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정적이 찾아온 와중에, 윤 교수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들렸다.
―SOS를 치는 상대가 좀 괘씸하기는 하죠. 그런데 이대로 가만히 두면, 어차피 S급 게이트발 재해가 번져 더욱 큰 난리가 날 겁니다. 타국을 돕는다 생각하지 말고, 전 세계적인 재앙을 어떻게든 막아야 해요.
이창결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좀 더 고민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저희 쪽에서도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
여섯은 식탁에 둘러앉아, 사태 해결을 위한 깊은 고민에 빠졌다.
베이징을 구하기 위해, 센터 멤버들은 명확하게 역할 분담을 한 채였다.
그들에게는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여 완수해야 할 명확한 계획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몇 명이 빠지는 경우에 사용하게 될 백업 플랜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백업 플랜에 불과했다.
그런데 계획이 진행되기도 전에, 여섯이서 계획을 시작할 수 있을지부터가 불투명했다.
영원이 가장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베이징에 남아야겠죠.”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해 유혈사태를 막기 위해서도, 이들에게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알리지 않은 스테이지3를 위해서도, 그게 맞았다.
화연은 영원의 말에 긍정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네. 에스퍼들을 사실상 영구히 무력화시키는 일을 시도라도 해볼 수 있는 건 영원 가이드님뿐이니까요.”
영원은 센터 지하 강당에서 가이딩으로 행사하는 물리력을 수없이 연습해왔다.
바로, ‘에스퍼들의 그릇 입구 자체를 막아버릴 수 있는 힘’을.
“앞으로도 그레이 측 에스퍼들이 일반인들에게 달려들어 다량의 인명피해를 일으키는 걸 막을 수 있을 거예요. A급부터 D급, 어쩌면…… 일부 소수의 S급도.”
영원은 길게는 몇 달, 심지어는 몇 년까지도 에스퍼들이 그들의 그릇 자체를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SSS급 가이드의 힘으로 화연의 능력까지도 한참 뛰어넘게 되었다.
잘만 하면, 에스퍼의 몸 상태를 사실상 각성 전으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미친 에스퍼들을 무력화하는 것이다.
그 계획을 시도해보기 위해, 영원만은 베이징에 남아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이후엔 이창결 부장이 추가로 의견을 말했다.
“화연 가이드님도 같은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으니,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 베이징에 계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력 싸움을 대비해 백 부장님께서도 계시는 편이 좋겠죠.”
그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베이징에 무조건 남아야 하는 셋은 그 세 사람이었다.
이창결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더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게이트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가 남아 있는 건데…….”
말 중간에 여현이 끼어들었다.
“S급 게이트, 혼자 해볼게요.”
잠시 테이블 주변이 조용해졌다.
여현은 무엇도 특별할 게 없다는 기색이었다.
여현은 그가 아니라면 누구도 할 수 없을 일에 관하여, 태연하게 말했다.
“…….”
여현이 저리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는 했다.
그런데, 여현의 말에 좋은 생각이라고 추임새를 넣을 수는 없었다.
S급 게이트를 혼자 처리하러 간다.
웬만해서는 입 밖으로 꺼낼 수 없는 생각이었다.
설령 그 말을 꺼내는 사람이 김여현이라고 해도.
“현아.”
“네.”
“S급이야.”
“알아요.”
“영원 가이드님은 베이징에 계셔야 하고.”
여현은 명동에서 S급 게이트를 홀로 처리해낸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때는 영원의 가이딩이 있었다.
“네.”
“…….”
여현이 영원을 보았다. 영원 역시 그 시선을 마주했다.
서로를 걱정하는 기류가 흘렀다.
영원은 홀로 S급 게이트에 들어가야 할 여현을 걱정했고, 여현은 홀로 베이징에서 자신의 보호 없이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해야 할 영원을 걱정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어느 쪽이든 당장 그레이의 훼방을 받지는 않을 것 같다는 것.
서로가 서로의 능력을 의심하지는 않았다.
명동 게이트 이후, 서로가 엄청나게 성장했다는 것도 알았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알아서 할 수 있다고 하니 의심은 안 하지만, 걱정을 떨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걱정이 된다고 한들, 말릴 수도 없었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보고 있기만 했다.
결국, 둘 사이에 끼어들어 걱정의 말을 뱉은 건 이창결이었다.
“폭주의 위험이 있어.”
여현은 간단히 답했다.
“통제할 수 있어요. 가이딩 밴드도 있고.”
“…….”
“이제 소통이 끊길 일도 없으니까, 위험해질 것 같으면 바로 호출할게요.”
“…….”
“게다가.”
여현은 차분하고, 진지했다.
“제가 혼자 안 막으면,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
“다른 계획이 있으세요? A급 에스퍼랑 S급 가이드랑 가서 S급 게이트 정리하실 건가요.”
아직도 이창결은 공식적으로는 A급 에스퍼였다.
그를 지적하는 여현의 말에 비아냥거림은 담겨 있지 않았다. 무시도 없었다.
여현은 그저 사실에 기반한 질문을 던졌을 뿐이었다.
“괜찮아요. 혼자서 할 수 있어요.”
드륵.
여현이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창결과 장제권도 일어났다.
직전의 대화로 여현이 홀로 S급 게이트를 막고, 이창결과 장제권이 A급 게이트 24개를 처리하는 쪽으로 결정되었으니, 세 사람은 계획을 실행하러 당장 떠나면 되었다.
드륵.
영원도 자리에서 따라 일어났다.
영원이 말없이 여현의 손을 잡았다.
걱정이 담긴 무언의 표현이었다.
“할 수 있어요.”
여현은 영원에게도 다시 말했다. 다정한 어조로,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이.
“지나친 위험은 감수하지 마.”
“그럴 거예요.”
“다치지 마.”
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혹시, 가이딩이 필요해지면, 뭐든 내팽개치고 나한테 날아와.”
“네. 가이드님도, 무리하지 마세요.”
“응, 나야, 뭐. 내가 다칠 일은 아냐.”
다른 이들 역시, 여현을 걱정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다음에는 바로 작전을 개시해야 했다.
시간은 지금도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현은 영원을 품에 한 번 안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창결과 장제권도 금방 떠났다.
긴 인사는 누구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며칠이 지나면 다시 맛있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만나게 될 것이었으므로.
“그럼, 저희는 이 도시의 사태를 해결하면 되겠네요.”
화연이 말했다. 백율 부장도 어깨를 으쓱이고는 말했다.
“그레이가 안 나타나서 다행인가 했더니, 갑자기 상상도 못 한 미친 난도의 임무가 됐네요.”
“그러게요.”
영원도 긍정했다.
셋은 조용히, 계획수정에 대하여만 진지하게 논의했다.
금방 자정을 넘어 새벽이 됐다.
화연과 백율은 새벽부터 미친 짓을 하려는 녀석들을 막기 위해 잠시 외출했다.
영원은 갑갑함에 휩싸이지 않고, 잠들지도 않은 채 눈을 감고서 도시의 모든 형상을 스캔했다.
여현은 어려운 일이라도 홀로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보여줄 터였다.
영원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
역삼 본부, 에이아이 카메라 앞에서 공무원 한 명이 출입증을 내밀었다.
“에이아이 콜.”
삐빅.
“한하늘입니다.”
열다섯의 류하늘은 마흔한 살 한하늘의 탈을 쓰고 그녀를 연기했다.
스쳐 지나간 이들 몇은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표정이었다. 심지어는 하늘이 가이드 정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인사를 하고 지나간 사람도 있었다.
―확인 완료, 접근 승인.
한하늘은 그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역삼 본부 별관에 발을 들였다.
스륵.
그리고 그림자처럼 누군가가 그녀 곁에 따라붙었다.
한하늘은 에이아이의 카메라에 그녀가 숨기려는 자가 잡히지 않도록, 사각지대를 만들어주었다.
―보안 게이트 개방.
그는 게이트의 미세한 틈을 비집고 한하늘과 한 몸인 듯 보안 지대에 들어왔다.
검은 옷을 입은 장신의 남자. 그의 방문은 명백히 승인되지 않은 출입이었다.
목표한 곳에 다다른 그는 그제야 한하늘과 떨어져, 천장에 붙은 배기 덕트 속으로 사라졌다.
사락.
툭.
공기조화 시스템을 따라 연구실에 도착한 그는, 차트를 정리하고 있던 누군가의 목을 가볍게 눌러 기절시켰다.
털썩.
“미안.”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린 그는 쓰러진 남자를 안아 들고 뒤편의 창고로 사라졌다.
***
다시 베이징.
결전의 날이 밝았다.
직전의 새벽, 밤 외출을 나갔던 화연과 백율은 거대 유혈사태 몇 개를 막았다.
그다음에는 다른 센터에 잠시 바통을 맡기고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거대한 사건에 앞서 쉬어갈 시간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영원은 작전을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그려보았다.
전력이 반 토막이 났다고 해도 영원, 화연, 율은 상쾌한 얼굴로 테이블에 둘러앉아 아침을 먹었다.
“하루 내내 아무것도 못 먹을 것 같으니까 포식해줘야 해요.”
“저번에 크루즈에서 오리 처리하다가 배고파서 죽는 줄.”
“그러니까요.”
영원은 화연과 율의 말에 깊이 공감하며 햄치즈샌드위치와 에그 프리타타에 열심히 딸기잼을 듬뿍 얹어 먹었다.
‘단짠…….’
‘역시 식사에 진심인 K-국 각성자들…….’
셋 다 짭짤한 요리들에 단맛을 가득 더하여, 몸에 열량과 당을 넉넉히 공급해주는 기쁨을 착실하게 누렸다.
어제의 심각한 분위기를 연상할 수 없는 화기애애한 식사자리였다.
‘여현이가 만들어주는 게 더 맛있긴 하겠지만…….’
그리고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셋은 전략을 다시 점검했다.
“영원 가이드님이 A급부터 C급까지 에스퍼들의 힘을 막아버리고, 혹시 위급상황이 되면 화연이가 C급들의 힘을 막아버리기로 하죠. 일단 베이징 밖에 있는 듯한 S급 몇은 베이징으로 날아 들어오면 생포해둘게요.”
베이징의 지도 위로 백율의 손이 슥슥 오갔다.
“이렇게 구획을 나눠 차례로 정리한 후에, 추가로 진입한 S급들의 힘까지 막아버리게 이리로 모이는 겁니다.”
“네.”
“가이드님은 물리력을 이곳에서 사용해주세요. 여기가 도시 지형을 파악하기에도 적절하고, 제 힘이 쉽게 닿을 보호구역 내에 있어서 좋을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끝에는.”
백율이 집결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톡톡.
“여기로.”
다시 모일 곳은 여기, 안전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