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은 바로 잠들지 않았다.
그는 서재에 들렀다가 다시 펜트하우스 옥상으로 나와, 아래의 한강과 그 위의 밤하늘을 한참 바라보았다.
삐빅. 삑.
[속보]
[속보]
게이트가 세계 곳곳에 새로 생겨나고 있다는 알람이 끊임없이 왔다.
다행히 서울에는 영원과 여현이 10개를 싹 처리한 이후부터 추가적인 차원의 균열이 생겨나지 않았다.
[속보: 뉴욕, C급 43개]
[속보: 헤이그, C급 21개]
서울은 상대적으로 게이트가 많이 열리지 않은 도시인 듯했다.
―아직 증명이 더 필요한 가설인 것 같기는 하지만, 에스퍼님 추측이 설득력은 있어요.
―도시별로 다 프로그램 넣어서 검증은 해보려고 합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여현은 게이트 웨이브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연구원들과 프로그램을 돌리기 시작한 윤 교수와 통화도 짧게 했다.
“확인되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네.
“수면시간 고려 없이, 아무 때라도 괜찮습니다.”
―알겠어요.
그러고도 여현은 펜트하우스 1층 침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슥.
여현은 핸드폰의 잠금을 해제하고, 새벽까지 답을 주겠다고 한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렸다.
“…….”
곧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 오는데도, 여현은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다.
10연속 게이트 투어를 했다고는 해도 특별히 평소보다 과하게 육체노동을 한 것도 아니었고, 원래 긴 수면시간을 갈망하는 편도 아니었다.
영원에게 가이딩을 받기 시작한 이후부터는 원래 짧았던 수면시간마저 필요치 않아진 기분이었다.
모든 게, 그녀가 나타난 뒤로 더 편안해졌다.
탁.
여현은 핸드폰을 엎어놓고는, 본격적으로 개시되지 않은 ‘SSS급’ 퀘스트의 알림을 보기도 했다.
[김여현, 오픈 타이틀 ‘영원의 헌신자’]
[김여현, 히든 타이틀 ‘영원의 감옥’]
영원의 감옥.
여러 생각이 드는 또 다른 이명이었다.
[2단계 등급 상승, SSS급 등급 상승 조건 개방]
[조건, 현재 미공개]
여현은 이미 [Y/N] 중 ‘Y’라는 하나의 선택지를 택했다. 그런데도 ‘상승 조건 개방’이라는 알림이 왔을 뿐, 아직 제대로 된 조건은 부여되지 않은 채였다.
SSS급이 되는 퀘스트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영원은 물론, 삼촌인 이창결 부장에게도.
【일단 기다리길】
【언급은 피해】
【모두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세계수의 음성 때문이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어떤 절망을 봤어?’
영원은 얼마 전, 그가 아홉 살 때 보았던 절망에 관해 물었다.
‘내가 태어난 세계가 기억나?’
구체적인 것은 기억나지 않으나, 절망의 이미지는 남아 있었다.
영원이 그런 질문을 던지는 건, 과거의 세계를 향한 의문 때문일까, 김여현의 경험에 대한 의문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띠링.
그리고 핸드폰에 기다리던 연락이 도착했다.
[서시용 에스퍼]
몇 달 전 부산, 울산, 대구에 S급 던전 세 개가 동시에 발생했다.
세 개의 던전을 연 세 명의 각기 다른 관리자들은 모든 던전에 서시용만을 초대했다.
정확하게는,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에 부합하는 에스퍼가 한반도 위에는 서시용밖에 없었다.
그 덕에 서시용은 몇 달 동안 부시장에게 서울시장의 모든 일을 넘기더니 종적을 감췄다.
‘그레이가 서울시장한테 접촉하고 있어.’
‘던전 안에 있잖아? 어떻게?’
여현은 백율과 이창결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렸다. 주로 이창결이 서울시장에 관한 정보를 백율에게 알려주는 대화였다.
‘서시용 시장은 정말 던전에 갇혀 있는 것만은 아냐.’
‘…….’
‘대한민국 랭킹 1위이자 세계 랭킹 2위. 정말 던전에 갇혀 있기만 했을까?’
‘…….’
‘나름대로 편법을 써서 나왔다 들어갔다 하면서 고민을 하는 중인 거지.’
‘맞아. 나한테도, 심영원 가이드님 납치범도 서울시장이 죽였다는 정보가 들어왔어. 재차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바로 눈치챈 거지. 뭔가 이상하다는 걸.’
‘항상 그랬듯, 서시용은 그냥 이름만 랭킹 1위인 건 아니었네. 속을 알 수 없는 더럽게 똑똑하고 눈치 빠른 인간.’
그 세 개의 S급 던전이, 가장 오랜 시간 서시용을 잡아두었던 부산 던전을 마지막으로 며칠 전 드디어 모두 종결되었다.
여현은 서시용의 눈앞까지 마중을 가서 그에게 어떠한 제안을 했고, 서시용은 조금만 더 고민해보겠다고 답했다.
이제 답을 들을 시간이었다.
[지금 갈 수 있는데요]
[바로 가도 됩니까]
여현은 옥상 난간에 기대어, 긍정의 답을 보냈다.
그리고는 공식적으로는 아직 대한민국 에스퍼를 통틀어 가장 강한 자, ‘추의 저울’을 기다렸다.
***
서시용은 드래곤을 타고 금방 날아왔다.
맞춤일 게 분명한 정장 차림에, 머리카락도, 피부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 방금 샵이라도 들렀다 나온 배우 같은 모양새였다.
그는 정치인답게 환한 웃음부터 보이며 여현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김여현 에스퍼님. 며칠 만이네요.”
“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항상 서울을 지켜주시는 노고에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운 때에도요.”
여현은 표정 변화 없이 악수에 응했다.
그가 뱉는 모든 칭찬이나 감사가 진심이 아닌, 그저 입에 붙은 말이란 것 정도야 잘 알았다.
특히 말을 끝도 없이 많이 할 때는 더욱.
서시용은 표면으로만 파악할 수는 없는 인물이었고, 그 표면마저도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변했다.
“오늘 요란한 새벽 시간을 보낸 모양이던데요, 김여현 에스퍼님. 시장실로도 많은 보고가 왔지.”
“네.”
“그냥, 본론으로 갈까요.”
“네.”
하아. 서시용은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많이 고민했습니다. 이 세계, 관리자, 우리들의 능력…… 여러 가지로 생각해봐야 할 것도 많았고.”
“…….”
“선별의 승리일지, 혹은 무작위로 뽑힌 비선별의 승리일지. 관리자가 나름대로 선한 녀석들을 뽑아 놓았다는 선별끼리도 이 미친 난리인데.”
“…….”
“갑자기 나타난 비선별들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얼마나 진창이 될까요.”
높은 등급의 각성자들은 어느 순간부터는 관리자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란 걸 깨닫게 되는 게 보통이었다.
영원이 그러하듯, 여현이나 서시용도 마찬가지였다.
관리자들은 세계의 법칙 자체에는 개입할 수 없다. 그들은 한정된 선택과 말만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권능의 한계로 인하여, 특정인에게만 무작정 관대해질 수도 없었다.
또 그들은 그들의 존재를 구속하는 절대적인 법칙 때문에, 본질적인 부분에서는 ‘공평’해야만 했다.
“나한테 먼저 그레이의 제안이 왔었다는 걸 알고 있죠.”
“네.”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거의 넘어갈 뻔했지.”
서시용은 그레이에게 혹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에스퍼님도 알겠지만, 세계수가 비선별자들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에게 타이틀을 사후적으로 부여해 세계수 자신의 의지를 알리는 것뿐입니다.”
“…….”
“아무런 강제성이 없는 운명을 부여하는 거지. 사실, 선별자라고 해도 세계수가 그들을 선별한 뒤 부여한 타이틀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서시용의 말이 맞았다.
세계수가 부여한 타이틀(이명)에는 세계수의 의지와 운명이 깃들어 있기는 하나, 그렇게 살지 않는다고 해서 세계수가 응징을 가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미 세계수는 여러 번 실패를 겪기도 했다.
특히, 조지나 스피넬.
세계수는 ‘믿음의 희망’을 통해 세계수 자신의 희망이 깨어지는 걸 경험했을 터였다.
차원을 구하라고 구체적인 예언까지도 전해주었는데, 조지나 스피넬은 그를 미끼로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는 쪽을 택했다.
세계수의 의도나 바람 따위는 쓰레기처럼 버려버리고.
“하지만 또 그런 생각은 들어요.”
“…….”
“세계수가 자기 멋대로 부여해 준 의지와 운명에, 인간의 자유로운 욕망에 따른 의지와 운명까지 더해질 때, 그 인간은 놀랍도록 강해진다고 말이죠.”
“…….”
“에스퍼님의 ‘영원’은, 정말로 모든 걸 바쳐 헌신할 만한 ‘영원’입니까?”
서시용은 본질이 모호한 질문을 던졌다.
여현은 답하지 않았다.
한동안 사위가 조용했다.
끼륵.
먼 상공에서 서시용이 타고 날아온 드래곤이 울었다.
서시용은 드래곤을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여현에게 시선을 맞추었다.
여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시장님.”
“네. 에스퍼님.”
“그냥 본론으로 가시겠다고 하셨으면서, 너무 돌아가고 계십니다.”
여현의 지적에 서시용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웃음이 조금씩 더 커졌다.
“그랬군요.”
서시용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레이는 부산에서 구한 S급 던전석을 다 달라고 하더군요. 저는 그러기 싫습니다.”
“가지세요.”
여현은 쿨하게 양보했다.
던전석은 알아서 추가로 구하면 됐다. 굳이 서시용의 곳간까지 털 계획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레이는 서울을 일단 두고 오라고 하더군요. 나중에 되찾아 주겠다고.”
“그냥 여기 계세요.”
서시용이 그냥 서울에 있는 게 센터의 모두가 바라는 바였다.
그가 서울에 있다면, 서울은 지켜질 테니까.
“그리고 나는 인간끼리 싸우는 데에 끼기는 싫거든요. 민간인들한테 손을 대는 건 특히 좀. 내가 의외로 살육을 피하는 평화주의자라. 게다가 직업상, 또 출마도 해야 하는데, 내가 학살자면…….”
“그러시죠.”
“드래곤 네스트를, 내 딸들을, 절대로…….”
“손끝도 안 댑니다.”
“…….”
“누구도.”
여현은 이제야, 드래곤에 대한 서시용의 무한한 애정을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했다.
그러자 서시용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래요. 좋아요. 오래 고민한 것치고는 너무 간단한 해결이네.”
“다른 부가조건은 없습니까?”
“뭐 더 추가할까요?”
“아닙니다.”
여현은 꽤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럼, 그대로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나는 그레이 딘하우스에게 가지 않아요. 계약서라도 써야 하나? 아니면 이것으로도 충분한가요?”
“충분합니다.”
구두 약속이면 됐다.
서시용은 엄청난 불확실성을 품은 존재였지만, 계약서를 쓴다고 이 협상에 더한 구속력이 생기는 건 아닐 터였다.
불확실하나, 그래도 안심은 됐다.
센터의 핵심 멤버들이 서울을 떠날 때 대한민국을 믿고 맡길 이를 서시용 말고는 생각해낼 수가 없다.
‘더럽게 강해서 짜증 나지. 하지만 그래서 믿을 수 있어. 너무 마음 약하고 선한 녀석이면, 그건 그것대로 못 미더운 면이 생기잖아. 시장은 딱 그만큼 돌아 있었으면 좋겠는 만큼 돈 또라이야.’
백율의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내 용들의 땅을 지킬 테니까. 그레이에게 지지 말길 바랍니다.”
드래곤 네스트를 다 파괴해버리겠다는 게, 그레이가 서시용을 향해 마지막으로 꺼내 든 협박의 카드였다.
그게 서시용을 긁었다. 그 전까지는, 서시용은 그레이에게 꽤 설득되고 있었다.
비선별들이 미친 듯이 각성하는 순간, 세계 모든 곳이 아수라장이 될 거고, 드래곤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레이 쪽에 붙는 게 나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선함은 쉽게 승리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차피 인간들은 어느 편이나 하나같이 다 역겨우니까.
하지만 가이드 없이 폭주해 죽을 줄만 알았던 김여현에게 가이드가 붙었다.
‘김여현은, 그 정도로 심히 역겹진 않지. 이상하게도.’
그리고 명동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서시용의 시야에 심영원이 들어온 게 그레이와 서시용 사이의 협상에 엄청난 변수가 됐다.
심영원.
서시용은 근처에서 잠들어 있을 가이드를 언젠가는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반포대교 인근에 떨어지며 만든 작은 파문이, 그를 이 결과에 닿게 이끈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