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K가 너를 자유롭게 두지 않아.”
“…….”
“아직,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김여현을 본 적이 없겠지. 명동 게이트? 그건 진짜가 아니었어.”
그레이는 목소리를 더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K는 반쯤은 체념한 상태였고, 최악에 닿기 전에 네 가이딩이 있었으니까.”
“…….”
“알게 될 거야. 에스퍼들은 시련 앞에서 연금술사보다 강해져. 더 극악하게 미쳐버리고.”
영원은 그레이가 뱉는 말에 오직 거짓만이 담겨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궁극적인 힘을 쓰기 위해, 연금술처럼 ‘계약’에 따라 바쳐야 하는 대가도 없지.”
에스퍼들은 거대한 힘을 쓴다고 해서, 연금술사처럼 그 대가를 지불하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영원은 대제의 육체를 되찾아 오기 위해 108시간 동안 괴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외에, 엄청난 힘을 사용하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과거 세계의 기억들까지도.
‘알아. 여현이는 S급 게이트를 닫고도 후유증을 겪지 않았어.’
‘가이딩이 필요했을 뿐.’
‘그렇지 않다면 폭주가 있었을 거라는 게 그 능력의 약점이고.’
연금술사와 에스퍼가 감당해야 하는 위험이 완전히 다르다는 건 영원도 익히 아는 바였다.
“네가 펜트하우스에 갇히기로 한 건, 원하면 언제라도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은연중에 믿고 있었기 때문이야.”
“…….”
“하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면? 진짜 너와 영원을 함께하고자 하는 구속을 견딜 수 있나?”
“…….”
“진절머리가 날 거야. 나처럼.”
나처럼.
그레이는 끝부분에 강한 힘을 실었다.
“너는 나와 비슷할 테니까.”
“…….”
“나는 끔찍하게 질리게 되더라고. 조지나와도 언젠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
여현과 자신의 관계에도 권태 같은 것이 온다는 뜻일까.
당장 영원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관심이 가는 부분도 아니었고.
영원은 그래서 대신 여현의 힘의 한계에 대해 생각했다.
‘나보다 딘하우스가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영역일 수 있지.’
‘저쪽은 이쪽 세계에서 나보다 훨씬 긴 시간을 보낸, 에스퍼니까.’
김여현의 한계.
알 수 없다.
‘약간은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
‘그게 대단한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고.’
‘그 사실이 나를 꽤 긴장하게 했던 것 같아. 방금까지. 아니, 사실은.’
‘여전히 긴장하고 있나?’
‘지금도?’
그레이도, 영원도 생각에 잠겨있을 뿐 잠시 무엇도 말하지 않았다.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절머리 나는 집착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K의 곁은 떠나야 해.”
그레이는 영원에게서 변화를 찾아내려 주시했다.
“너는 그렇게 살지 못해.”
그레이는 처음엔, 인간에 대한 환멸을 논하면서 영원을 설득하려 했다.
그건 실패했다.
그렇다면, K가 그녀에게 귀찮으면서도 쉽게 떼어낼 수 없게 될 존재라는 걸 알려 그와 그의 가이드 사이에 균열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연금술사들의 대제.”
“…….”
“그 이름에 구속은 어울리지 않잖아. 벗어나. 더 어려워지기 전에.”
“…….”
“도피처가 필요하다면, 내가 만들어 줄 테니까.”
차갑고, 색이 옅고 마른 편이라 여려 보이지만, 그녀, 심영원이 품은 힘은 이곳 세계를 완벽하게 뒤집을 수도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확실히 길어진 듯한 단발.
가만히 보다 보니 머리카락이 자라는 숨 쉬는 인간이라는 게 놀랍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생명을 지닌 무엇이 아니어야 할 것 같아서.
차라리 인형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렸다.
“딘하우스.”
그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도피처 같은 소리 하네. 잘도 거기가 도피처겠다.”
“…….”
“그리고 네가 하는 말이 다 옳다고 해도 딱히 여현이랑 뭘 어떻게 변화시킬 생각 없어.”
“…….”
“김여현이 내 생각보다 강하다면, 사실 좋을 것 같아. 너를 처치하기 위한 내 고생이 줄어들 테니까.”
“…….”
“내 도피처인 내 펜트하우스에 계속 있는 거, 아주 환영이고.”
영원은 깊이 고민하지 않고 선을 그었다.
‘쟤가 뭐라고 하든.’
‘대체 내 인생에 왜 이렇게 많은 분량을 잡아먹으면서 에너지 낭비하게 하는지 모르겠네.’
‘그만 말하고 판이나 돌리자고, 부디.’
‘펜트하우스 말하고 보니까.’
‘넘나 빨리 가서 눕고 싶다.’
‘센터에서 도망치느라 개고생하는 것보다야 그냥 펜트하우스 꼭대기 침대에 있는 게 좋지.’
그레이 딘하우스는 심영원에 대해 착각하고 있었다.
‘달라.’
‘다르니까, 착각은 그만했으면.’
그녀가 구속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영원은 안락한 펜트하우스에서 사는 삶을 바랐고, 그 과정에서 자유에 대한 심각한 고뇌는 필요치 않았다.
그냥 지금 아주 그러고 싶었으니까.
문제가 생기고 불편해지면, 그때 가서 새로 고민을 시작해볼 생각이었을 뿐이다.
‘복잡한 사고를 거쳐 자유니 뭐니.’
‘피곤한 건 나중에.’
‘일단은 단순하게.’
‘200평 펜트하우스에서의 아늑한 삶이 꿀이라고 생각했던 거지.’
영원은 그레이처럼 사고하지 않았다.
계속 이야기를 나누어 봤자 지지부진한 대화는 평행선만을 달릴 터였다.
“…….”
“…….”
“포에버.”
“…….”
“여기에서 나가면, 중국에서 재미있는 일이 시작될 거야.”
그레이는 영원이 다시 한번 선을 그었는데도, 끝까지 질척거리면서 다른 카드까지 꺼냈다.
어차피 그녀에게 지금 계획을 알려주어도, 가이딩 밴드가 먹통이라 던전 밖으로 메시지를 보낼 수 없으니 베이징에서 일어날 일을 막지는 못할 터였다.
“약한 것들이 쓸려나가는 것을 보며, 그들을 구하고 싶어지면 내게 부탁하러 와.”
“…….”
“네 반도만은 구해줄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으니까.”
영원은 그레이의 저 말은 믿지 않았다.
그레이는 누구도 ‘구해주지’ 않을 터였다.
“결국, 언젠가는 내 이야기를 들으러 오게 될 거야. 네가 지금 아무리 내 말에 적대감을 품고 있더라도.”
“…….”
“너를 알아. 네가 겪어왔을 시련도 알아. 우린 같은 곳에서 왔잖아. 그건 네가 짐작하는 것보다 더 엄청난 공통점이야.”
영원은 가만히 그레이를 봤다.
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아 정말로 질리는 기분이었다.
여현에게 질림 비슷한 걸 느끼기 전에, 그레이에 대해서는 이미 지긋지긋한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다.
“딘하우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엔 고저가 없었다.
“있잖아.”
그레이는 영원이 할 말을 기다렸다.
“내가 싫어하는 게 있어.”
“…….”
“나를 안다고 착각하는 것. 나에 대해 단언하는 것.”
그 오만이 싫다.
“너는 나를 몰라.”
“…….”
“김여현보다도 훨씬, 더 몰라.”
어차피 누구도 알 수 없다.
“베이징에서 뭘 하겠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약한 사람들을 가지고 하는 협박, 내게 먹히지 않아.”
약한 것들을 전부 구하기 위한 삶을 살아온 적 없었다.
‘어차피 불가능하지.’
‘힘이 아무리 강해도 불가능해.’
한 번도 그와 같은 불가능한 걸 꿈꾸지 않았다.
말했듯이, 심영원은 신이 아니니까.
“자유? 그것도 별 의미 없어. 세상 모든 구속 앞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이 어디 있겠어.”
“…….”
“게다가 내가 바란 구속이야.”
김여현의 펜트하우스에 들어가기 위해 6시에 출근까지 했다.
어떻게 얻은 자리인데, 저딴 말에 휘둘려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그냥 내가 적당히 알아서 살 테니까 신경 좀 꺼. 오지랖 그만.”
“…….”
“그리고, 딘하우스.”
영원은 가볍게 덧붙였다.
“네 약점은.”
“…….”
“네가 만족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는 거야.”
무엇 하나만 망가져도, 그레이 딘하우스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그냥 망쳐버릴 수도 없었다.
그가 생각하는, 그가 거쳐야 하는 단계가 있으니까.
“네 연설은 다 끝난 것 같고 나도 더 할 얘기 없는데. 더 여기에 있어야 해?”
“…….”
“…….”
그레이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너의 그런 말들이, 흥미로워.”
그레이는 손을 뻗어 원형 판의 손잡이를 잡았다.
투둑.
영원 역시 손잡이를 잡자, 원형 판이 느리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게 와도 돼. 언제나 환영이야.”
그레이는 그렇게만 다시 덧붙였다.
차라랑!
어느 순간부터 판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했다.
[보스, ‘룰렛 테이블’이 발동합니다]
영원은 판을 주시하며 회전이 멈출 때를 기다렸다.
[정지까지 카운트다운]
[5]
[4]
[3]
[2]
[1!]
마침내 원판이 정지했다.
숫자 3에서.
도로로로로로롱.
[3]
[관리자, □□□□가 숫자를 확인합니다]
[확인되었습니다]
[3!]
[흑흑 ‧⁺◟( ᵒ̴̶̷̥́ ·̫ ᵒ̴̶̷̣̥̀ )]
[거액은 아니군요]
[올인 게임 배팅의 상금 상한은 3배입니다!]
영원은 자신의 1천만 골드에 3을 곱해 보았다.
3천만 골드.
그것만 해도 엄청난 양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3천만 개의 S급 던전석을 얻을 기회.’
‘이제 해야 하는 게 쉬운 게임은 아니겠지?’
영원은 그 게임이 무엇일지 알게 될 때까지 긴장을 놓지 않았다.
도로로로롱.
[심영원, 타이틀 ‘우연의 독재자’, 관리자 □□□□의 환희의 놀이에 초대되었습니다]
[던전의 관리자, □□□□가 이름을 해방합니다]
[‘오색문어’]
[던전의 관리자, 오색문어가 3배 올인 배팅의 시작을 알립니다]
[데스매치 ‘룰렛 테이블과 핫핑크 문어 합체★’!!]
콰과광!
순식간에 게임장 전체가 무너져내렸다.
쏴아.
쏟아지고 있던 비가 순식간에 완전히 그쳤다.
쿠르릉.
바람과 파도도 멎었다.
영원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음.’
게임장 위에 정지해 있던 핫핑크 문어의 머리 위에 왕관처럼 갑자기 게임 테이블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어가 기지개를 켰다.
쾅!
엄청난 소리가 난 건 문어 때문은 아니었다.
“K.”
여현과 그레이의, 무형의 영역충돌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어느새 힘을 써도 되는 게임장 밖이었다.
여현이 기다리고 있던 곳.
다만, 타인에게 상처를 가할 수는 없었기에, 바로 무력 충돌이 거하게 일어나지는 않았다.
영원은 여현을 봤다.
다시 긴장이 내렸다.
카지노가 무너진 덕에, 흥겨운 배경음악도 없었다.
여현은 그레이를 보고 있었다.
분노를 담아.
“……거봐.”
“…….”
“안에서 내가 포에버한테 키스라도 했다고 하면 바로 죽자 살자…….”
쩌적.
순간적으로 그레이의 몸이 굳었다.
‘뭐야.’
그레이는 예상하지 못한 힘이 스쳐 지나간 목 부근을 손끝으로 짚었다.
“…….”
“지껄여 봐.”
조금이라도 힘이 더 깊이 들어왔으면, 상처를 내고 피를 흘리게 만들었을 터였다.
아주 미약한 차이.
상처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가 없었다면, 곧장 급소까지 들어올 수도 있었다.
“어디 한번. 계속.”
굳은 것은 그레이뿐 아니라 영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뭐지?’
영원은 근처를 휩쓸고 지나간 여현의 힘의 궤적을 쫓았다.
폭.
그리고 그 순간 뒤에 다가온 여현의 품에 가두어졌다.
“…….”
여현은 영원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힘이 실렸다.
“가이드님.”
그레이를 향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정한 부름이 들렸다.
“괜찮으신가요.”
“……응.”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괜찮았다.
어쩌면 도망칠 수 없을지도 모르는 구속도, 무엇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