급 에스퍼, 세계수가 쓴 소설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자.

최환성 에스퍼.

타이틀, ‘선량한 악마왕.’

의총은 이반을 보며 오랜 친구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이반은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직 위험해. 일단은 계속 여기에 숨어 있어.”

환성이 약간의 정적을 깨고 그렇게 말했다.

“스카이가 널 찾진 못할 거야.”

의총은 스카이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그레이가 포섭한 비선별 한국인 S급 가이드 류하늘을 대외적으로 ‘스카이’라고 칭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거, 두고 갈게.”

이반은 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꺼냈다.

툭.

그것이 옆의 테이블 위에 떨어졌다.

사락.

이반은 의총의 손을 결박하고 있던 끈도 풀어주었다.

“무슨, 설계도?”

의총은 손목을 매만진 뒤, 얇은 종이의 접힌 부분을 펴내면서 인상을 썼다.

환성이 의총의 질문에 답했다.

“그 설계도의 바탕이 된 초안은, 네가 오래전에 그렸던 거야.”

설계도.

의총은 한동안 잊고 있던 무엇을 기억해냈다.

“알아야 할 게 있어. 지금 S급 던전석이 도둑맞는 건 막을 수 없을 거야.”

의총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얼마나?”

“5백만.”

의총의 표정이 정말로 험악해졌다.

“미안.”

“…….”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있어.”

“…….”

“난 이제 가야 해. 그 설계도, 연구해서 막을 방법을 찾아내 줘.”

의총은 험악한 얼굴을 유지한 채로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리고 저번에 고요련 가이드랑 접촉하려고 할 때 ‘한하늘 가이드’에 대한 정보를 전할 계획이었어.”

환성은 요련과 접견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했다.

센터 멤버들이 오색문어의 던전 안에 있을 때 불발된 만남이었다.

의총은 한하늘이 누구인지 몰랐기에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류하늘. 한하늘은 한하늘인 척하는 류하늘이야. 그리고 더 알아야 할 게…….”

정말로 충격적인 정보가 의총에게 전해졌다.

“…….”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능력에 관하여.

어쨌거나 둘은 금방 헤어져야 했다.

“일단, 알겠어. 건강해라.”

“너도.”

환성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의총은 멍한 표정으로 홀로 남았다.

‘해외에서 비밀공작을 하고 있다는 거야 당연히 알았지. 그레이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것도.’

‘그 결과물이 이렇게 엄청날 줄은 이제야 알았지만.’

환성을 만난 건 영원을 보러 여현의 펜트하우스에 방문한 날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환성은 그런 말을 남겨두고 떠났다.

‘심영원 가이드가 우리가 겨우 찾아낸 희망이라면, 나는 그레이의 곁으로 더 다가가 있어야만 해.’

‘그레이 딘하우스 쪽의 세력도 더욱 강해지고 있어. 예고된 미래보다 더.’

환성은 세계가 멸망해가는 와중에 자신이 악마왕의 자리를 차지할 미래 같은 게 올 일이 없다는 것은 확신한다고 했다.

절대로 그레이와 1:1로 싸워 이길 자신이 없다고.

‘세계수는 차원을 넘어온 자의 힘을 과소평가했어.’

대체 최근에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는 모르겠지만, 환성은 그레이 딘하우스의 오랜 측근이었던 이반 하이제렌의 탈을 공고하게 쓰게 된 듯했다.

놀라우면서도 놀랍지 않았다.

환성은 항상 없는 길을 찾아내서 가는 친구였으므로.

의총은 시선을 설계도로 내렸다.

팔락.

그 얇은 종이의 끝을 매만져보았다.

“…….”

캐비닛에서 눈을 떴을 때는 10분 안에 목숨이 끊길 줄 알았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에 새로이 할 일이 손에 주어졌으니, 해내야만 했다.

의총은 설계도에 완전히 몰입해, 그 취약점을 찾으려는 생각만 했다.

그리고 그날, 박의총을 죽이는 임무에 실패한 책임은 스카이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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