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과 여현이 영원의 바다에 빠져든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 다른 장소.
그곳에서 그레이 딘하우스 역시 바다에 점점 잠겨가고 있었다.
찰박.
찰박.
그는 계속하여 바다의 중심을 향해 걸었다.
허리, 가슴, 어깨가 차례로 차가운 액체 안에 들어갔다.
이후에는 그의 전신이 물속에 잠겼다. 그레이는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수면 아래의 땅이 마치 공기 아래의 지상인 것처럼 다리를 움직여 앞으로 나아갔다.
물속은 고요했다.
미약한 빛은 더욱 희미해졌다.
그레이는 계속하여 걷고 또 걸었다.
찾으려던 것이 나타날 때까지.
어느 순간, 그가 멈추었다.
그레이는 가만히 서 있었다. 시선을 어떤 지점에 고정한 채로.
깊은 어둠 속에서도 더 어두운 부분, 아주 작은 빛까지 다 잡아먹을 듯한 해구의 입구였다.
그레이는 천천히 그에 다가갔다.
‘…….’
다시는 마주할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힘이 그 아래에 있었다.
묘한 감상이 일었다.
역시, 인생은 길다.
‘너무나 길지. 놀라울 정도로.’
그레이는 작게 웃으며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입술이 벌어졌다.
음성이 퍼지지 않아야만 할 것 같은 장소에, 그가 만들어낸 나지막한 울림이 퍼졌다.
“개방開放. 합체合體.”
오랫동안 뱉지 않았던 언어가 밖으로 나와 흘렀다.
그 명령에 응답하여, 그의 외부에 존재하던 힘이 서서히 그의 내부로 빨려 들어갔다.
‘순진한 얼굴로 뭐든 다 줄 것처럼 말하는 남자를 믿지 말았어야지.’
과거에, 스스로 뱉었던 말들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했다.
‘약속을 믿었어? 멍청하기는.’
그런 말을 마친 뒤에, 이 힘을 가두어두지 않았던가.
대제의 힘 속에 묻은 악함이 자신을 덮쳤고, 그로 인해 사소한 충동에 이끌려 곁에 있던 자들 몇을 죽였다.
악의.
이는 연금술사가 강해질수록 무의식적으로 파괴를 추구하게 되는 왜곡된 본능 같은 것이었다.
개인마다 발현의 정도는 달랐는데, 그레이는 유독 심한 편이었다.
아주 먼 과거에는 강해질수록 당연히 떠안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 받아들여졌으나, 연금술사들은 힘을 다소 포기하면서 그를 봉인해낼 방법을 찾아냈다.
과거의 어느 순간, 그레이는 피 칠갑이 된 몸을 보고, 이대로는 살의를 통제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힘을 덜어두기로 했다.
이 힘을 되찾지 않고도, 이 세계를 가지기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K가 그의 가이드를 통해 더욱 강해졌고, 그 가이드 역시 대제였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랬지.’
오로지 악으로 가득 차 있고, 통제도 할 수 없던 감정이 다시 기억났다.
순식간에 그런 기억에 휩싸였다.
‘네 탓이야.’
‘너는 나를 믿지 말았어야 해.’
‘이제 끝이야. 잘 가.’
죽여버린 여러 인간의 얼굴이 눈앞에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그들 스스로는 그레이 딘하우스의 애정을 받는 존재라고 여겼을 멍청한 인간들의 얼굴.
지난날의 기억이 놀랍도록 선명해졌다.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
가면을 쓰기로 결심했을 때.
첫 가이드를 죽였을 때.
또 하나를, 그다음 하나를 죽였을 때.
그 모든 기억을 뒤로하고, 그레이는 다시 타박타박 바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사락.
그레이의 옷을 적시고 있던 바닷물이 순식간에 빠졌다.
수면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밤하늘의 별도 변함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레이는 머나먼 곳에 있을 항성들을 올려다봤다.
“나 역시 너처럼 세계를 구한 적이 있었지. 멍청하게.”
그레이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할 영원을 향해 말했다.
그녀는 무어라고 답할까.
그레이는 지금 당장 영원이 눈앞에 있으면 어떨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멍청하지 않아.’
영원의 음성을 상상해봤다. 차갑지만, 마냥 차갑지는 않은 음색은 듣기 좋았다.
‘그레이 딘하우스.’
그녀는 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너야말로 멍청하지. 특히, 인간을 돈과 권력으로 다 휘두를 수 있다고 믿는 점이. 그렇게 설득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어.’
그레이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누가 옳을까.”
답은 결국 주어질 것이다.
“논리가 아니라, 힘이 증명하겠지.”
파직.
미미한 정전기가 그레이의 손바닥 위에서 일었다.
경이로운 힘이, 다시 몸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또 다른 대제를 만나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정말로 상상 비슷한 것도 해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났다.
나쁘기만 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힘도 되찾게 되었다.
그 덕에 악한 충동에 사로잡힐 위험을 또 감수해야 하겠지만, 지금의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강하다는 것.
설령 일부를 통제할 수 없다고 해도, 그레이는 힘 자체를 세상 무엇보다 가장 즐겼다.
게다가 이제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선한 인간인 척 보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레이!”
탁. 탁탁.
저 멀리 해변에서, 그레이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검은 피부를 가진 이반 하이제렌이었다. 그는 모래를 밟으며 빠른 걸음으로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그레이는 나른한 얼굴과 목소리로 물었다.
“들을 만한 소식이 있나?”
“다른 S급 던전에서, 스카이가 던전석 5천 개 정도를 구해 왔어. 그나마 좋은 일이지.”
“그럼 이제껏 모은 총합은, 1만?”
“어. 1만 개 정도가 이제 섬 저편에 쌓여 있어.”
그레이는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영원이 오색문어의 S급 던전에서 던전석 3천만 개를 얻었다는 것을 몰랐다면 매우 기뻐할 만한 소식이었다.
“그게 좋은 소식의 전부는 아닌 것 같고. 그다음은 뭐야?”
이반은 속내를 간파해내는 그레이의 독심술이 놀라웠다.
“그…… 돔을 만드는 설계도 말이지.”
“박의총의?”
“맞아, 바로 그 설계도.”
이반은 침을 한번 삼켰다.
“투입되는 던전석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킨 설계안을 만들었어.”
“…….”
“우리가 지닌 던전석 한도 내에서도, 그것만으로도 재밌는 짓을 할 수 있어.”
“이반.”
그레이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동시에 눈으로 이반 하이제렌을 훑었다.
모두가 인정하는 최측근이라고는 하지만, 그를 향하는 것은 애정이 담긴 시선이 아니었다.
“이 섬 말고, 역삼 센터에는 던전석 수천만 개가 쌓여 있어.”
그레이는 영원이 수천만 개의 던전석을 박의총에게 주었다는 사실을 입수했다.
오색문어로부터 받은 던전석 전부를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센터 어딘가에 수천만 개가 차곡차곡 쌓였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1만 개와는 비할 수 없는 수의 던전석이, 거기에 있다고.”
“…….”
“스카이에게, 목숨을 걸고 싹 털어오게 해.”
“…….”
“나는, 수만 개로는 만족이 안 돼.”
그레이는 센터의 중심부에 들어가 그들의 뒤통수를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이반은 입을 우물거리며 답하지 못했다.
“네.”
답은 이반의 입이 아닌 곳에서 나왔다.
어린 소녀가, 갑자기 나타났다.
“스카이, 언제…….”
그레이는 전혀 놀란 기색이 아니었지만, 이반은 화들짝 놀랐다.
“할게요. 재밌을 것 같습니다.”
‘류하늘’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진 혼혈의 소녀. 그녀가 그레이를 마주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박의총을 죽여.”
“네.”
“그게 던전석을 털어오는 일만큼 중요해.”
“알겠어요.”
센터의 누군가와 닮은 것 같은 분위기의 소녀가, 품에서 센터 출입증을 꺼내 들었다.
한하늘.
여기에 있는 진짜 열다섯 류하늘과는 다른, 마흔하나인 동명의 가이드 이름이 역삼 본부가 정식으로 발급한 출입증에 적혀 있었다.
***
여현은 영원이 주는 완벽한 안식에 깊이 잠겨 있었다.
편안했다.
반쯤은 꿈 같고, 그럼에도 현실이 아니라고는 절대로 부정할 수 없을 시간이었다.
몸이 느릿느릿 변화하는 게 느껴졌다. 표면부터, 거대한 고통이 남기고 간 흉터가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영원은 그가 바라던 많은 것을 약속하면서도, 그가 동의할 수 없을 말을 했다.
“…….”
그러나 여현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지점을 곧장 짚어내지는 않았다.
그저 영원의 몸을 안고, 별빛이 내리는 바다 안에서 계속 유영할 뿐이었다.
그렇게 더 시간을 흘려보내다, 여현은 잠긴 목소리를 내어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든……. 세상을 구하고 싶으신 거죠.”
“……응.”
여현은 영원의 몸을 더 세게 안았다.
“가이드님.”
“응.”
“잠시.”
“응?”
“그만.”
여현이 치료를 멈추어달라는 부탁을 했다.
많은 부분이 회복되었더라도, 아직 상처가 전부 나은 것은 아닐 터였다.
“…….”
“지금은, 그만해주세요.”
부탁에 따라 영원은 치료를 멈추었다.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치료해주지 못해 다소 아쉽기는 하지만, 여현이 그만하기를 바라는데 계속 치료를 이어갈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몸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건 누구보다 여현일 거고.’
‘자기 자신의 몸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그래도 영원은 여현을 계속 안고 있었다. 그 상태로 그의 등을 토닥였다.
영원은 여현이 무언가 감당하기 힘든 감각을 느끼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급격한 변화가 유발한 위화감을 경계하는 것일 수도 있어.’
그레이와 맞붙는 거대한 사건을 앞두고 있으니 큰 변화는 부담일 터였다.
“그래. 잠시, 여기서는 쉬어가고.”
“…….”
“무리할 필요 없어. 치료는 나중에 이어서 해보자.”
그리고 둘을 불러들인 환상이 지워져 갔다.
바다가 사라져갔다.
다시 펜트하우스의 거실이었다.
그리고 영원은 그녀의 몸과 거리를 벌린 여현의 목소리를 들었다.
“가이드님.”
그는 영원의 곁에 앉아 있었다.
현실의 감각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영원은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소파 앞의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응.”
영원은 여현의 말에 답하면서도, 바로 변화를 파악해내지 못했다.
환상이 남기고 간 흔적 때문에, 잠시 현실감을 잊은 채였다.
“원하는 걸 이루실 수 있게 해드릴게요.”
“…….”
“뭐든.”
영원은 뒤늦게 여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각오 없이.
“…….”
그렇게 여현을 봤다.
완전히 무방비한 채로.
익숙한 검은 눈이 보였다.
“가이드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알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낯설었다.
“…….”
당연히, 치료가 계획대로 되었다면 이렇게 될 걸 알아야 했다.
놀라울 일이 아닌데 완전히 경직되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상을 구해드릴게요.”
“…….”
“계속, 저를 믿으세요.”
여현이 약속했다.
영원은 여전히 굳은 채였다.
처음 보는 외양의 남자가 곁에 있었다.
“…….”
그냥 스치듯 보았어도 시선이 절로 그를 따라 움직였을, 비현실적인 외양이었다.
골격 같은 기본적인 피지컬이야 말할 필요 없이 전과 같이 완벽했다.
그런데 얼굴마저 정말…….
깔끔한 턱선. 조각 같은 콧대. 쌍꺼풀 없이 큰 눈.
전체적으로 냉담한 인상임에도, 영원 자신을 보는 눈빛만은 다정했다.
그가 영원을 이미 한참 전에 치이게 만들었던 목소리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
‘반칙.’
‘정말로 반칙이야.’
‘아, 이건 규칙 위반이야.’
‘나 얼빠 아닌데.’
‘나는 내가 진짜 얼빠가 아니라고 생각해왔는데.’
영원은 더 오를 수 없다고 생각했던 덕력의 만렙이 더 높은 곳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얻은 바로 그 순간에 덕력 만렙을 채웠다.
‘빛이 나…….’
‘여기가 뼈를 묻을 자리다.’
영원의 최애는 알고 보니 사실 목소리보다…….
얼굴 쪽이 진정으로 영원의 취향의 세계를 초토화시키는 대존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