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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55화 (55/142)

그레이는 효율적으로 팀원들을 한 명 한 명 돌려보내며 지하 2층에 도달했다.

스페이드 팀 최초인원 127명.

바다에서 밀려오는 인형들을 막기 위해 크루즈 외곽에 배치한 인원 27명.

지하 1층에서 탈락한 인원 40명.

그리하여, 127명 중 최종적으로 지하 2층에 도달한 인원은 60명이었다.

“하아, 하아.”

“으. 하아.”

미친 듯이 지하 1층의 마지막 구간을 달려온 스페이드 팀 팀원들이 벽이나 무릎을 짚고 숨을 골랐다.

그레이는 그들을 무표정한 얼굴로 봤다.

“딘하우스 님.”

가이드 한 명이 그레이에게 다가왔다.

“이 지점을 넘어서면, 호두까기 인형이 저희의 존재를 인식할 겁니다.”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장난감들이 그를 인지하지 못하는 지점의 끝에 섰다.

파박.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다.

장난감들과 스페이드 팀 사이가 단절되었다.

“저 벽에 부딪히지 마.”

팀원들에게 지시를 남긴 그레이는 눈을 감고, 미미한 균열을 찾아내기 위해 온 힘을 집중했다.

먼 바닥의 밑은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지하를 둘러싼 벽면의 미미한 파동은 인식할 수 있었다.

균열과 부조화를 찾아내는 관찰력이 그레이의 인식을 지하 벽면의 한 지점으로 이끌었다.

“저쪽 벽으로.”

눈을 뜬 그레이는 손가락으로 서측 면을 가리켰다.

“벽돌로 지어져 있으니까, 벽에 붙어서 이동한 다음 벽돌을 하나씩 빼도록 해.”

그레이는 인형과 싸우지 않는 대신 팀원들에게 반복 노동을 시키기로 했다. 힘으로 부술 수는 없지만, 벽돌 하나하나를 ‘빼낼’ 수는 있으니까.

시간은 오래 걸리겠지만, 장난감들과 전면전을 벌이는 것보다야 승산이 있었다.

‘인형과 싸워 힘을 증명하라’는 영원의 도발에 그대로 걸려 줄 생각은 없었다.

‘인형을 처리하는 방법이 꼭 전면전은 아니지.’

인형을 처리하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레이는 손실을 최소화하여 최상의 결과를 얻는 것이 진정한 힘의 증명이라 생각했다.

툭.

그레이는 구체적인 지시를 마친 뒤 지하 1층과 2층 연결부 구석의 단에 앉았다.

꿀꺽.

품에서 꺼낸 음료를 몇 모금 마신 뒤, 그레이는 저 위의 하트 팀에 대한 생각에 잠겼다.

특히 한 사람.

심영원.

톡.

그레이는 뒤통수를 벽에 기대고 그녀의 앞에서 느꼈던 미미한 공기의 변화를 기억해냈다.

‘무엇을 한 거지.’

테라스에서 그녀를 보고 있던 어떤 순간, 그녀를 둘러싼 공기가 변한 것 같았다. 그래서 확신이 더 짙어졌다.

심영원은 반드시 예측을 벗어날 거라는 확신.

‘매칭률 때문인가.’

그는 일단 어떤 방식으로든 그녀와의 매칭률을 파악해 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아니면, 지난 세계에 대한 향수가 내게 남아 있었던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게 우스웠다.

덜컥.

덜컥.

그레이가 생각에 잠겨있는 동안 스페이드 팀의 팀원들은 열심히 지하 2층의 벽을 분해했다.

벽돌 10개.

벽돌 50개.

벽돌 100개.

그레이는 설명할 수 없는 직감으로 금이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꼈다.

‘연금술이 내게 남긴 감각.’

‘포에버 역시도, 금이 이 아래에 있다는 걸 느꼈겠지. 이유는 설명할 수 없겠지만.’

그레이는 차가운 눈으로 지상 방향을 보았다.

심영원을 경계해야 했다.

그리고 경계해야만 하는 또 한 사람.

K.

‘이미 한참 전에 더는 강해질 수 없을 만큼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번 벽을 뛰어넘었나.’

그런데 랭킹이 상승하지도 않고 있었다.

‘…….’

인정할 수 없는 가능성이 그레이의 뇌에 똬리를 틀었다.

***

지상 3층의 VIP룸.

슬롯머신이 돌아가는 경쾌한 효과음이 들렸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테이블의 끝, 골드의 산 위에 살포시 얹어둔 영원의 문어가 또 한 번 입에서 골드를 쏟아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퐁퐁 튀어나온 골드는 아래로 떨어져 골드의 산의 영역을 넓혔다.

“보통 아무리 재밌는 일도 업으로 주면 싫지 않나?”

영원은 즐거운 표정으로 골드의 산을 예쁘게 정리했다.

“근데 이렇게 재밌을 수가.”

그 말을 듣고 영원을 한번 본 뒤 다시 카드로 시선을 옮긴 여현 역시 조금은 즐거워 보였다.

결국엔 내가 이길 거지만, 게임은 역시 약간은 운에 맡기는 기분이 들어야 재미있다.

‘몸도 안 쓰고 그냥 앉아 있기만 하면 되고, 옆에서는 최애가 열심히 백업을 해주고 있고…….’

‘평화로워.’

‘내가 잉여같이 느껴지는 이 던전, 꽤 취향이야.’

영원은 여러모로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골드가 쌓이는 비주얼도 꽤 마음에 들었고, 주변 풍경도 꽤 흡족했다.

힘을 안 써도 되는 것도, 복잡한 고민을 잠시 미뤄두는 것도 좋았다.

‘카드게임이 오래 살아남은 고전인 데에는 이유가 있어.’

‘재밌기 때문이야.’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전의 맛!’

생각해보면, 당직 서며 야근하다가 난데없이 던전에 끌려오지 않았던가.

야근은 아홉 시 뉴스도 개그 프로그램급으로 재미있게 만든다고, 이게 아니면 당직이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게임이 즐거워지는 기분이었다.

“여현아.”

“네.”

“사람은 역시 머리를 써야겠지?”

영원은 그레이가 있을 바닥 아래를 보았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잖아.”

“그렇죠.”

게다가, 저 아래서 생고생을 하고 있을 그레이를 생각하면 더 기뻐졌다.

‘나는 역시 인성이 덜 됐어.’

‘왜 이렇게 남 고생하고 나는 노는 게 좋지?’

다시 게임이 재개됐고, 영원은 다시 승리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영원의 작은 문어가 다시 삐죽 튀어나온 입으로 1천 골드를 뱉어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

1천만 골드는 아직 멀었지만, 목표에 닿을 때까지 그들을 방해할 장애물은 없었다.

***

VIP룸 외부, 게임장 1층.

화연은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슬롯머신 앞에 섰다.

‘슬롯머신 한 번만 돌려보고 올게요.’

‘하고 싶어?’

‘……네. 살면서 한 번도 안 해봤어요.’

여러 번 고민하다가 백율에게 속마음을 말하고 결심을 마친 참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일탈 비슷한 것도 한 적 없던 화연은 어쩐지 엄청나게 달콤한 비행을 저지르는 기분을 느꼈다.

찰랑.

화연이 입구에 넣은 골드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머신 안으로 들어갔다.

도로로로로롱.

―100골드 당첨!

화연은 환한 얼굴로 즐거워하다가 금방 90골드를 다시 날리고는 시무룩한 표정이 됐다.

“…….”

결국, 9골드라도 벌어 가자는 합리적인 판단하에 화연은 10골드를 들고 부장들에게로 돌아갔다.

2층 내부 카페에서 부장들은 차와 다과를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약간은 희망찬 내용이 주제였다.

10억 개의 던전석을 얻으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망상.

“이렇게 에너지 밀도 높은 곳에 온다고 가이딩 밴드가 먹통이 되는 일도 없지 않을까. 던전석 미친 듯이 넣으면 에너지 밀도 따위야, 뭐.”

“각성자 판별 및 감시 시스템에도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 같고.”

화연은 백율과 장제권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화연이 10골드를 내려놓자 9골드나 땄냐며 이창결과 백율이 축하의 말을 전했다.

화연은 잠시 그들의 수다에 참여했다. 그러다 입을 닫고 편안한 소파에 기댔다.

이상하게, 다시 오지 않을 휴식시간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누구도 타인을 상처 입힐 수 없는 곳.

이곳을 나가면, 이렇게 평화로운 일은 한동안 없을 것만 같았다.

“마지막 휴일이네요.”

옆자리에서 담요를 덮고 눈을 감고 있던 장제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

몇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지하 2층.

벽면 분해 시작 시점으로부터 7시간 경과.

“헉, 헉.”

잔여 스페이드 팀 절반쯤이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안 그래도 에너지의 밀도가 높은 던전인데, 벽돌을 빼내면 빼낼수록 지하의 에너지 밀도가 더 차올랐다.

그레이 역시도 에너지의 밀도가 거슬린다고 생각하게 될 만큼.

“흐아.”

“더는, 더는…….”

“잠시만 쉬어가겠습니다!”

그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가 넓은 아량으로 팀원들의 무능력을 이해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고난을 겪어온 노련한 그레이의 측근들은 피로함을 조금도 티 내지 않으며 서 있기만 했다.

그들은 에너지의 밀도보다 그레이 딘하우스의 시선이 더 끔찍하다는 걸 아는 이들이었다.

그레이는 속을 드러내지 않는 눈길로 바닥에 드러누운 비선별들을 보며, 그들에 대한 평가를 수정했다.

‘전통적으로 비선별들에게는 문제가 많은 편이지.’

‘기본도 안 된 놈들이 꽤 섞일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세계수는 적어도 어딜 보나 패배자인 저능아들을 선별하진 않아.’

‘하지만 무작위 각성은, 쓰레기들까지 주워버리게 하지.’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그레이는 주저앉은 이들의 이름 위에 머릿속으로 삭제선을 그었다.

그리고 또 1시간.

“그레이…… 뭔가 다른 벽이…….”

그를 찾는 목소리에 그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8시간이 경과한 끝에 균열면이 검은 지점을 드러냈다.

알고 있었다.

금이 가까이에 온다는 건, 그냥 알 수 있는 거니까.

타박. 타박.

철컥.

그레이는 느린 속도로 균열 위에 손을 얹었다.

그다음에 힘을 실어 해당 부분을 밀었다.

캉.

힘이 튕겨 나왔다.

“…….”

그의 표정이 굳었다.

“…….”

드륵.

캉!

같은 반응이 돌아왔다.

힘을 튕겨내는 건 ‘권능’이었다.

관리자가, 이 방법은 아니라는 걸 알리고 있었다.

그레이는 손을 거두고 위를 보았다.

3층. 투시할 수 없는 방 안에 두 사람이 있었다.

8시간, 어쩌면 9시간 가까이 계속하여.

지하로 내려와 장난감 탱크를 피하고, 벽을 분해하려 애쓰는 내내 저들은 게임을 할 수 있는 방 안에 있었다.

‘게임 테이블.’

‘안에서 할 수 있는 건, 골드를 따는 게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곱씹을수록 예감이 사실인 것 같았다.

“뚫을 수 없어.”

그레이는 균열점에 대한 진단을 입 밖으로 뱉었다.

“예?”

“‘권능’이 막고 있다.”

이 방법은 틀렸다.

“이렇게는 승산이 없어.”

그레이는 지하로 내려온 지 9시간 가까이가 되어서야 하트 팀의 전략을 파악하게 되었다.

K와 그의 힘, 그의 가이드에 대한 고요한 상념에 사로잡혀 위쪽의 동태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있던 게 패착이었다.

F로 시작되는 욕설이 한가득 차올랐다.

이 던전에서 진짜 승자가 되려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을 필요가 없었다.

깨달음이 늦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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