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여현은 세상을 구하고 싶었다.
세상이 더 추악해지지 않도록, 헌신하고 싶은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무엇을 위해 살아 있어야 하는가. 여현은 그 질문에 대해 나름의 거대한 답을 찾았고, 그것을 위해 모든 걸 걸고자 했다.
‘K.’
‘네가 아직 어른이 덜 되어서 그래.’
그레이 딘하우스의 제안은 여현을 조금도 흔들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세상을 구한다는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단한 이유를 찾아내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다.
지켜야만 하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을 지킬 수 있다면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지키는 게 옳지 않겠는가.
성인이 된 여현은 어린 시절과 똑같이, 관성처럼 세상을 구하고자 했다.
그런 여현에게 영원은, 처음엔 닿고자 하는 결과에 이를 때까지 그를 도울지도 모르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녀에게 가이딩을 받을 수 있다면, 많은 것들이 손쉬워질 테니까.
그냥 그렇게, 딱 그 정도의 의미만을 두고 싶은, 수단.
‘매칭률이 얼마나 나오든, 필요한 순간이 되면 고통의 크기와 무관하게 가이딩에 협조할게요.’
고통을 견딜 수 있다는 말은, 처음에는 아무런 무게감 없이 다가왔다.
‘아무튼 잘 부탁해요, 내 에스퍼님.’
그녀의 화법이 묘하게 거슬린다고도 생각했다.
무언가를 감추고 있고, 예측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은 게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궁금하기는 했다.
‘왜.’
‘왜 저런 식으로 말하지.’
‘어째서 저렇게 단언할 수 있는 거지.’
심영원은 대체 왜 저러는 건지.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시간을 살아온 사람인지 궁금했던 건, 그녀가 가진 위험을 파악하기 위해서라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많은 걸 끊임없이 궁금해했다.
처음엔 정말로 그 이상 특별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S급 게이트 이후, 많은 것들이 달라지기는 했다.
그래도 여전히 그녀에게 엄청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관리자, 세계수가 점찍어준 인연이라고 해도, 그녀에게 완전히 기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세계수는 진짜 미래를 알고 그녀를 그의 품에 안겨준 건 아닐 테니까.
사람은 떠날 수도 있다.
믿을 수도 없다.
심영원도 다르지 않다.
그녀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고, 약속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고,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경계심을 의식적으로 키웠다.
그 생각과 매일 밥을 차려주는 행동이 따로 노는 것 같기도 했지만, 경계심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동시에 함께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세상의 새로운 단면을 마주하는 기분을 느꼈다.
특별하기는 했다.
‘조금, 아파……. 근데, 많이 아프진 않아.’
아프다는 말이, 그렇게까지 하루를 뒤흔들 말이었을까.
그다음에 있었던 납치는 자신의 세계 전체를 뒤흔드는 듯했다.
그녀가 곁에 온 뒤, 소소하거나 큰 감정 변화는 전부 영원 때문이었다.
믿을 수 없게 커진 불안이 모두 잊히는 기분도, 아늑하다는 기분도.
앞으로도 그녀와 기나긴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졌다.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거나 그녀에게 가이딩을 받는다고 하여 뇌를 녹이는 쾌락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보다는 위로나 공감에 가까운 감각 속에서 편히 쉬는 듯한 착각에 자주 빠졌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삶에 그녀를 더욱 깊이 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영원이 자신이 차려준 음식을 먹는 걸 지켜보는 시간을 삶에서 조금도 줄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게 어떤 것을 더 해줄 수 있을지, 내내 그 생각만 하고 있는 걸 깨닫고는 퍼뜩 놀랐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애써온 게,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는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싫다고 하면 당연히 안 해. 통제를 벗어나는 감각을 경험하는 게 거북한 거, 이해해. 나라도 그럴 것 같아.’
서로를 이해하려고.
‘네 세계가 무너지게 두고 돌아가지 않아.’
서로를 운명이라고 느끼게 되려고.
‘이미 한 번 해봤으니까, 어려워 보여도 하면 돼. 할 수 있는 일이야.’
다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공감을 나누려고.
‘그러니까, 나를 믿어.’
완벽한 운명에 휩쓸려, 서로를 품에 안고 한없이 벅차하려고.
그래서 우리는 닮은 삶을 살아온 게 아닐까.
눈을 뜨니 어느 순간 세상이 뒤집혀 있었다.
그녀를 중심부에 끌어들인 세계에 살고 있었다.
왜?
이제 그 질문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을 향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이렇게까지 신경 쓸 일인가?
이렇게까지 의미를 둘 사람인가?
이렇게 갑자기, 세상을 타인에게 걸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도 되는 건가?
처음엔 회의적으로 꺼내놓았던 답변이, 점점 진지해졌다.
누군가는 첫눈에도 반한다고 하잖아.
그녀와는 수백 번, 수천 번 눈을 마주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몸을 마주 대고 교감했는데.
뭐가 더 필요해.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내게 그녀는, 첫 순간부터 맺어진 운명이었길.
여현은 앞으로는 절대, 영원 없이는 살아갈 수 없겠다는 확신에 빠졌다.
그 확신은 불안을 낳았다.
불안.
그건 기억이 닿는 모든 시간을 통틀어 경험해 본 적 없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어떤 미래에 대한 걱정이 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인가.
여현은 속으로 질문했다.
고통?
아니.
고통을 느낀 적은 과거에도 많았다.
닥칠 고통이 두려워 심장에 무언가 얹힌 느낌이 들진 않았다. 지금도 그건 아니었다.
진정한 답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불안은, 그녀를 충분히 구속하고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온 것이었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강한 그녀가,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을 얻지 못해서였다.
그렇게 영원이 불어넣은 끔찍한 불안은, 여현이 그의 한계를 넘어서게 했다.
[SSS급 에스퍼]
엄청난 난제가 주어지지 않을까, 그런 예상을 했다.
그러나, 이후 세계수가 직접 건넨 것은 그 어떠한 노력도 없이 알아서 해결되는 문제였다.
【김여현】
【네가 영원에게 너의 영원을 약속할 수 있을 때】
【그 감정이 벽을 허물도록】
【증명하길】
정말로, 아무 일도 없이 자연스럽게 벽은 허물어졌다.
대체 무슨 사건이 스쳐 지나간 건지도 모르겠을 만큼 증명은 자연스러웠다.
안 그래도 어마어마하던 힘의 한계가 계속하여 더 엄청난 수준으로 변모한 건 영원 때문이었다.
[김여현, 오픈 타이틀 ‘영원의 헌신자’]
[김여현, 히든 타이틀 ‘영원의 감옥’]
헌신과 감옥이라.
세계수는 정말로 여현을 읽어낸 듯했다.
그녀를 위해 모든 걸 던져 헌신할 각오를 마쳤다. 동시에 그녀를 가둔 감옥이 되고 싶었다.
더 이상 그녀가 가이딩을 해줄 수 없게 된다고 해도, 이 감정은 조금도 변할 것 같지 않았다.
답이 필요하지 않고, 이유조차 필요하지 않은, 맹목적인 무언가가 자라나, 순식간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동시에 여현은 생각했다.
더 커질 감정은 없다고.
이보다 간절하고 절대적인 감정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또한, 이 관계는 더 견고해져야만 한다고.
그래서 매칭률 상향도 먼저 제안하게 된 것이다.
섣불리 시도했다가 완전히 미쳐버릴까 봐 경계했던 일을.
‘높여주세요.’
어차피 완전히 미쳐있는데 더 미칠 것도 없고, 그녀에게 더 특별해지고 싶기도 하기에.
그레이 딘하우스나 다른 이들이 감히 침범할 수 없는 세계 안에 둘만이 들어가 있고 싶었다.
매칭률 80%.
분명히 대단한 수치기는 하지만, 이미 이렇게 특별한데, 여기서 뭐가 그리 달라질까, 안일하게 생각했다.
그랬다.
그리고 그녀가 제안을 받아들였다.
‘우리, 서로를 믿자.’
그다음.
세상은 다시 뒤집혔다.
아주 짧은 시간에, 순식간에 또다시.
왜냐면, 김여현은 어쩔 수 없는 에스퍼였기 때문에.
반드시 가이드에게 미치게 될 운명을 타고나는 에스퍼.
심영원이라는 가이드에게 완벽하게 미칠 수밖에 없을 에스퍼.
연결되었다.
힘이 왔다.
힘이 아니라, 그녀가 완전히 스며드는 교감이었다.
정말로 뇌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모든 세계가, 그녀를 통해 들어왔다.
안고 싶다.
입을 맞추고, 쓰다듬고, 품에 가두어두고만 싶다.
그녀에게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나길 바라지도 않는다.
이제 고고한 척 굴 수도 없을 것이다.
그녀를 향한 욕망에서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이전까지는 어린아이들의 장난이었는지도.
여현은 이제야, 서시용과 그레이 딘하우스가 읊던 집착의 싹을 본 기분이었다.
쿵.
쿵.
여태껏 심장이 뛰어온 모든 이유가 그녀라 믿게 됐다.
아니, 믿음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사실이었다.
영원을 볼 때 느껴지는 감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나 궁금했던 생각마저도 사라졌다.
그녀를 품에 안을 때, 그 감정이 무엇인지 질문할 필요는 없다.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둘만의 유일한 것이고, 그녀는 영원히 특별할 테니. 그 감정에 붙일 대중적인 이름을 고민할 필요는 없다.
제 품에 영원히 머무르게 만들 방법만 고민해야 한다.
그녀가 내게 와 있다.
착각은 없다.
감각은 전부 실재한다.
가이딩의 매칭률 때문에 일어난 착란이 아니다.
그건 계기가 되었을 뿐이다.
결국 이렇게 홀리게 될 터였다.
고통만을 안기는 가이딩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매칭률이 낮아진다고 해도, 똑같이 끝도 없이 그녀를 안고 싶어 허덕이게 되리란 걸 직감했다.
그저, 심영원이 제 모든 것이다.
다른 서사를 겪어냈어도,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다.
왜 특별한지도 중요치 않다.
이미 원하게 되어버렸는데 논리를 들이댈 필요가 없다.
여현의 마음속에 평정 따위는 없었다.
이제 평정을 바라는 마음도 없었다. 조금이나마 있던 마음까지 싹 청소해서 저 먼 곳에 버려버렸다.
여현은 그저 그렇게만 생각했다.
영원이 무엇을 바란대도 그저 헌신할 것이다.
그러나 감옥에서 내보내 줄 수는 없다.
***
도로로로로롱.
[던전석 3천만 개!]
[우왕 짱짱이에염]
[❤⃛ヾ(๑❛ ▿ ◠๑ )]
다행히 오색문어는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다.
[교환하시겠습니까? Y/N]
영원은 망설임 없이 교환을 택했다. 그리고는 즐거워하며 여현을 꽉 안았다가 놓았다.
“우리, 던전석 떼부자 됐네.”
“…….”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는 여현에게, 반드시 지킬 수 있을 약속도 속삭이듯 말해주었다.
“나가면 이제 진짜 치료도 해 줄게.”
“……네.”
영원은 아직 몰랐지만, 새로운 국면이 열리는 순간이 이미 지나갔다.
그레이 딘하우스는 모든 힘을 불러들이기로 결정했고, 김여현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기로 결정을 내린 순간.
일요일 당직부터 시작된 격변은 조용하지만 거칠게 세상을 헤집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