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64화 (64/142)

제6장

던전석 재벌이 되어버렸다

영원과 여현이 역삼 본부로 돌아온 때는 화요일 점심 무렵이었다.

원래 있던 당직실이 아닌 별관 지하 60층, 여현의 사무실.

사락. 툭.

두 사람의 발이 가볍게 바닥에 착지했다.

둘은 우선 3천만 개의 S급 던전석 획득을 센터 멤버들에게 알렸고, 짧은 기쁨의 시간을 함께 가진 뒤, 새로운 업무를 부여받았다.

―현이는 서 시장이랑 만나서 한반도 방위 플랜에 대한 논의를 좀 더 해야 할 것 같고.

이창결 부장은 그레이의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다시 한국을 비워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현에게 서시용 시장과 더 구체적인 방어 전략을 짜내 줄 것을 부탁했다.

이후에는 스피커폰 통화 상대방이 영원으로 바뀌었다.

―영원 가이드님께선 일단 의총 가이드님을 만나서 던전석을 전달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다음에 별관 지하 강당에서 화연 가이드님이랑 저랑 셋이서 뵙고요. 그다음엔 또…….

이창결 부장은 영원에게 완전히 꽉꽉 채워진 일정을 알려주었다.

‘사실상 SSSS급 연예인 수준 스케줄 아닙니까…….’

‘실화?’

그래도 영원은 그 이상 속으로 한숨을 폭폭 내쉬진 않았다. 대신, 그냥 일 더미를 덤덤하게 건네받기로 했다.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제는 ‘덤덤하게 받아들인다’는 표현도 질릴 지경이야.’

‘앞으로는 안 질리게 불평불만 말아야지.’

영원은 이창결 부장이 말한 순서를 꼼꼼하게 돌이킨 뒤 되물었다.

첫 임무는 박의총 가이드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럼 지금 박 가이드님은 별관에 계신가요?”

―예. 지하 32층에 연구실이 있습니다.

“지금 바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부장님, 이따 뵐게요.”

―네.

영원은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른 뒤, 최대한 빨리 의총에게 가려고 했다.

“여현아, 나 나갈…….”

그러나 바로 그럴 수 없었다.

달칵.

‘어…….’

포옥.

여현이 뒤에서 영원을 안아 품에 넣어버리는 바람에.

그러면서 여현은 영원의 가이딩 밴드에 손을 대 새로 부팅시켰다.

그의 심장박동이 만들어내는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

갑작스러운 백허그는 가이딩을 위한 접촉이 아니었다.

어딘가로 영원을 안고 날아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영원은 여현의 사무실에서도, 그의 품에서도 벗어나지 못한 채로, 닫힌 문 앞에서 눈만 여러 번 깜빡였다.

깜빡. 깜빡.

깜빡.

등에 여현의 단단한 가슴이 벽처럼 닿아 있었다.

이런 접촉이 처음은 아니었다. 떨치지 못할 힘으로 잡혀 있는 것도 아니었다.

‘…….’

영원은 얼마나 더 이대로 있어야 할지 고민했다.

“가이드님.”

“으응.”

먼저 정적을 깬 건 여현이었다.

“일 먼저 끝나면 연락하세요. 저도 그럴 테니까.”

“응.”

“밴드에서 추적 기능 끄지 마시고요.”

“……알았어.”

여현은 영원의 밴드가 제대로 작동하는 걸 재차 확인한 다음에야 영원을 놓아주었다.

달칵.

“…….”

영원은 여현의 사무실 문을 닫고 나와, 잠시 멈추어 있었다.

‘뭐지?’

‘뭔가…….’

‘평소보다 한참…….’

‘어쩐지 로판처럼 몽글거리면서 매우…… 달달했어.’

영원은 고개를 가볍게 젓고는 재빨리 발을 옮겼다.

―지하 60층입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영원은 여현의 손끝이 닿았던 가이딩 밴드의 밴드 부분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슥.

영원은 엘리베이터 한쪽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봤다.

‘근데 약간…….’

‘걱정해야 할까?’

‘매칭률이 높아져서 시작된 이상행동인가……?’

‘음. 그래도 여기서 더 불안할 정도는 아냐.’

영원은 상념을 싹 떨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목적지인 의총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 와중에 화연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복도에서 꽤 오래 통화도 했다.

―그레이는 비선별들을 전면에 내세워 베이징에서 대규모 전투를 치를 생각인 것 같아요.

화연은 영원에게 이창결보다 상세히 그레이의 계획을 알려주었다.

그레이가 ‘어떻게 민간인들을 공포에 빠트려 독재자로 군림하려 하는지’, 압축적으로 정리된 내용이 쏟아졌다.

―일단, 중국 당국과 일반 시민들을 상대로 무차별적인 전투가 벌어질 거예요.

―공포정치를 시작하려는 거죠.

―예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그레이는 측근들에게 우선 동아시아부터 ‘청소’한 뒤 점점 서쪽으로 간다고 공언한 듯하고요.

화연은 중국의 베이징이 그레이의 첫 타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들려주었다.

―화이트하우스 내에는 그레이의 측근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들이 그레이에게 직·간접적으로 주고 있는 도움도 많고요.

―그들이 미국의 대도시가 첫 타깃은 아니었으면 한다는 뜻을 강력하게 표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오랜 외교갈등으로 중국에 악감정도 가지고 있겠죠. 조지나 스피넬과 당링링의 사이도 좋지 않고.

영원은 조지나 스피넬과 당링링 사이의 역사는 전혀 몰랐지만, 딱히 궁금하지 않아 그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그런 입김들이 조금씩은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우습게도…… 화이트하우스에서 포섭된 미국인들 중에는 뇌가 상당히 깨끗하고 청순한 분들도 있나 봐요. 아직도 그레이가 ‘미국을 제외한 나라만’ 모두 손에 넣으면 만족할 거라고 믿는 거죠.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언젠가는 그레이가 미국까지 난도질할 게 뻔한데.

―뭐, 사람들이 항상 합리적인 사고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특히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영원도 화연의 생각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미 대통령은 그레이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며, 그의 행동에 미국의 책임은 없다고 할 거예요. 정치적 쇼의 일환이죠.

―화이트하우스 내부에도 그레이의 편이 가득하고, 세계지배에 동조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는 없으니까.

―대외적으로는, 군사력을 동원해서라도 중국 정부를 돕겠다고 하겠죠.

―하지만 워싱턴까지 그레이의 불길이 번지는 데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아요.

―‘미국은 건드리지 않기로’ 합의는 했겠죠. 뇌가 청순한 몇몇 협상가들은 그 약속을 믿는 거고요.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나중에 뒤통수 맞아도 그레이가 사실은 우리한테 이런 약속을 했었다고 공개적으로 호소할 수도 없을 거예요.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자기들이 얼마나 멍청했는지 전 세계에 광고하는 것밖에 더 되겠어요?

영원 역시도, 그곳의 몇 협상가들이 지나친 낙관에 빠진 것 같다는 화연의 평가에 동의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레이에게 무엇을 허가했는지 아직 감을 잡지 못한 듯했다.

‘아니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거나.’

어쩌면 그들로선 최선의 저항을 한 결과가 이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들이 멍청한 짓을 저지른 결과를 알게 될 일은 없게 만들어야죠.

영원도 화연과 똑같이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역사와 현실엔 2회차가 없으니까.’

―그레이의 계획을 막을 겁니다.

화연은 인명피해를 남기지 않고 상황을 정리할 방법을 제시했다.

―영원 가이드님이 훈련해온 힘이 이렇게 빨리 필요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에스퍼들의 능력을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무력화할 수만 있다면, 이쪽의 수적인 열세나 다른 모든 문제가 한 큐에 해결될 거예요.

화연이 제시한 방법 덕에 어째서 이창결이 화연과 함께 강당에서 보자고 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계획이 성공하려면 가이드의 물리력에 대한 훈련을 더 할 필요가 있었다.

‘어느 정도는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연습에는 늘 끝이 없지.’

화연은 영원이 그렇게 훈련한 가이드의 힘을 사용해, 엄청난 수의 에스퍼들을 일시에 무력화시켜보자고 했다.

믿을 수 없는 수의 에스퍼들을 대상으로, 동시에.

‘가이드의 물리력을 사용해서, 미친 에스퍼들이 그릇에서 힘을 꺼낼 수조차 없게 만들어야 하는 거야.’

―다만, 그 대상이 수천 명일 거예요.

―안 되면, 백업 플랜으로 계획된 유혈전이 시작될 테니까, 너무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고요.

영원으로서도 할 수 있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하지만 화연의 ‘유혈전을 하는 백업 플랜이 있다’는 말은 영원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영원은 실패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주어진 과제가 상당히 힘들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특히, 평범하고 연약한 사람들 수백, 수천만의 목숨이 그 시도 한 번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거북했다.

‘정말로 무서운 건 아냐. 엄청난 책임을 느끼는 것도 아니기는 하지만…….’

어쩐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해내야지.’

영원은 표정을 굳히고 복도 중앙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시도해 본 적 없는 능력이니 자신 있다고 단언하기도 어려웠다.

‘보통,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을 상황은 아닌데.’

‘기대에 부응하는 게 그리 힘겨운 일이었던 적도 없고.’

‘나도 뭔가가 달라진 걸까.’

여현 역시도 결과에 대한 책임감을 함께 나누어 가질 것 같아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도 몰랐다.

―잠시 후에 만나서 추가로 얘기해봐요.

“네. 이따 뵐게요.”

통화를 마칠 때가 되자, 여현의 사무실을 나설 때의 몽글몽글한 기분은 사라졌다.

그래도 발걸음을 멈추고 있던 시간은 잠깐이었다.

영원은 다시 다리를 움직여 의총의 연구실 앞에 다다랐다.

똑똑.

“심영원 가이드입니다.”

“가이드님, 들어오세요!”

달칵.

그리고 새로운 장소에 들어가자, 영원을 둘러싼 분위기가 또 한 번 급격하게 바뀌었다.

‘음…….’

그녀를 맞은 10여 명의 연구원들의 표정에서는, 우울감이나 절망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너무 밝고, 맑았다.

‘왜 이렇게 밝지? 왜 이렇게 다들 표정이 맑아?’

‘호실을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극 실사체로 그린 그림만이 어울릴 이 심각한 시기에…….’

‘순정만화 캐릭터처럼 별이 잔뜩 박힌 저 눈빛들 다 뭔데?’

의총도 두 손을 교차해 가슴께에 두고는 벅찬 감동을 담은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모두가 다 같이 그런 경건한 자세로 영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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