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의 합리적인 의심을 이해하고, 그 의심이 우리의 관계를 망치지 않는다는 것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그 어떤 누군가의 의심이 시작되기 전에, ‘당신의 의심을 기꺼이 환영한다’는 말이, 미래의 누군가에게 엄청난 힘이 될 것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필사적으로, 의심합시다.”
이창결은 쓴웃음을 짓고 나서 대답했다.
“사실은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계속 세상을 구하고 싶을지.”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문제일 터였다.
“하지만 그레이가 세계를 가지게 만들 수는 없어요.”
그러나 이창결은 확신을 가진 듯이 말했다.
“그레이의 계획에 따라 한반도를 바다 밑으로 수장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최근에 백율이 파악한 그레이의 구체적인 계획에 따르면, 아시아의 동쪽은 지구본에서 완전히 다른 형태로 변모하게 될 터였다.
그레이는 평범한 인간들을 힘에 굴종시키고자 했고, 그가 말로만 협박하는 게 아니라 실행력 역시 넘치는 독재자임을 보여줄 생각인 듯했다.
그래서 그는 측근들에게 동아시아의 민간인들을 완벽하게 ‘청소’하겠다고 했다.
‘거기, 인구밀도도 장난 아니지?’
‘한국, 중국, 일본…… 사람도 꽤 많이 살잖아.’
‘화려한 영상이 안기는 충격이 굉장할 거야.’
게이트 웨이브로 인한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만들겠다면서.
잔혹하게.
모두가 그레이 딘하우스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도록.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선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선.
그것이 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세계구원 2회차의 심영원은, 말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곳의 모두가, 자기 자신을 선이라고 생각하지 않길 바랐다.
안 그러면, 다칠 테니까.
이후에는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각자가 자신이 준비해온 걸 요약해서 말했다.
“주요 12개국 정부 기관과 소통 라인은 다 깔았고, 의사도 다 전달했습니다.”
백율 부장이 가장 큰 성과를 냈다.
강화연 가이드도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인 성과를 알렸다.
“스파이는, 확실하게 확인된 사람만 해도 17명이에요. 예의주시하고 있는 각성자들이 50명쯤 더 있는데, 그중에서도 20명 이상은 스파이로 확인될 것 같고요.”
다들 한 자릿수를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딘하우스 쪽에서도 몸을 사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스파이들을 당장 축출할 생각은 없고, 모두 동향만 감시하고 있어요.”
“…….”
“이렇게 배신자들이 산재한 곳에서 희망을 찾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나, 저는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다 찾아내고, 대응책을 만들어내면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요.”
한 바퀴를 다 돌아 마지막으로 영원의 차례가 왔다.
영원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기밀 정보들, 자신이 S급이고, 여현과의 매칭률을 더 높일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조금은 아시겠지만, 저는 금을 만들기 위해 시작되었다는 마법, ‘연금술’이라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영원은 연금술사의 힘에 대해서도 두루뭉술하게 언급하였으나, 자세한 부분은 말하지 않겠다고 선을 그었다.
다들 영원이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점을 이해했다.
동시에, 누구도 과장되게 반응하지 않았다.
진지한 태도로, 영원의 능력이 어떤 것인지 묻거나, 어떤 도움이 될지 의견을 조심스럽게 말할 뿐이었다.
모두 진지했다.
지금은 그랬다.
영원은 희망적으로, 또한 다소 회의적으로,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이들의 표정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일단, 시작은 순항 같았다.
***
영원이 화연에게 약속한 2주 중 마지막 날.
둘은 대강당에서 오랜만에 마주 섰다.
“지난 일주일간의 성과를 보겠습니다.”
화연이 역삼 본부에서 생각보다 많은 스파이를 찾아낸 바람에 심각하게 바빠져서, 2주 중 1주는 영원 혼자 연습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영원 가이드님.”
“네.”
“꼭, 반드시 2주 만에 성공하셔야만 하는 건 아니에요.”
화연은 영원이 최선을 다해왔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당근과 채찍을 적절히 사용할 요량으로, 영원을 세심하게 위로하는 말을 먼저 꺼냈다.
“모형 하나를 살짝 들어 올리는 정도로도 족해요. 제가 그걸 해내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도 말씀드렸죠?”
“네.”
“저랑 마지막 날에 해내신 거, 그것도 믿을 수 없는 빠르기였어요.”
화연은 영원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지는 않게 만들고 싶었다.
그녀는 충분히 잘 해내 왔으니까.
“그때보다 조금만 나아지면 되는 거니까요.”
영원은 알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타박타박, 원형 대강당의 중심부로 걸어갔다.
그러나 완전히 중심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영원은 중심부터 자신이 멈추어 선 곳까지의 거리를 재어보는 듯이 움직였다.
“쌤.”
화연은 영원의 뒤편에 있었다.
“네.”
“하나만 살짝. 그건 이미 1주일 전부터 가능했고.”
“…….”
“이건 성공한 적은 없는데, 어제는 하다가 놓쳤지만…….”
어제는 하나를 완전히 들어 올렸다는 뜻인가. 화연은 놀란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오늘은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영원은 크게 호흡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의 능력에 집중했다.
화연 역시 숨을 죽이고 영원의 행동에 집중했다.
“보세요.”
영원은 눈을 감고 레이더부터 사방으로 뻗었다.
섬세한 힘 통제에 집중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닫고 레이더가 알리는 에스퍼 모형 1000개의 위치 정보만 받아들였다.
조용하고, 침착하게.
영원은 호흡 역시 느리게 하면서 당장 필요 없는 모든 생각을 날렸다.
오로지, 1000개의 물체에 대한 인식만을 남기고.
화연은 그러한 영원의 변화를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혹시…….’
정말 혹시, 가능하게 된 게 아닐까, 하면서.
‘그렇다면, 그레이 딘하우스의 계획에서 인명피해를 막아내는 데에 정말 엄청난 도움이 돼.’
가이딩으로 행사하는 물리력은 자신보다 등급이 한참 낮은 에스퍼들의 그릇 입구 자체를 막아버릴 수도 있었다.
얼마나 강하게, 공들여서 꽉 막았는지에 따라 상대 에스퍼는 짧게는 수초, 길게는 며칠, 심지어는 몇 주 동안 그릇 자체를 사용할 수 없게 되기도 했다.
그건, 그 에스퍼의 몸 상태를 각성 전으로 회귀하게 만드는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에스퍼의 입장에서 더 최악은, 그때부터는 그릇이 채워질 수도 없다는 것.
‘힘이 들어갈 길도 없으니, 자연적인 회복도 거의 막히게 돼.’
그렇다면, 가이딩을 받을 수 없어 그릇이 비워진 고통은 고통대로, 에스퍼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고통은 또 그 고통대로 느끼게 되는 것이었다.
‘에스퍼로서는 절망 중의 절망을 맞는 시간이겠지.’
그러니 가이드의 물리력은, 잘 사용할 수만 있다면, 낮은 등급의 에스퍼들을 상대로는 사실상 치트키처럼 쓰일 수 있는 능력이었다.
훈련이 잘 된 S급 가이드들은 D급 이하 에스퍼들을 상당 기간 일반인처럼 만드는 게 가능했다.
B급의 힘으로도 섬세한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C급 에스퍼들에게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정말정말정말 훈련이 잘 된 강화연 같은 가이드는, 일부 B급 에스퍼들에게도 같은 짓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영원 역시 비슷한 수준에 도달한다면, 그레이 딘하우스 측 B급 이하의 에스퍼들은 사실상 ‘없는 전력’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냥 B급 이하 에스퍼들을 잠시 가이드의 힘으로 통제하거나, 그 공격을 튕겨낼 수 있는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냐.’
‘정말 말 그대로 며칠 동안 완전히 무력화할 수 있어.’
‘그래도 A급과 S급이 남아 있으니 부담이기는 하겠지만, 소수의 랭커들은 1:1 마크가 가능하니까.’
화연과 다른 핵심 멤버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건 A급이나 S급 에스퍼들과의 1:1 전투가 아니라, 그레이 측의 B급, C급, D급 에스퍼들이 일반인들에게 달려들어 다량의 인명피해를 일으키는 일이었다.
‘영원 에스퍼님 역시 할 수 있게 된다면, 인명피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줄일 수 있어.’
화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기대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영원의 증명이 시작되었다.
심각하게 잘 정제된 B급 가이드의 힘이, 1000갈래로 뻗어 나왔다.
“…….”
화연은 침을 삼켰다.
영원이 S급이라는 걸 고려해도, 타고난 재능을 감안해도, 미쳤다 싶은 정도의 컨트롤이었다.
사라락.
부웅.
“……!”
1000개의 에스퍼 모형이 동시에 공중으로 부유했다.
화연은 눈을 크게 뜬 채 같은 높이, 같은 속도로 떠오르는 모형들을 훑었다.
믿을 수 없었다.
1000개의 물체가 아무 소리 없이, 서서히 움직였다.
서서히, 서서히.
둔탁한 모양의 마네킹들이 영원이 있는 대강당의 중심으로 몰려왔다.
반지름 5km.
걷는 속도로, 거의 한 시간.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는 영원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하아, 하아.
가끔 영원은 인상을 찌푸리며 작게 호흡을 몰아쉬었다.
그래도, 단 하나도 추락하지 않았다. 모든 모형이, 함께 공중에 떠서 천천히 다가왔다.
툭. 툭.
하나, 둘.
대강당의 중심에 모형들이 쌓여갔다.
투둑.
툭. 툭. 투둑.
투둑. 툭.
997개, 998개, 999개, 그리고 1000개.
툭.
결국, 끝났다.
1000개의 에스퍼 모형이 언덕을 이뤘다.
영원이 멈추어 있는 곳은 언덕에서 굴러 내려온 마지막 모형이 발치에 닿을 정도의 위치였다.
눈을 뜬 영원은 그제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 하아, 으. 하아, 하.”
심장이 거세게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영원은 허리를 숙이고 양쪽 무릎을 양손으로 잡은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아, 하아.”
화연은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영원도 한참이나 호흡을 정돈해야 했다.
“……영원 가이드님.”
화연의 부름이 들린 건 시간이 더 지나서였다.
영원은 숙였던 허리를 바로 하고, 빙글 돌아 화연을 바라보았다.
“쌤, 이거.”
“……네.”
“실화 맞아요.”
이번엔 영원 쪽이 단호했다.
“이 어려운 걸 제가 또 해냅니다.”
에스퍼 모형 하나, 그건 이미 일주일 전부터 들어 옮길 수 있었다. 모든 모형을 동시에 들어 올리는 것도 사흘 전부터 가능했다.
영원은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걸 보여주려고.
“쌤.”
“…….”
“이런 먼치킨은 처음이죠?”
화연이 고개를 끄덕였고, 영원이 땀에 젖은 앞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며 웃었다.
“희망이 있을지 의문이라고, 어제 그러셨죠. 회의 때.”
“…….”
“여전히 변함없으신가요?”
화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웃었다. 긴장이 풀려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아니요. 가이드님. 그러니까…….”
“네.”
“그러면…….”
화연이 타박타박 걸어, 영원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웃음을 지우고 다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영원은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즐거움은 5분뿐이었다.
“자, 그럼 다음 걸 해봅시다.”
“…….”
“더 어렵고 재밌는 거.”
“실화…….”
“실화입니다.”
영원은 오랜만에 시전한 블러핑을 후회했다.
먼치킨력을 이렇게까지 자랑해서는 안 되었다는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힘숨엑(주: 힘을 숨긴 엑스트라) 유지해야 했어…….’
‘영원히 힘숨엑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심영원이 옳았어.’
힘을 드러낸 영원 앞에서, 단호한 과외쌤은 다시 본인의 캐릭터성을 찾았다.
영원은 굴림이 끝난 줄 알았으나, 더한 굴림이 찾아왔다.
성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