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련과의 통화가 끝나자, 윤 교수와 의총뿐인 당직실이 고요해졌다.
“그레이의 최측근들이 지금 다 중국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죠?”
의총이 정적을 깨고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조지나 스피넬, 이반 하이제렌 둘 다 중국에 있다면…….”
“확실히, 뭔가 심상치 않네요.”
윤 교수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의 펜심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며 생각에 잠겼다.
의총 역시 고민에 빠진 듯한 표정이었다.
“교수님. 저쪽이 중국 정부랑 손을 잡았을 것 같지는 않은데, 거기서 뭘 하려는 걸까요.”
“글쎄요. 가설이야 많이 세울 수 있는데, 평화로운 건 안 떠오르네요.”
의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숨을 한 번 쉬었다가 화제를 약간 틀었다.
“김여현 에스퍼님, 심영원 가이드님이 S급 던전석을 가득 구해 나올 수 있을까요?”
“일단, 기다려보기로 해요.”
윤 교수는, 생사를 알 수 없는 싸움터로 가버린 센터의 각성자들을 기다리는 일이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참 편하지가 않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깊이 기댔다.
‘이번만은 목숨이 걸려 있지는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레이가 엄청난 양의 던전석을 획득하기라도 한다면?’
‘…….’
윤 교수는 부정적인 생각을 거두며 영원과 여현이 함께 있던 모습을 생각했다.
절망을 걷어낼 희망에 대해서도.
“교수님.”
“네.”
“그레이가 던전석을 많이 얻게 되면 말이죠.”
“…….”
“그가 호화로운 장비를 갖추는 것도 문제지만, 더한 문제는 따로 있어요.”
참혹한 시나리오에 관한 상상을 한 것이 윤 교수 하나만은 아니었다.
던전석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른 차원 사이의 벽을 더욱 공고하게 만들거나, 그 벽을 허물 수 있도록 돕는 특수물질이었다.
동시에, 각성자들의 능력 자체에 개입할 수 있는 물질이기도 했다.
그래서 던전석을 사용해 게이트와 던전 외부로 소통하는 가이딩 밴드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각성자들의 능력을 측정하는 기계를 만들기도 하고, 센터 지하 대강당과 같이 던전을 영구히 청소하여 차원과 연결해두기도 했다.
에스퍼와 가이드 정복에도 환상계 방어력 강화 및 에너지 밀도 저항을 위해 던전석을 미량 첨가했다.
“그레이가 호화로운 장비로 무장하는 데에만 던전석을 사용하고 말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귀엽죠.”
의총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론상으로는, 던전석 수억 개가 있다고 해도 게이트의 발생을 막지는 못해요.”
“그렇겠죠.”
“하지만, 게이트를 소환하는 건 가능할지도 몰라요. 아직은 이론뿐이지만.”
무언가의 경계를 허무는 것.
던전석의 기본적인 성질이었다.
그러니, 그 양이 충분하다면 차원의 균열을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던전석이 수억 개 주어진다면, SS급, SSS급 게이트를 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의총은 굳은 표정으로 그레이의 생각을 짐작해 봤다. 그러면서 말했다.
“특정 지역에 게이트가 열리도록 유도하는 것도요.”
“…….”
“그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군림’과 ‘분리’라고 하죠.”
절대자로 ‘군림’하는 것.
선택받지 못한 이들을 ‘분리’해내어 그들은 지옥 속에서 노예처럼 살아가게 하는 것.
“지구 어딘가에, 마치 다른 차원인 것처럼 분리되는 세이프 존을 만들고, 그 밖에서만 게이트가 난리를 치게 할 수 있을 거예요.”
과거에, 의총은 그러한 아이디어를 기초로 ‘게이트로부터 안전하지만, 그 바깥을 지옥으로 만들 도시’의 설계도를 직접 그려보기도 했었다.
취미로 시작한 일인데, 완성까지 반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말도 안 되는 설계도였다. 그러나 완벽하게 허무맹랑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레이 역시도 같은 상상을 해볼 것만 같았다.
“대체 뭐가 꼬여서 그딴 걸 꿈꾸는지 모르겠지만, 그레이가 정확히 바라는 그림이겠죠.”
“…….”
정말로 말이 씨가 되면 곤란해질 시나리오였다.
“교수님. 그레이는 분명…….”
정상적인 뇌를 가졌다면 누구도 꿈꾸지 않을 미래겠지만, 그레이 딘하우스는 여러모로 정상이 아니었다.
“오랜 시간 인내하며 기다렸어요.”
“…….”
“기회가 주어지기만 하면 시도할 겁니다.”
그리고 윤 교수가 입을 열었다.
“박의총 가이드님.”
“네.”
“그렇게까지 사서 걱정하지는 말기로 해요.”
윤 교수 자신도 사서 걱정을 하는 편이기는 해서 의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어쩐지, 그렇게 참혹한 진행이 이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영원 가이드님이 막을 거예요.”
심영원과 김여현이 그레이 딘하우스를 막아낼 테니까.
“…….”
“…….”
“그럴까요?”
“네.”
윤 교수가 의심은 조금도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가 던전석을 쓸어가지 못하게 막겠다고.”
“…….”
“영원 가이드님이 의총 가이드님한테 약속했다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던가요.”
“……네.”
의총은 영원이 던전에 들어가기 전에 영원과 통화를 했다.
―제가 10억 개를 못 가져오는 일은 있어도, 그레이가 그걸 먹는 일은 없을 겁니다.
―내가 못 가지면 남도 못 가지게 한다.
―그 못된 심보를 한껏 실현할게요.
영원은 통화를 마치며 그레이 손에 던전석이 뭉텅이로 들어가는 일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걱정과 근심이 섞이지 않은 어조였다.
“하겠다고 다짐한 건, 확실히 해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김여현이 그래왔고, 심영원 역시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S급 던전석 수백만 개로 우리가 할 수 있을 일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으면 돼요.”
그들이 막을 것이다.
윤희유는 확신했다.
***
요련이 전한 바와 같이, 조지나 스피넬과 이반 하이제렌은 현재 중국의 땅 위에 있었다.
그것도 베이징, 5성급 특급호텔의 회의실에서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서.
중국 당국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S급 랭커들이 줄줄이 밀항해 들어와 한자리에 모였다.
영원의 등장 당시에, 검은 화면 너머에서 음성으로만 그레이와 논의를 주고받던 자들이었다.
그레이가 기회를 얻었던 그때 K를 바로 죽였어야 한다고.
지금도 최대한 빨리 K를 죽여야 한다고.
이들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우리 여기서 이래도 되는 거야?”
“그레이의 뜻이기는 한가?”
“맞아. 당에 통보 없이 들어오면, 국제분쟁으로 치달음은 물론 세계대전까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라고.”
“백악관보다 이쪽 분들은 더 자비가 없잖아.”
이제는 얼굴을 가리지 않은 랭커들은 그들의 회동이 드러나는 걸 말로는 걱정하면서도, 사실은 전혀 걱정하지 않는 투로 물었다.
아삭. 아삭.
그들은 테이블 위에 세팅된 다과와 과일, 음료를 마시며 한껏 풀어진 분위기였다.
이반이 곁에 앉은 조지나를 보았고, 조지나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끝까지 비운 뒤 답했다.
“그레이의 뜻이야.”
그녀는 홀로 S급 던전으로 떠나버린 그레이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세계대전? 환영이야.’
그레이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바라고 있다는 듯이 즐거워하며, 계획을 계속 추진할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럼, 그 10억 개의 던전석을 얻는 일은 잘 되어가고 있나?”
“500명 제한이라니. 전략을 짜려다가 문이 닫혀 버려서 얼마나 열이 받았던지.”
“그러니까. 인원 제한이 있을 줄이야.”
“그 치밀하다는 당링링도 금방 잘린 걸 보면 난도가 상당하기는 한 모양인데.”
“그래도 K랑 우리 보스는 남아 있잖아.”
7명이 모인 회의실 안은 계속 왁자지껄했다.
이반 하이제렌이 엄청난 크기의 설계도를 테이블 위에 띄울 때까지는.
촤락.
사르륵.
음식으로 가득 차 있던 테이블 위가 깨끗하게 비워지고, 얇고 흰 종이가 그 위를 덮었다.
“…….”
“뭐지?”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이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야, 이거?”
조지나 스피넬과 이반 하이제렌도 일어났다. 거대한 설계도를 한눈에 담을 수 있도록.
“박의총의 설계도야. 5년 전에 그려진. 어쩌다 입수하게 됐지.”
이반은 짧게 설명했다.
“알겠지만, 박의총은 K의 측근이자, 던전석 공예의 대가인 가이드고.”
“그래서?”
사라락.
이반이 능력을 쓰자 설계도의 특정 부분이 차례로 밝게 빛났다.
“여기서 작게 깜빡이는 부분들은 또 뭐고?”
“3,423,242개.”
이반은 알 수 없는 숫자를 말했다.
“3백만 개? 그게 뭔데.”
“그레이는 이 설계도를 보고 말했지. 박의총이라는, 유명하지도 않은 가이드의 상상력에 감탄한다고.”
“…….”
“설계도로 그려놓은 건, 끔찍하게 안전한 국가야.”
“……안전해?”
“게이트로부터, 안전해. 이 밖에서만 게이트가 열리게 되지.”
누군가의 작은 탄성이 들렸다.
“방금 말한 숫자는, 던전석 개수야.”
“…….”
“이 봉인된 소국가를 만드는 데 3백만 개가 넘는 수의 S급 던전석이 필요하지.”
그레이는 의총이 설계한 돔을 지구에 만들고자 마음먹었다.
의총과는 전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이 안에서는 게이트가 열리지 않아. 그럴 수 없어.”
“…….”
“하지만 이 설계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
“무슨……?”
“수십 개의 던전석을 특정 위치에 놓으면 내부와 외부의 구조가 반전돼.”
“…….”
“하지만 그 수십 개의 위치를 역으로 계산해낼 방법은 없어. 누군가가 그 위치를 하나하나 ‘기억’해내지 않는 이상.”
“박의총, 그 설계자를 죽여야겠네.”
“그래, 바로 그거지.”
그가 살아있다는 것이 이 도시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그렇다면, 그를 죽여서 약점을 없애면 된다.
“그러니까 던전석을 얻은 다음에는, 박의총을 죽여야 해.”
“…….”
“박의총이 수년 전에 흥미 때문에 제작했다가 처박아둔, 이 설계도가 사라졌다는 걸 알고서…….”
스륵.
이반의 손톱 끝이 설계도를 훑었다.
“기억 속에서 다시 그 수십 개의 위치를 하나하나 끄집어내기 전에.”
이반의 설명이 끝나고, 조지나가 한 마디를 더 얹었다.
“그리고 우리의 이 땅에서 이룰 계획도 차질 없이 완성해야 하고.”
테이블 주변에 웃음꽃이 피었다.
“맞아.”
“공포는 늘 도움이 될 거야.”
“계획보다 더 큰 규모로 비선별들을 불러들이자.”
“선별들도 같이.”
“그래.”
“일단 공포에 절여 버려야지. 푹푹푹.”
그들은 공포에 빠진 대중을 상상하며 즐거워했다.
“그레이가 돌아오면 바로 시작이야.”
완벽한 패닉에 절여진 무능력자들을 지구 위에서 지워낼 시간이었다.
드디어.
톡톡.
그리고 그 순간, 테이블 곁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미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 친구의 천재성에, 새삼스럽게 감탄하면서.
***
다시 던전 내부, 지하.
보스인 룰렛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영원과 그레이가 서 있었다.
도로로롱.
[관리자, □□□□가 말합니다]
[여기도 힘을 쓸 수 없는 곳입니다]
[쓰면 바로 탈락!]
[주의, 주의!]
영원과 그레이가 끌려온 곳은 그레이가 지하 2층을 통해 진입하고자 했던 지하 3층이었다.
영원은 그레이를 슥 보고는 무표정을 유지했고, 그레이는 또 웃었다. 약간 허탈하다는 표정으로.
“하…….”
인형들이 득실거리는 지하 2층을, 바로 이렇게 통과해오다니.
여기에 도달하는 수단은 확실히 지하 벽을 뚫는 게 아니었다.
“정말 재밌네.”
그레이는 계속 웃었다.
화가 나도 웃고, 어이없어도 웃고, 짜증 나도 웃고, 진짜 재밌어서도 웃고.
엄청난 미남의 웃는 표정을 마주한 영원은 그의 진심이 무엇인지 생각지 않고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레이에게는 관심이 없으니까.
영원의 관심사는 중앙의 룰렛 테이블이었다.
당연히 저것이 ‘보스’일 터였다.
‘S급 보스는 의외로 다 무생물인 모양?’
얼마 전 화산 앞에서의 대전투가 떠올랐다.
‘이번만은 그런 개고생은 아니어라.’
‘그냥 테이블 앞에 앉아서 게임만 하고 싶다고요.’
‘부디, 부디.’
영원은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아무래도 손으로 잡고 돌려야 될 것같이 생겼는데.’
영원은 그레이 쪽을 한 번 보고는 원형판 곳곳에 적힌 내용을 살폈다.
각 칸에 쓰인 것은 숫자들이었다. 1에서부터 100까지, 순서 없이 숫자들이 적혀 있었다.
도롱.
도로롱.
[관리자, □□□□가 말합니다]
[올인 베팅을 하는 마지막 게임입니다]
[총합 10억 골드를 한도로, 각 플레이어가 딴 골드의 1에서 100배까지를 지급합니다!]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탈락합니다]
어째서 골드가 많은 쪽이 최종적으로 ‘유리한’지 알 것 같았다.
최종적으로 따갈 수 있는 골드의 양이 더욱 어마어마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