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47화 (47/142)

서시용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 서울을 지키고 있는 게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겠죠. 하지만 누군가는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거고.”

“네.”

윤 교수를 비롯한 많은 전문가는 게이트 웨이브가 각 필드의 최대 도시를 중심으로 번질 거라 예상했다. 이날 밤의 사건은 그 추측에 힘을 실었다.

또한, 그레이 딘하우스는 서울부터 쓸어버리고 한반도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고 있을 터였다.

그래야 ‘청소’가 쉬울 테니까.

그러니 누군가는 서울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어야 했다. 그건 한반도 전체와 그 땅 위의 사람 모두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나는 여기서 꽤 잔혹해질 텐데. 센터에서 용인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괜찮나요?”

“마음대로 하세요.”

서시용이 바라는 것과 여현이 바라는 건 일치했다.

“잔혹성이라면, 저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서시용은 다시 크게 웃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얼굴에서 웃음기가 지워지지도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세계수가 나도 참 잘 선별해냈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미형인 자’로 선별된 각성자답게, 서시용은 잘난 이마를 드러내며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가만 보면, 김여현은 따라갈 수가 없어. 전 세계 선별 각성자들을 다 털어 전수조사를 해도, 세계수가 가장 잘 선별해 낸 각성자는 김여현일 거란 주장엔 반론의 여지가 없죠.”

“…….”

“세계수는, 인간을 보는 통찰력이 없지 않나 생각이 들 때가 많은데, 김여현 하나로 모든 잘못된 선택이 상쇄된다는 생각도 들고.”

“그런 얘기를 듣자고 모신 건 아닙니다.”

여현은 아부나 잡소리엔 관심 없다는 뜻을 표현했다.

“알지, 알지. 이런 소리 싫어할 것도. 그런데 궁금한 게.”

“…….”

“심영원 가이드는 세계수가 다른 곳에서 데려온 건가?”

“…….”

여현은 또 답하지 않았다. 서시용은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깔고 덧붙였다.

“이명을 실현해요.”

“…….”

“단언할 순 없지만, 세계수가 그런 운명을 부여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면, 끔찍하게 강해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

“나중엔 정말 끔찍하게……. 아니, 이미 더럽게 심히 강해지고 있나?”

“…….”

“나보다 더 강해졌나? SS급 퀘스트 받아서 랭킹이 더 상승하지 못하게 된 건가요? 사실 S급인 이창결 에스퍼처럼?”

여현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입을 닫고만 있었다.

서시용은 또 웃었다. 원래 웃음이 많은 편이었지만, 오늘처럼 진심으로 웃고 싶어서 웃을 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많은 게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지금 그의 눈에 들어와 있는 김여현, ‘영원의 헌신자’는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세계수의 막연한 짐작을 넘어서는 짓거리를 할 수도 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게 가장 즐거웠다.

“그만 돌아가시죠.”

“매정하네. 원하는 거 얻었다고 바로 쫓아내고.”

“시장님께서는 내일 출근 안 하십니까.”

“하지, 하지. 나도 나름 공무원인데.”

“해가 뜹니다.”

이른 새벽.

여현의 말처럼 정말로 하늘의 한구석이 이미 밝아지고 있었다.

서시용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드래곤을 곁으로 불러들였다.

펜트하우스 옥상에서 김여현과 서시용이 한 번 더 악수했다.

그다지 가깝지는 않은 사이였다.

앞으로 100년쯤을 더한다고 해도, 딱히 여기서 더 가까워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성향이 다르고, 취향이 다르고, 여러 가지로 맞는 게 없었다.

“내가 오늘따라 말이 많은데. 염려 차원에서 조금만 더 하자면.”

여현은 어쨌든 서시용이 자기객관화가 잘 되는 인물이라 판단했다. 상대는 확실히 오늘 너무 많은 말을 했다.

“그레이가 직접 뒤집어엎으러 오는 것만 김여현 에스퍼님이 막아줘요.”

“네.”

“다른 인간들은, 누가 한반도에 오든 내가 작살 내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어요.”

“네.”

“방법이 그리 예쁘진 않겠지만.”

“상관없어요.”

서시용은 김여현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뱉는 김여현의 한쪽 눈 깊은 곳에 잠재워진 감정을 들여다보려 했다.

그는 파악하기 어려운 상대이기는 하나, 지금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변화의 원인 역시도 짐작 가능했다.

가까운 곳에 잠들어 있는 가이드겠지.

서시용은 그녀가 바꾸어낸 것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앞으로 바꿀 것은 무엇인지도.

“내가, 어떻게 죽였는지 들었나요.”

그 대상이 삭제된 문장이었다.

서시용의 시선이 영원이 잠들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가 돌아왔다.

여현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영원이 이곳에 떨어져 최초로 당했던 납치를 떠올렸다.

서시용이 중간에 데려간 실장에 대한 보고서를 여러 번 읽었다.

벌을 받아야 할 자는 서시용의 손에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잔혹했다는 표현을 읽었습니다.”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여현은 그 평가를 덧붙이진 않았다.

서시용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화 주제를 다시 틀었다.

“대가로 주기로 한 건 받아갈 겁니다.”

“그러시죠.”

“그레이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가세요.”

서시용은 입을 완전히 다물었다.

그리고는 드래곤을 타고 새벽하늘 높이 날아갔다.

이렇게 서울을 지키는 동맹이 청사진대로 결성되었다.

영원이 SSS급 가이드의 이름에 걸맞은 경험치를 쌓는 동안, 인적 물적 네트워크가 깔리고, 피난처가 조성되고, 연합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그레이 딘하우스의 조직에도 센터 쪽의 스파이가 잠입했다.

금방, 예고된 거대 사건들의 본편이 제대로 시작되리란 건 이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비선별 러쉬와 게이트 웨이브.

비선별들이 대거 각성할 것이고, 게이트 역시 사방팔방에서 돋아날 터였다.

아직 그보다 덜 알려진 건 이제 금방 그레이 대 역삼 본부 멤버들의 전쟁이 시작되리라는 것이었다.

그레이 딘하우스에게 정신 교육을 제대로 시켜줄, 참교육 전쟁.

***

서시용은 드래곤의 등에 올라 상공을 날아가며 웃었다.

그는 명동 게이트 당시 보았던 장면을 떠올려봤다.

당시, 명동의 아득한 상공에 떠서 S급 게이트 입구의 상승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영원과 여현만이 아니었다.

세 드래곤 딸의 아빠, 서시용의 분신 역시 그곳에 있었다.

영원과 여현보다도 한참 높이, 지표면보다 인공위성 궤도에 더 가까운 곳에.

“다브란.”

그때 서시용은 기척 없이 공기조차 거의 없는 허공을 떠돌다, 함께 허공을 부유하던 첫째 딸을 다정히 불렀다.

“너도 봤지?”

그는 파들파들 떠는 겁 많은 딸을 도닥였다. 그리고는 깊은 잠에 빠진 셋째 딸, 카다흐를 조심스레 품에 고쳐 안았다.

그 뒤에는 희열인지 무엇인지 모를 열감을 담은 눈으로 S급 게이트의 소멸을 숨죽여 지켜보았다.

사실상의 진공 속에서 혹시라도 추위에 떨까, 카다흐를 감싼 담요를 꼼꼼히 여며주면서도, 그는 단 한 순간도 저물어가는 게이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영상분석을 통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을 맨눈으로 보았다.

새어 나오는 힘.

아주 옅게 섞여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흔적도 찾을 수 없겠지만, 분명히, 믿을 수 없이 강력한 존재의 흔적.

“완전히 모르겠는 힘이야.”

여태껏 측정된 것의 한계를 넘는 스펙트럼.

이제, 다른 건 몰라도 김여현의 갈망만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영원’이라.”

정말로 그녀는 김여현의 ‘영원’일 것이다.

그녀는 김여현뿐 아니라, 자신의 간절한 바람에 대한 응답이기도 할까.

내 것에 ‘감히’ 해를 가하려 했던 자의 최후를 떠올리는 김여현의 눈빛은, 그가 이미 조금씩 돌아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렸다.

서시용은 웃었다.

어쩌면.

드디어 온 건가.

“우리 김여현 에스퍼님께서 아직 덜 미친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니.”

서시용은 드래곤의 비늘을 쓸었다.

“가이드한테 덜 미쳐있는 것 같아.”

끼륵.

드래곤이 울었다.

“많은 일이 더 닥치겠지.”

온 게 맞다. 확신한다.

“동생들을, 그 ‘영원’이 깨어나게 도와줄 거야.”

왔어야 한다.

“우리는 약속한 대로, 서울이 망가지게 두지만 말자.”

끼익.

드디어 왔다.

김여현에게,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긴 세월을 거쳐, 이제야.

***

모처럼, 영원에게 일정이 없는 오후가 왔다.

정확하게는, 오후까지도 일정이 있었는데 오전에 싹 몰아 끝내버렸다.

‘아, 이 센터님들, 나의 능력을 넘나 과소평가하네.’

쉬엄쉬엄 느리게 끝내는 방법도 있었지만, 빨리 끝내면 오후 내내 쉬어도 된다는 윤 교수의 말에 엄청 달렸다.

그다음에 영원은 우연하게도 역시 오후 작업을 오전에 몰아서 처리했다는 요련을 만나, 별관 외부로 나와 널찍한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았다.

“영원아, 하늘 봐.”

“오. 그래픽 같다.”

특별한 이유는 없이, 날씨가 좋고 시간이 나서 그랬다.

돗자리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장제권 가이드의 사무실에 있다고 해서 거기서 빌렸다.

“로제 떡볶이?”

“그래.”

다소 유행에 뒤떨어지는 느낌은 있지만, 뒤늦게라도 로제 떡볶이 찐맛집에서 배달을 시켜 먹어보기로 정하고는, 구내식당에 가는 대신 센터 주출입구 쪽에서 배달음식을 받아오기도 했다.

까드득.

따끈한 플라스틱 뚜껑을 열자, 꾸덕한 핵맛 소스 사이사이에 기다란 밀떡이 고아하게 자리 잡은 메뉴가 보였다.

“음. 너무 많이 시켰나?”

“괜찮아, 걍 먹자.”

3~4인분에 튀김까지 추가해서 좀 많나 걱정했는데, 열심히 먹다 보니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단 걸 알게 됐다.

털썩.

배부르게 먹고 난 다음 두 사람은 돗자리에 드러누웠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로제 떡볶이를, 이 동네에서 유행이 돌고 1년이나 지난 다음에서야 먹게 되었다니.”

“1년이나 지났다니. 유행인 줄도 몰랐네. 나 너무 찌들어 살았나?”

“응.”

영원과 요련은 일관된 주제 없이 이런저런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힐끔거리는 걸 보면, 영원이 여현의 가이드인 걸 알아보는 듯했다.

영원도 요련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오후에 계속 비는 거지?”

“응. 나갔다 올까?”

“나가서 뭐 하지?”

“쇼핑?”

영원은 주섬주섬 옷을 뒤져 여현의 블카를 찾아 꺼낸 뒤 흔들어 보였다.

두 사람은 급작스럽게 오후 반차를 내고는 내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내 휴가 시간 차감해가며 땡땡이를 치다니…….’

영원은 반차 휴가계를 쓰는 자신의 모습에 잠시 현타를 느끼기도 했지만, 아무튼 센터 규정을 준수해 급히 휴가계를 올리고, 여현의 블카를 소중히 챙겨 나와 열심히 긁었다.

영원은 운동화, 게임기 패키지, 불꽃놀이 세트를 샀고, 요련은 쇼콜라 세트, 안경테, 원피스를 샀다.

둘은 지역경제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면서 덩달아 기분도 꽤 좋아졌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일상을 봤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고,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을 보고, 무언가에 집중하고 열중해 있거나, 잔뜩 화가 난 것 같은 사람들도 봤다.

마지막 종착지는 레드벨벳이 맛있는 케이크샵이었다.

레드벨벳뿐 아니라 쇼콜라 케이크랑 음료 중 시그니처 메뉴라는 플랫화이트 두 잔도 주문했다.

나른한 오후였다.

석양이 서서히 져갔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게, 편치 않을 때가 많았던 것 같기도 해.”

“…….”

“사람들이 뭘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영원은 2층 테라스 좌석에 앉아, 커피를 빨대로 저으며 말했다.

시선은 저 멀리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향해 있었다.

“지금은 어떤데?”

“오늘은, 별생각이 안 들어.”

“…….”

“다들, 그냥 자기 인생을 살고 있구나.”

붉은 햇빛이 비추는 주변 풍경이 예뻤다.

영원은 요즘 세상이 부쩍, 생각보다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굳이 따지자면 편안해. 특별히 불편할 거 없이. 그냥, 그렇구나. 그 정도.”

얼마 전에는 서울이 야경이 유독 예쁜 도시니까, 밤이라 예뻐 보이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이 도시는 낮에도 곳곳에 예쁜 풍경이 많았다.

“그리고 어쩌면 금방 저 사람들의 일상이 산산이 다 깨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또 당연히 들어.”

영원은 특별한 감정을 담지 않고 말했다.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것뿐이라, 특별히 괴로울 것도 없었다.

그를 바라보던 요련이 말했다.

“영원아.”

“응.”

“지켜 줘.”

“그럴 거야.”

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구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영원에게는 객관적인 사실이었다.

“당연히 그럴 거야.”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많은 것을 걸고 약속했다.

그러다가 여섯 시가 가까워지자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영원과 요련의 오후 반차는 별일 없이 끝까지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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