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54화 (54/142)

여현과 그레이의 조용한 대치가 이어졌다.

장신의 두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으나, 단지 그렇게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K.”

그레이가 다정한 어조로 여현을 불렀다. 여현은 답은 물론 미동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레이는 굴하지 않고 같은 톤으로 말을 이어갔다.

“너희 팀은, 여기 지하는 여섯이서는 뚫을 수 없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인데.”

“…….”

“너도 동의한 결론인가?”

여현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자신 없어?”

그레이가 말끝에 비웃음을 얹었다.

“…….”

“그런 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을 텐데.”

여현이 약한 모습 대신 강한 모습을 보이고 싶은 상대.

그레이는 그게 누구라고 명시하는 않았다.

그러나 영원을 염두에 둔 말이 분명했다.

여현도 그 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의 온도가 낮아졌다.

그제야 여현의 입이 열렸다.

“주제를 넘지 마.”

원래 여현은 그레이에게 존칭을 썼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도 상대를 높여서 말하지 않았다.

그레이의 얼굴에 미약한 웃음이 번졌다.

“포에버.”

그가 영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것보다는 더 강한 에스퍼를 원하지 않아? 네가 있어야 할 곳은 K의 옆이 아니지 않을까?”

쿵.

드륵.

힘의 균형이 미세하게 어긋났다가 다시 맞추어졌다.

신체가 아니라 정신과 공간을 장악하려는 S급 에스퍼 두 사람의 힘이 공간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드르륵.

끼익.

야외 테라스의 빈 테이블과 의자가 서서히 뒤로 밀렸다.

화연은 숨이 막히는지 잠시 목을 잡았다가 놓았다. 손끝이 새하얬다.

백율과 이창결, 장제권도 모두 굳은 표정으로 사지에 힘을 실었다.

그나마 가장 여유 있어 보이는 건 영원이었다.

그녀는 그레이가 아니라 여현의 뒷모습만을 보다가, 그레이의 질문에 뒤늦게 답했다.

“강한 에스퍼를 원하면, 더욱.”

영원은 둘의 싸움 속으로 들어가 여현을 돕지 않았다. 그러면 합동해서 그레이의 힘을 밀어낼 수 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영원은 다만 에스퍼 정복을 걸친 여현의 넓은 어깨와 등을 지켜볼 뿐이었다.

“계속 내 에스퍼님 옆일 것 같은데.”

그레이는 얼굴에서 웃음을 전부 지워낸 채 여현을 보았다.

“…….”

여현은 연금술을 쓸 줄 몰랐다. 그가 가진 건 오직 물리계 에스퍼의 능력뿐이었다.

그런데 연금술까지 꺼내 들어 공간을 장악하려는 그레이에게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그냥 밀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래도 이런 느낌이었던가?’

그레이뿐 아니라 영원 자신과 1:1 전투를 하더라도, 자신이 끝까지 우위를 차지할 수 있을 거란 확신도 갑자기 옅어졌다.

‘달라.’

‘확실히 뭔가, 변했어.’

여현의 한계를 자신이 파악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원래도 한계를 몰랐던가.’

‘가이딩이 필요하다는 것만이 약점인 걸까?’

갑자기, 많은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졌다.

영원은 호흡을 크게 한 번 했다. 그리고는 그레이를 보았다.

“딘하우스. 밑에 있는 인형들 말이야. 네가 처리할 수 있다는 거, 증명해 봐.”

도발이었다.

“그렇게 강한 힘을 증명하고 싶은 거면, 해봐.”

세계 랭킹 1위로 십수 년을 살아온 자의 무식함과 쓸데없는 승부욕을 자극하는 적극적인 도발.

‘여긴 관리자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리기보다는 벽부터 부수는 인간들만 모아 둔 곳이지.’

‘그러니 평화로운 게임을 하라고 판을 깔아 준 다음 힌트를 쏟아부어 줘도, 총칼로 싸워 금고를 터는 것만 생각하는 게 어찌 보면 자연스러워.’

‘그레이 딘하우스도 똑같아.’

‘사고가 유연할 리가.’

꼭 하트 팀이 대단한 계획으로 그레이 딘하우스를 따돌려야 하는 건 아니었다.

그가 계획대로 지하로 내려가 개고생을 하도록 인도하면 됐다.

그러면 뒤늦게 깨닫겠지.

‘내가 참교육을 당했구나……!’ 하고.

그레이의 행동은 영원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 포에버. 여기서 지켜보면서 심심하면 게임이나 하고 있어.”

“그럴 거야.”

고개를 끄덕인 영원이 인위적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웃음에 특별한 의미는 담기지 않았다.

그냥 생각 없이 한 작위적인 반응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영원의 웃음을 눈에 담은 그레이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는 잠시 사위가 조용해진다는 착각에 빠졌다.

“……영원.”

그레이는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며 영원의 진짜 이름을 뱉었다.

“운을 시험하는 확률 게임에 자신 있나?”

“글쎄.”

순간, 영원의 머리에 MMORPG 게임 작업장에 들이부었던 시간과 돈이 떠올랐다.

강화를 +1만 더 붙이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클릭질을 했다가 저 먼 곳으로 날려 먹은 무기들이 아른거렸다.

‘갑자기 왜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건데?’

영원은 상념을 밀어버리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운은, 다른 건 몰라도, 관리자의 관심을 유독 받아온 편이기는 하지.’

굳이 구구절절한 얘기를 친근한 척 그레이에게 늘어놓을 필요는 조금도 없었다.

영원 역시 여현처럼, 쓸데없는 질문에 답하지 않고 입을 닫고만 있었다.

대답에 써야 할 에너지가 아까웠다.

“언젠가, 내게 오고 싶어질 거야.”

그럴 일 없었다.

“나만이 너의 과거와 세계를 이해하니까.”

그리고 그레이는 사라졌다.

사락.

바람만을 남기고, 순식간에.

동시에 여현은 그레이가 있던 자리 위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

여현은 무언가를 읽는 듯했다.

“…….”

그러나 자신이 본 것에 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영원에게도, 누구에게도.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나】

【네가 옳아】

여현의 근처로만 차원 너머 존재의 음성이 잠시 다녀갔다.

***

3층. 투시가 안 되는 VIP룸.

영원과 여현은 딜러를 앞에 두고 8개 세트의 카드를 보았다.

차라락.

구체관절인형인 딜러가 핸드셔플을 화려하게 하더니 카드를 테이블 위에 깔았다.

―게임은 블랙잭입니다.

구체관절인형의 스피커에서 안내가 나왔다.

―카드를 한 장씩 받아가며 21에 가까운 합이 이기고, 21을 넘기면 지는 게임입니다. 더 상세한 설명을 원하십니까?

“아니요.”

하우스마다 다를 수 있는 몇 가지 세부 룰을 옆에 비치된 소책자로 빠르게 파악한 영원이 그를 거절했다.

―8개의 덱으로 진행합니다.

―한 번에 걸 수 있는 레이트의 상한은 1만 골드입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골드에 비해서는 상한이 높았지만, 따고자 하는 액수에 비해서는 상한이 낮았다.

영원은 목표에 이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운팅을 위한 메모는 하실 수 없습니다. 필기구 사용은 금지됩니다.

블랙잭에는 전통적으로 ‘카운팅’이라 불리는 기술이 있다.

요약하자면, 다음에 어떤 카드가 나올지 예측하여 승률을 50%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그 본질인 계산법이었다.

카지노 측에서도 플레이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단속할 수는 없으니, 엄밀하게 생각해도 규칙 위반은 아니었다.

게다가 영원은 여현과 간단한 신호를 만들어 몇 가지 상황에 놓이면 서로에게 계산의 결과를 알리기로 정하기도 했다.

‘이 게임장의 감시 시스템으로는 알아챌 수 없는 사인이지.’

‘게다가, 관리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정도의 트릭 정도는 용인해 줄 마음인 듯하고.’

보통 도박은 잃는 게임이긴 했다.

그러나 이 도박만은 잃는 게임이 아니었다.

―얼마를 배팅하시겠습니까?

툭.

영원은 테이블 위에 골드 하나를 올렸다. 여현도 마찬가지였다.

프라이빗 게임장은 특별한 카지노용 칩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촤라락.

―게임을 시작합니다.

영원은 섬세하게 움직이는 구체관절인형의 손끝을 보았다.

사람들은 심영원이 오직 귀차니즘 만렙의 멍청캐인 줄 알 수도 있겠지만…….

예상외로, 영원은 지력이 월등한 지능형 캐릭터였다.

연금술사 대제로 군림하던 시절, 그쪽 세계의 몇몇마저도 영원이 연성진을 그리지 않아도 연금술을 쓸 수 있으니 암기력이 떨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과 한참 멀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읽기보다는 쓰고 말하면서 외운다.

그런 점에서 ‘적지 않고 외워야 한다’는 건 더한 두뇌 능력을 요구했다.

그냥 쌩으로 외워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 영원은 다소 긴장하고 있었다.

스스로 자신의 긴장을 선명하게 느낄 만큼.

‘지금 나한테.’

‘미미한 불안이 있어.’

‘416장의 카드 때문일까, 아니.’

연산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 이어질 게임에 S급 던전석 수억 개가 걸려있다는 사실은 영원을 조금도 긴장시키지 않았다.

긴장은 오직 김여현 때문이었다.

‘낯설어.’

‘무언가…….’

여현과 나란히 앉아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은 당직실에서와 비슷했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졌다.

슥. 슥.

영원은 딜러가 꺼내놓는 카드에 따라 기계적으로 숫자를 더하고, 빼고, 곱했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

최근, 여현이 아주 약간이라도 어렵다고 느껴진 시간이 있었는지.

그가 순간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자신보다 강할 수 있을지.

‘나한테 모든 사실과 변화를 전부 말해야 하는 건 아냐.’

‘나도 안 그러니까.’

‘이해해. 이유야 다양하겠지.’

영원은 상대의 침묵에 필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는 편은 아니었다.

‘내 에스퍼님의 생각을 읽기 어려운 면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쯤 여현의 손이 영원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카드를 영원의 방향으로 슥 밀었다.

영원의 생각이 잠시 멈추었다.

‘…….’

영원은 눈을 깜빡였다.

‘예쁜 손은 역시…….’

‘계속 볼 수밖에 없네. 시선을 떼려야 뗄 수가 없어.’

‘불가. 불가.’

최근 덕력과 주접력이 약간은 약해진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갑자기 최애의 킬링 포인트가 훅 들어오자 숨어 있던 주접력이 미친 듯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가이드님?”

“응?”

“…….”

“어, 아무것도 아냐.”

영원은 자신을 바라보는 여현의 시선을 느끼고, 똑같이 그를 바라보았다.

여현이 지금 입은 옷은 사람을 설레게 하는 각 잡힌 제복이었다.

‘에스퍼 정복…… 심히 잘 어울려.’

그를 둘러싼, 나른해 보이면서도 역설적으로 강인한 분위기도 여전했다.

그의 자세는 언제나 그렇듯 곧았고, 모든 몸짓엔 여유가 묻어나지만, 그러면서도 각을 잃지는 않았다.

‘역시…….’

‘취향 외모는 모든 부정적인 생각을 밀어버린다는 게 학계의 정설.’

‘학계의 정설 킹정합니다.’

진지한 고민에만 몰두하기에는, 카드를 손에 든 여현의 섬섬옥수가 너무, 지나치게 예뻤다.

영원은 일단 최애와 함께 즐거이 10억부터 벌어보기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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