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62화 (62/142)

영원은 다시 S급 게이트에서 보았던 장면과 만났다.

이곳은 의식이 구현된 가상의 장소였다.

여기서 느껴지는 자신의 신체는 환상이고, 진짜 신체는 여전히 여현의 앞에 있을 터였다.

타박.

영원은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갔다.

의지대로 조종할 수 있는 수많은 수레바퀴. 느리게 돌아가는 맞물린 톱니들이 보였다.

과거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묘하게 낯설기는 해도 불편하지는 않았다.

전부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세계였다. 무엇도 힘들 게 없었다.

[매칭률 50.10%]

영원은 의지에 따라 변동시킬 수 있는 숫자를 마주했다.

망설이지 않고 그를 움직였다.

[가이드 심영원, 에스퍼 김여현과 매칭률 조정]

[매칭률 30.00% 증가]

90%까지 높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기는 했으나, 90%는 너무 과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80% 정도만 되어도 무정지 가이딩-에스퍼링에 아무런 장애가 없을 터였다. 더 급격한 조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영원은 오랜만에, 여현의 안의 허공에 다시 발을 들이기로 했다.

그의 그릇은 과거처럼 비어 있지 않았다.

영원의 힘이 주기적으로 이 그릇을 채우고 있었으니까.

그건 당연히 알고 있는 바였다.

다만 정확히 알지 못했던 것은, 여현의 그릇이 과거보다 이렇게나 견고해졌다는 것.

‘…….’

방어장치 따위 없는 삭막한 댐과 같았던 그릇은, 완벽한 요새가 됐다.

‘무언가가 바뀌었다고는 생각했지.’

‘내게 바로 파악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면.’

‘SS급, SSS급의 경계까지도 넘어갔나.’

영원은 여현을 다그쳐서 변화의 진실을 바로 알아내야만 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일단 기다릴게.’

‘네가 나에게 그러했듯.’

변화에 대한 추측의 자리에 나름의 확신을 채우게 된 것만으로, 일단은 족했다.

끼긱.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멈추었다.

매칭률 조정은 오랜 시간을 소요하는 것 같아도, 기분만 그럴 뿐 실제로 외부에서 시간이 오래 흐르지는 않았을 터였다.

영원은 멈춘 수레바퀴 앞에서,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했다.

소유욕에 관한 그레이의 단언이 불현듯 찾아와 아른거렸다.

‘…….’

‘괜찮아.’

‘뭐 어때.’

두렵진 않았다.

[매칭률 80.10% 고정]

이제 여현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더 강해지겠지.

긴장이 됐다.

S급, 그 이상의 물리계 에스퍼.

그의 낯선 힘은 짐작하지 못했던 수준까지도 순식간에 나아갈 터였다.

지끈.

머리와 심장이 동시에 뛰는 느낌이 들었다.

영원은 표정을 굳혔다.

이미 무언가에 이끌려가고 있었다.

착란이 시작되었나.

벌써, 매칭률이 극도로 높은 존재와 신체를 마주 닿게 한 채로, 그로 인한 환각에 휩쓸리고 있나.

영원은 그 감각을 경계하면서도, 거부 없이 받아들였다.

“가이드님.”

다시 진짜 현실, 그녀를 부른 여현의 앞이었다.

“응.”

수레바퀴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그의 검은 눈동자뿐이었다.

“여현아.”

영원은 여현의 눈가에 닿은 손을 떼지 않았다.

“……네.”

“우리, 서로를 믿자.”

관리자가 준 15분은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서 매칭률 80%를 넘어선 뒤의 첫 가이딩을 해야만 했다.

가이딩에 최대한 빨리 익숙해져야만 무정지 가이딩-에스퍼링이 가능해질 터였다.

영원은 자신에게 속삭였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는 생각해.’

‘낯선 느낌일 거야.’

‘하지만 결국에는 익숙해질 거고.’

‘편안해질 걸 알아.’

극도로 높은 매칭률을 가진 에스퍼와 가이드가 오래오래 행복했다는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극적인 관계는 극적인 진행, 극적인 끝으로 이어지니까.

집착은 집착대로, 폭주는 폭주대로 찾아왔다.

도를 넘은 환희는 항상 균열을 만드는 법.

서로에게 미친 두 사람은 대의를 저버리기도 하고, 광기에 미쳐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여현과는 그러한 파멸에 이르지 않을 것만 같았다.

“네. 믿어주세요.”

여현이 저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저런 눈으로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이쪽은, 다른 에스퍼와 가이드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무력을 가졌기에, 뭔가가 잘못될 경우 세상에 불러올 파멸이 정말로 막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런 결과가 두렵지 않았다.

사락.

바람이 잠시 옆을 흘러갔다.

그레이 딘하우스가 멀리 있었다.

스페이드 팀의 살아남은 자들 역시 함께 있는 게 느껴졌다.

그들의 존재도, 이 공간의 다른 모든 것들도 함께 지워지는 듯했다.

영원은 주저하는 일을 멈추었다.

호흡도 멈추었다.

손끝의 감각에 집중하고, 여현의 존재를 인식했다.

앞에 있는 그가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힘을 흘렸다.

가이딩.

여전히 호흡은 멈춘 채였다.

영원은 여현의 눈을 보았다.

연결되었다.

완벽하게.

영원은 숨과 심장을 동시에 조여들게 하는 감각에 떨었다.

여현의 눈동자 역시 잠시 흔들렸다.

둘의 시선은 오래도록 섞여 있었고, 끝내 여현은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가두었다.

꽉.

쿵. 쿵.

영원은 거세게 뛰는 여현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끝나가는 15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멀리 있는 그레이 딘하우스의 존재 역시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의 교감만이 유일한 문제 같았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건 그뿐인 기분이었다.

모든 게 아득했다.

그러나 시련을 주는 사건이 멈출 리가 없었다.

[15분 거의 끝나갑니당]

[잘들 쉬셨나요]

[♡✧ (⋈◍>◡<◍)。✧♡]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

[5]

[4]

[3]

[2]

[1!]

핫핑크 문어가 미친 폭주를 시작했다.

김여현의 대응은 그보다 더했다.

진짜 저세상에 닿을 듯 미친 건 테이블을 머리 위에 얹은 문어가 아니라, 영원을 안은 여현 쪽이었다.

***

폭주처럼 보였다.

“저 XX 미친 거 아냐!”

미친 초보 가이드가 가이딩 타이밍을 놓쳐서, K를 폭주하게 만든 거라 쉬이 결론지은 이가 다수였다.

그러나 그레이 딘하우스는, 그게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았다.

“…….”

이창결과 백율, 강화연, 장제권이 사라질 때부터 무언가 미친 일이 벌어지리란 걸 예감했다.

“하…….”

어이없는 탄식이 흘렀다.

‘미쳤군.’

김여현은 단순히 힘의 벽만을 넘어선 게 아니었다.

50%를 한참 초과하는 매칭률을 가진 가이드를 얻었다.

무정지 가이딩-에스퍼링.

저건, 바로 그것이었다.

드득.

손에 힘을 가득 실은 그레이는, 웃었다.

‘정말로.’

‘내가 나를 통제할 수도 없게 만들 힘을.’

‘나 역시 완전히 봉인해두었던 그 빛과 암흑의 힘을 다시 불러들여야 하나.’

그레이 딘하우스에게도 지금, 과거의 영원처럼 땅 깊은 곳 어딘가에 봉인해둔 힘이 있었다.

영원처럼 대제의 힘 전부를 봉인해 둔 것은 아니기에 그를 되찾는다 해도 정말로 엄청난 힘을 되찾는 것은 아니나, 어쨌거나 현재의 판도를 뒤흔들 정도는 되었다.

‘대제, 심영원.’

‘관리자와 다시 언약을 맺게 만들 생각인가.’

‘그러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할 테니 피하고 싶었는데…….’

그레이 딘하우스는 원래 세계에서 정상에 군림했을 영원의 모습을 그려봤다.

‘…….’

아름다웠을 것이다.

끔찍했을 것이고.

자신 역시 그러하였듯이.

대제는 진짜 싸움을 시작하게 할 모양이었다. 이런 장난감 놀이가 아니라, 정말로 세상 모든 사람의 명운을 걸게 만들 전쟁.

‘지구 위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든 안 하든.’

‘이미 그들의 목을 다 걸었어.’

그레이는 빠른 판단을 마치고 말했다.

“당장은 나가야겠네. 못 버텨.”

그레이가 그 말을 마치기 전에, 이미 도망쳐야 한다는 판단을 먼저 내린 S급 각성자들이 몇 있었다.

그들은 그레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일사불란하게 도망쳤다.

그레이는 잠시 더 남아서, 여현의 힘을 지켜보았다.

어떤 소음도 내지 않고, 모든 세계를 허물 듯한 힘을.

그레이 딘하우스는 꽉 조여진 것만 같은 심장 위에 손을 얹어보았다.

심영원과 김여현.

웃음은 사라진 채였다.

눈앞에 펼쳐진 건, 더는 그를 웃을 수 없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퇴장.”

잠시 후, 그레이도 던전에서 나갔다.

K의 힘이 그의 곁까지 번져오기 전에, 나가야만 했다.

굴욕적이게도.

전담 가이드인 조지나도 없고, 모든 힘을 쓸 수도 없는 상태에서, K의 미친 짓거리에 대응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다음에.’

‘그래. 지금은 아냐.’

‘일단은 중국에 가서 난잡한 짓을 해 보자고.’

그레이의 속마음은 영원이나 여현에게 닿지 않았다.

[팀 스페이드 ♠, 127명 전원 탈락]

[던전 내 남은 인원 없음]

[관리자, 오색문어가 하트 팀을 축복합니다 ♥-♥]

[역시 세상은 사랑♥]

[♡]

영원과 여현은 관리자의 알림에는 시선을 두지 않았다.

힘과 교감에만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크루즈는 한참 전에 아무런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이 던전의 보스, 룰렛 테이블은 영원을 품에 안고 공중으로 떠오른 여현을 해하려 했지만,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들에게 닿기도 전에 블랙홀 같은 균열에 테이블이 쏘아 보낸 힘 자체가 어그러졌다.

여현은 광기와도 같은 힘을 조용하게 쏟아냈다.

사위는 잠시 조용했다.

뿌우우우우우우-!

문어가 여현을 마주하고, 여현을 타깃으로 제대로 된 싸움을 걸기까지.

콰광!

에너지의 거센 충돌이 발생했다.

콰지직!

공간 자체가 찢기는 듯한 충돌이었다.

그런 격동 속에서도, 영원이 안긴 여현의 품은 안락했다.

영원은 팔을 여현의 목에 둘러서 그를 안고, 안 그래도 비현실적인 장면이 완벽하게 비현실적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봤다.

시간 감각도 사라졌다.

영원은 여현이 던전 속의 세계를 지워내는 장면을 꼼꼼히 인식해보려 했다.

어려운 일이었다.

‘괜찮아.’

‘생각은 멀쩡해.’

‘80%가 처음이라 그래.’

영원은 끊기지 않는 가이딩을 이어가며, 짐작보다는 꽤 평정을 잘 유지해냈다.

감각이 낯선 것과는 별개로, 인식체계나 감정이 완전히 어그러지는 일은 다행히 없었다.

그러나 또, 그런 생각은 들었다.

‘기분은 확실히 좋네.’

‘이 고양감.’

‘세상이 이렇게 쉽게 녹아내리는 거 보는 것도 재밌는 듯.’

‘편안하고.’

‘안락한 펜트하우스에서의 잉여인간 생활이 엄청 가까이에 있을 것 같아.’

‘그런 미래 빨리 오길.’

‘짱짱 쎈 내 에스퍼님이 생각보다 빨리 교통정리 해주지 않을까.’

영원은 80%까지의 매칭률 상향은 그렇게까지 주저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고 결론지었다.

견고하고 안락한 방을 제공해줄 여현의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야겠다는 생각도 다시금 했다.

이 평안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고.

여현과의 가이딩이 주는 감각은, 어쨌거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중독 같았다.

‘아직은, 결단을 내리면 벗어날 수 있는 단계야.’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레이의 말에 설득되진 않았지만, 그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원한다면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도망칠 이유는 없었다.

귀찮을 일 만들지 말고, 계속 이대로 있고 싶었다.

‘다만 두려워해야 할 수도 있는 건…….’

여현의 동요는 이 수준에서 그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것.

하지만 영원은 낙관적이었다.

영원은 여현의 평정을 과신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