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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58화 (58/142)

삐걱.

‘음…….’

영원은 망설임 없이 판을 돌리려고 했다.

시차를 두고 돌린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무지막지하게 무거운 판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투둑.

손잡이가 틀어지는 소리가 날 뿐이었다. 힘을 쓰지 말라고 하니 억지로 돌아가게 할 방법도 없었다.

“손잡이가 두 개 있는 걸 보면, 함께 돌려야 하는 모양인데.”

뚜벅. 뚜벅.

반대편에서 테이블 앞으로 다가온 그레이가 말했다.

“그럼 그쪽 잡아.”

영원은 그레이에게 손잡이 방향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영원.”

그레이는 팔은 움직이지 않고 영원만 불렀다.

“원래 세계에서도, 이름은 ‘영원’이었나?”

“…….”

“그곳에서, 대제인 너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강자의 운명이라는 게 그러니까. 그랬나?”

“…….”

“아니면, 절대자의 운명에 반해 네게 헌신하고자 했던 누군가가 있었을까?”

응. 응. 아니.

영원으로서는 그렇게 진실한 답을 해줄 이유가 없는 질문들이었다.

영원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

“그동안 그 운명을 진실로 이해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았나?”

“…….”

“K가 기다려 온 운명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지?”

영원은 그레이가 던진 모든 질문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저 빨리 그레이가 판을 돌리는 데 협조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네가 곁에서 사라져 지금 불안을 느끼고 있을 K를 걱정하나?”

“…….”

“사실 서두를 이유가 없는데, 그래서 나를 더 보채고 싶은 거잖아?”

그레이는 눈꼬리까지 접으며 웃었다.

“딘하우스.”

“응.”

“뭘 알고 싶은 건데?”

“이미 알게 됐어.”

“…….”

“네 약점은 K라는 것.”

심영원은 김여현을 엮은 도발에 가장 빨리 반응한다.

상대를 자극하는 방법을 영원만이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레이도 알았다.

“K의 약점이 너인 줄 알았지만, 아니었어.”

그레이는 어쩐지 옅은 회색으로 보이는 눈으로 영원을 훑어보았다.

“그 반대지. 어이없기는 하지만.”

드륵.

그레이는 테이블에서 의자를 끌어 빼낸 뒤 앉았다. 그리고는 영원에게도 턱짓했다.

“나는 당장 이 판을 돌릴 생각이 없어.”

“뭘 하겠다는 건데?”

“이야기.”

“…….”

“서로 알아가는 얘기를 좀 해보자는 거지.”

영원이 인상을 찡그렸다.

“우리가 서로를 알 시간이 없었잖아. 마침 여기는 안전하고, 평화로워.”

영원은 조금도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았다.

“포에버. 네가 모르는 걸 알려줄까.”

“…….”

“가이드들도 처음엔 원래 그래. 가이딩에 중독되는 게 에스퍼만은 아냐. 특히 첫 가이딩 상대에게는.”

김여현은 네 생각만큼 네게 특별한 무엇이 아니야.

그레이는 눈빛으로도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각성자들은 쌍방이 가이딩에 미치게 돼.”

스륵.

그레이는 옷소매를 매만지고,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K와 매칭률이 50%? 그 정도라고 했지? 그건 애들 장난이야. 숫자가 올라가면 어떤 감각에 젖어드는지, 그게 얼마나 중독적인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일걸.”

“…….”

“나중에,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어떤 에스퍼에게도 똑같은, 어쩌면 그보다 더 강렬한 연민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나 역시 그랬으니까.”

“…….”

“첫 가이드는 특별했어. 그러나 몇 년 뒤 내 손으로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았지. 그렇게 돼. 그걸 알아 둬.”

영원은 조소했다.

그런 영원의 표정에 그레이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안 궁금해.”

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앉아서 들어. 어차피 네게 다른 선택권은 없어.”

영원이 체념하듯 고개를 작게 젓고는 의자를 빼냈다.

드륵.

둘은 마주 앉았다.

카지노의 음악이 들려오지 않아 아주 조용했다. 슬롯머신이 돌아가는 소리 역시 멀리서라도 들려오지 않았다.

“알아. 지금 당장은 관심 없겠지.”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그레이 딘하우스에게 갈 일은 없었다. 그 문장을 마치기 전에 그레이가 끼어들었다.

“너를 보며, K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너는 몰라.”

“…….”

“너는 지금 너에게만 초점을 맞추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지. 네 입장에서 쓰이는 얘기는, K의 시점을 너무나 많이 삭제하고 있어.”

“뭐라는 거야.”

“김여현이 네가 아는 것만큼 순수할까?”

영원은 여현이 순수한지, 순수하지 않은지 관심 없었다.

그리고 관심 없는 이야기를 듣는 데에 소모해야 하는 에너지와 시간이 아까웠다.

“그리고 말해주고 싶어. 내가 겪어온, 네가 짐작도 못 했을 경험들에 관해서도.”

“…….”

“내가 아무런 계기도 없이 이렇게 살고 싶었을까?”

영원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너는 말이지.”

“응.”

“자기연민에 갇힌 채로 악당의 서사,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영원으로서는 역시 관심 없는 주제였다.

‘무슨 이게 다X나이트도 아니고.’

‘지가 조X야?’

‘저거 들어주는 건 인생 낭비야.’

영원은 인생의 낭비를 적극적으로 열렬하게 추구해 온 자신의 잉여인간 생활은 잠시 잊은 채로 인생의 낭비를 경계했다.

“뭐,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지.”

“안 궁금해.”

복잡한 빌런의 스토리가 아무리 요즘의 콘텐츠 트렌드에 부합한다고 해도, 역시 관심 없었다.

어떤 식으로 학살을 정당화하려고 해봤자, 그래 봐야 그레이는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였다.

학살자이자, 독재자이고, 구제 불능인데, 정신연령까지 심각하게 어린 저질 범죄자.

“너한테는 내가 높은 곳에 있어서 내가 자꾸 보이는 모양인데, 나한테 너는 그런 존재가 아냐.”

“…….”

“너를 이런 취급 하는 사람이 흔치 않았겠지. 그래서 내가 네게 특별하다는 건 알겠어.”

영원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런데, 평범하게 살아온 평범한 사람끼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나도 당연히 너 이해 못 해.”

“…….”

“우리는 연금술사라는 공통점밖에 없는데, 그게 나한테는 별로 안 중요해.”

“사명과 정의를 쫓나? 내가 하는 일이 그에 반한다고 생각하고?”

영원이 잔잔하게 웃었다.

“사명, 정의.”

사명과 정의라는 말은 아름답기는 했다.

그러나, 심영원은 절대로 사명과 정의를 추구해오진 않았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는 생각해.”

사명과 정의는 대단한 사람들이 찾게 두고, 영원은 그냥 방구석에 있고 싶었다.

남들이 해주면 그냥 감사, 땡큐,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었다.

밖으로 나오기로 결심한 건, 절대로 그런 거창한 대의 때문이 아니었다.

‘안 구하면 더 피곤해질 것 같아서.’

‘그리고 신경 쓰이게 되어서.’

여현, 요련 연니, 윤희유 교수님, 이창결, 백율 부장님, 박의총 가이드 등등…….

“나는 정의의 편이 아니야.”

“…….”

“내가 그냥 끌려서 하고 싶어진 일의 편이지.”

“심영원. 먼지보다 못한 무능한 것들이 인간의 평등 운운하는 말에 넘어가지 마.”

쿵.

그레이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나는 신이 아니야.”

영원은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

“너도 아니고.”

“…….”

“알지도 못하는 무엇을 평가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지 마.”

“…….”

“그건 네가 쓰레기라는 걸 증명할 뿐이니까.”

심영원은 인간으로 태어났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인간보다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면 삶이 참 고단해지리라는 걸 열 살쯤 깨달았다.

“K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러하듯 진정한 네 연인이 될 수는 없지.”

그레이는 갑자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의 진정한 내면을 모르고, 영원히 아무것도 아닌 사이로 남을 거야.”

“…….”

“그는 연금술을 위해 감정을 포기한 너를 이해할 수 없어. 너도, 나도, 진짜 사랑 같은 건 모르잖아.”

“…….”

“K의 집착과 구속이 너를 질리게만 할걸. K는 그저 잠시 후에 사라질 약점일 뿐이야.”

영원은 특별히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그래도 너한테는 안 가.”

그레이 딘하우스에게 이해받을 필요는 없었다.

절대로 외로움을 느껴본 적 없다고 단언할 순 없을지도 모르지만, 영원은 외로움에 젖어 타인의 이해를 갈구해 오지 않았다.

‘인생은 솔플.’

‘다시 그렇게 되면, 그냥 그렇게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겠지.’

‘요련 언니랑 놀러 다니는 거나, 여현이가 해준 밥 먹는 거야 좋았지만.’

‘원래 즐거운 이벤트는 유한하니까.’

그렇게 생각해서 이제껏 끊임없이 강해지기만 해온 것이기도 했다.

괴로운 기억이 소환될 때마다 힘들기는 해도, 영원히 그에 사로잡혀있지 않으니까.

심영원은 고통을 뒤에 두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해 왔다.

“아무튼, 김여현이 내 약점이라니. 황송하네.”

김여현이 약점이라, 그는 누군가의 약점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강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강한 약점이 어딨어?”

“…….”

“김여현은 스스로를 지킬 줄 알아.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한테 목매지도 않을 거고.”

그래서 모든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심영원을 경계하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감. 그런 걸 두려는 거지.’

영원은 힘을 숨겨온, 앞으로도 숨길 것만 같은 여현에게 조금도 서운해하지 않았다.

영원의 말을 들은 그레이는 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녀석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까?”

그레이는 영원의 생각을 부정했다.

“나는 이쪽 세계의 에스퍼들을 알아.”

“…….”

“지금 K가 너의 곁에 병풍처럼 서 있다고만 생각하겠지.”

그레이는 심영원이 생각하는 김여현의 마음의 무게는, 실제 김여현이 심영원을 받아들이는 마음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심영원은 모른다.

그야, 당연히 모르겠지.

이쪽 세계에서 가이드로 지낸 세월이 아직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게다가 대부분의 시간 동안 온실 속에서, 그저 김여현의 보호 속에서 있기만 했다.

김여현의 보호를 아늑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하지만, 실상은 심영원의 인식과 동떨어져 있지.’

‘K는 그런 녀석이 아니란 말이다.’

K는 잔혹했다. 세간에 알려진 것보다 더.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 앞에선 누구보다 무자비해.’

그리고 그가 갈망하는 것 앞에서는 똑같은 태도를 보이리라는 걸, 그레이는 확신했다.

“K에게는 누구보다 강한 의지와 힘이 있어. 그런 녀석이, 그냥 너를 가만히 지켜보며 네게 완전히 휘둘리는 역할을 수긍하고 받아들일까?”

둘의 관계는 반드시 지금처럼 평화롭게 유지되지 않을 것이다.

김여현은 결국 알게 될 것이다.

심영원에게서, 진정한 ‘애정’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는 걸.

오래전에 그녀 스스로 그런 감정을 포기했으니까.

영원히 충족되지 못할 갈증이 김여현을 미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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