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은 오랜만에 별관 지하 강당에 발을 들였다.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화연과 이창결 부장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했다.
‘다들 정말로 엄청 바쁜가 보네. 지각도 하고.’
동그란 돔 형태의 강당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마지막으로 다녀가고 며칠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했다.
꼭 오랜 시간이 흐른 듯한 건 기분 탓이었다.
‘자, 혼자 연습부터 해볼까.’
타박. 타박.
영원은 강당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갔다.
조금도 그립지 않았던 에스퍼 마네킹들을 마주하자, 얼마 전 고생한 시간이 스쳐 지나가 다소 인상을 쓰게 되었다.
그래도 영원은 금방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목표는 더 뚜렷해졌고, 제대로 해내고 싶은 마음도 더더욱 크게 자라났다.
영원은 천천히 가이드의 물리력을 이용하여 에스퍼 모형들을 조금씩 움직여봤다.
스륵.
스륵.
어쩐지 마지막으로 같은 힘을 썼을 때보다도 더 능숙해진 듯했다.
‘원래 뭐든 하면 할수록 느는 거지.’
‘S급 던전 내에서의 무정지 가이딩이 능력을 더 성장시킨 모양.’
‘이미 최강인데 캐릭터의 주요 속성이 성장캐라니…….’
‘역시나 나는 밸붕X사기?’
영원은 스스로의 엄청난 성장 속도에 익숙했다.
점차 잡생각마저 사라졌다.
영원은 그저 힘에 집중했다.
잠시 후 화연과 이창결 부장이 들어왔지만, 조금도 집중력을 놓지 않았다.
“…….”
“…….”
강당에 들어오자마자 영원이 펼쳐놓은 장관을 본 화연과 이창결은 말을 아꼈다.
한 번에 모두 공중에 들어 올려진 마네킹들이 대열을 이루어 군무를 추듯 허공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에게 더욱 어려운 과제를 부여하기로 했다.
“……네?”
영원이 다시 한번 그 내용을 되묻게 만드는 과제였다.
“이창결 부장님의 방해 공작을 견디면서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아, 네에.”
“실전에서는 분명히 가이드님이 힘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없도록 훼방 놓는 일이 벌어질 수 있으니까요.”
무려 이창결의 S급 교란을 이겨내며, 1천 개의 마네킹을 움직이는 과제.
되물은 것도 잠시. 영원은 어떠한 불만도 없이 과제를 받아들였다.
그렇게 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털썩.
“하아, 하아…….”
영원은 기진맥진한 상태로 바닥에 쓰러졌다.
등을 바닥에 댄 채로, 높은 천장을 보는 영원의 가슴이 오르내렸다.
“하아…….”
조금만 더 하면 목표했던 바에 닿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서 조금만 더 했다가는 진짜 미쳐버릴 것 같은데.’
‘가이드도 폭주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리고 화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원 가이드님, 3회만 더 하겠습니다.”
“…….”
“일어나시죠.”
타박. 타박.
화연이 영원의 시야에 들어와 천장의 조명을 가렸다. 악마 같은 시선엔 자비가 담겨 있지 않았다.
“그…… 쌤.”
“3회, 다시 하시죠.”
영원은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는 표정으로 화연을 보았다.
“하면 됩니다.”
“…….”
“하려고 하면, 당연히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돼요.”
역시, 변함없는 ‘하면 된다’의 화신.
‘텁텁한 밤맛 미니 단호박…….’
영원은 다시 상체를 서서히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스승이자 감독관으로 만나는 강화연 가이드의 단호함은 여전했다.
파직.
이창결 부장의 물리력이 영원이 누웠던 바닥 근처에 스파크를 만들었다.
남은 3회 중 1회차의 도전이 다시 시작됐다.
이후 3회를 연달아 실패했다.
그래도 영원은 착실히 나아가고 있었다.
***
포옥.
영원은 펜트하우스 1층의 소파 위로 쓰러졌다.
드디어 집이었다.
‘1만 년 만에 돌아온 것 같아.’
여현은 없었다. 늦은 시간에 퇴근했는데도, 여현은 더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주머니에서 문어를 꺼내 낮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도톰한 담요를 끌어와 몸에 둘렀다.
폭.
‘홈, 스윗 홈.’
영원은 좀비처럼 느리게 움직이며, 다소 감격한 느낌으로 따뜻한 소파와 담요에 파묻혔다.
그다음엔 손을 움직여 여현에게 추가로 연락을 남겼다. 센터를 나설 때 이제 집에 간다는 연락은 해둔 채였다.
[나 이제 도착]
[감격 8-8]
[소파 짱좋아]
[전담님도 어서 컴컴]
가이딩 밴드로 여현에게 메시지를 연이어 보내고는 쿠션에 더 깊이 머리를 묻었다.
영원은 눈을 감고 잠에 빠진 듯, 아닌 듯 한 채로 여현이 퇴근하길 기다렸다.
그러다가 얕은 잠에 빠져들었다.
스윽.
여현이 곁에 앉아 몸을 덮은 담요를 정리해주는 걸 느끼고 깨어날 때까지.
***
“으응…… 왔어?”
영원이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쿠션에 묻혀 있던 머리카락이 부스스했다.
“네. 더 주무세요.”
여현은 정전기가 오른 영원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아냐.”
영원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지는 여현의 예쁜 손을 잠시 바라보았다.
“여현아.”
“네.”
“치료에 필요한 준비물은 던전석 말고는 딱히 없대.”
“…….”
영원은 바로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언제 긴급한 상황이 닥칠지 모르니,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박의총 가이드를 통해 들어야 할 정보는 다 들었다.
그러니 지금이 확실히 적기였다.
“S급 던전석은 많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도 가능해.”
영원은 곧장 테이블 위에 두었던 핫핑크 문어의 머리를 톡톡 두드려 조약돌 크기의 S급 던전석 몇 개를 손에 쥐었다.
“환각 같은 걸 볼 수도 있다고 들었어.”
“…….”
의총이 해준 설명도 빨리 전했다.
“치료를 시작하면, 가이드의 힘으로 채워진 바다 같은 곳으로 에스퍼와 함께 간다고 하더라.”
“바다……요.”
영원이 의총에게 보인 것과 유사한 반응이 돌아왔다. 여현 역시 영원처럼 바다가 무엇인지 잘 상상되지 않는 듯했다.
“나도 잘은 몰라.”
“…….”
“그런데, 지금이 적기잖아. 마침 매칭률이 높아졌고, 야악간의 휴식시간도 주어졌으니까.”
영원은 여현의 검은 한쪽 눈을 봤다.
한쪽 눈만 보였다. 그의 반대편 눈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반드시 다른 눈을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여현이 감추고 싶어 한다거나 계속 이대로 머무르기를 바란다면 치료를 강요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여현이 조금이라도 원한다면, 그가 회복하도록 돕고 싶었다.
‘여전히, 많은 이들이 괴물이라고 하지.’
당장 인터넷의 아무 사이트나 들어가도, 그런 표현을 수백, 수천 개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괴물.
괴물 에스퍼, 김여현.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받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아니면, 당장 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치료를 원치 않을 수도 있을까?’
영원은 여현의 생각을 다시 물었다.
“원하지 않는다면 말해 줘.”
“…….”
“뭐든, 싫다는데 강요하고 싶지는 않아.”
여현은 조금 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의 생각을 정말 알 수 없었다.
영원은, 답을 기다리며 여현에게 자신이 치료에 대해 생각하는 몇 가지를 더 말했다.
“아마, 내 힘으로 채워진 바다 같은 그릇 속에 들어와 유영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치료되는 게 아닐까 해.”
영원이 여현의 그릇에 발을 들였듯, 이번에는 그 반대 상황이 펼쳐질 것이라 짐작해 봤다.
“내가 초대하는 거지.”
“…….”
“나도 바다에 함께 들어갈 거고.”
여현의 그릇 안에 들어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여현 역시 느끼게 되지 않을까, 막연히 상상해봤다.
“…….”
“…….”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여현이 조용히 물었다.
“제가, 치료되기를 바라시나요.”
“내 생각이 중요해?”
“네.”
여현의 의도를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영원은 곰곰이 생각하다, 자신의 진심을 말했다.
“같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으면 좋겠어.”
“…….”
“내 에스퍼님을 불편하게 만들던 것들을 내가 사라지게 할 수 있으면 기쁠 것 같고.”
“…….”
“나는 그 정도야.”
“…….”
“지금이 좋아? 치료해주고 싶은 게 내 욕심이라면…….”
“가이드님.”
여현이 끼어들었다.
다시 잠시 조용해졌다.
“……응.”
“치료해주세요.”
허락을 얻었다면 실행은 빨라야 했다.
“그래.”
영원은 지체하지 않았다.
가이딩을 하듯 자연스럽게, 여현을 더 가까이 불러들였다.
“더, 가까이 와.”
여현이 이끌려왔다. 영원은 팔을 뻗어 그를 품에 안았다. 손에는 S급 던전석 몇 개를 쥔 채로.
“여현아. 쉬어가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으면 말해.”
슥슥.
영원은 여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내 에스퍼님이 혼란을 좀 느낄 수 있댔어.”
여현은 답하지 않고 영원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지직.
영원의 손끝이 검은 마스크를 찢었다.
상처 입은 맨살에 가까워지는 침범이, 여현을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흉터를 보려고 하지는 않았다. 손으로만 그의 상처를 느꼈다.
그의 몸이 떨렸다.
화상을 입은 거친 피부 위를 영원의 하얀 손이 감쌌다.
“괜찮아.”
긴장하지 마.
아프게 안 해.
영원은 다정히 속삭였다.
꽉.
여현의 손이 영원의 몸을 잡았다. 강하게, 그러나 아프지는 않게.
그리고 가이딩이 시작됐다.
우웅.
던전석까지 반응해, 미묘한 울림이 둘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