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삼 본부, 여현의 사무실.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여현은, 널찍한 소파에서 잠들어 있는 자신의 가이드를 발견했다.
부드러운 회갈색 머리카락과 얼굴의 절반 정도만 두툼한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
베개가 이상한 각도로 목을 받치고 있어 자세가 불편해 보였다.
여현은 조심히 다가가, 힘을 사용해 침구를 살짝만 정돈해주었다.
“으응.”
영원은 약간 뒤척인 뒤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여현은 말없이 영원의 감긴 눈을 바라보았다.
요즘 다들 자신의 가이드를 고생시키는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여현은 시선을 거두고는 사무용 책상 앞으로 갔다.
이따금 영원이 있는 방향에 신경을 집중하면서도, 업무 처리 속도를 늦추진 않았다.
최근에 이런 풍경이 종종 연출됐다.
지하 60층의 사무실에 무기한·무한도 접근 권한을 얻은 영원은, 여유가 생기면 여현의 사무실을 찾았다.
열에 아홉은 부족한 잠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영원에게 제공된 방은 너무 많은 이들이 앞을 지나다니는 데다가 좁아서 잘 데가 없는데, 여현의 방은 항상 조용하고 널찍해서 좋았다.
여현은 영원에게 더 넓고 한적한 방을 주라고 센터에 요청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요즘 그는 소파가 비어있을 때도 가끔 업무를 멈추고 가만히 그 방향을 보기도 했다.
그가 누워 기계 가이딩을 받던 위치였다. 항상 결핍을 느끼던 자리. 그곳은 최근 영원의 쉼터가 되었다.
새근, 새근.
미약한 숨소리는, 예민한 감각을 통해서는 선명하게 들렸다.
“…….”
영원에 대해 품었던 많은 의문이 풀린 듯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편치 않은 부분들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을 때 긴장이 사라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녀가 강하다고, 안심하게 되지도 않았다.
그녀가 몇 가지 진실을 말해주었다고 하여, 더 알아야 할 게 없다는 생각 역시도 들지 않았다.
달칵.
여현은 손에 들고 있던 전자펜을 내려놓았다.
“…….”
답을 알고 싶은 질문이 자라났다.
그레이 딘하우스는, 그녀에게서 무엇을 발견한 걸까.
내가 볼 수 없는, 무엇을 본 걸까.
여현은 눈을 감고 등받이에 기댔다.
삐걱.
등받이가 뒤로 젖혀졌다.
영원을 처음 보았던 때를 떠올렸다. 그녀는 그에게 달려왔다. 기다렸던 것을 드디어 발견한 듯이. 망설임 없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은, 그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많은 것들을 서로 약속했다.
‘GPS는 항상 켜두세요.’
‘응. 혹시라도 이상 현상에 휘말리면 1분 안에 무조건 메시지 날릴게.’
‘1분…….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할까요?’
‘20초.’
‘그리고 떨어져 있을 때는 가끔 전화로 구체적으로 알려주세요.’
‘응. 전화통화도 주기적으로 하면서 보고도 해줄게.’
‘네.’
더 가까운가.
알 수 없다.
여현은 그렇게 오랜 시간 눈을 감고 있었다.
***
“으응…….”
영원은 느지막이 눈을 떴다. 윤 교수가 3시간을 잡아 놓은 테스트를 50분 만에 끝내서 생긴 여유 덕이었다.
‘오래 잤나.’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곳의 소파는 심히 아늑했다.
영원은 습관처럼 시간을 확인하고는, 늦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하며 다시 몸을 눕혔다.
‘(절대로 자율이 아닌) 자율학습 시간까지 얼마 안 남았네.’
‘잠깐만 더 누워 있다가 시간 딱 맞춰서 가자.’
‘뭔가 나…… 직장인같이 사고하는 건가?’
고백하자면, 요즘 심영원은 출근과 퇴근과 업무에 조금씩 적응해가며, 자기 자신의 미약한 캐붕을 목격하는 중이었다.
‘센터 왔다 갔다 하는 거 말이지.’
‘아주 조금은, 생각보다 다소 괜찮…….’
‘그래도 이대로 심영원의 #200평펜트하우스 #셀프감금 #제발바랍니다의 캐릭터성이 전부 붕괴하는 일은 없을 거라 확신하지만.’
오랜만에 경험해 보는 성장다운 성장이 영원을 자극했다.
가이딩은 새로운 힘의 세계를 열어 보였다.
내일은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다음 출근을 마냥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게끔 했다.
게다가 여현과 함께하는 출근길도 좋았다.
승차감 완벽한 차를 타고 하는 드라이브도 좋고, 같이 밖에서 점심이나 저녁을 먹는 것도 좋았다(여현은 안 먹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런 것들.
낮잠을 자고 일어나니 여현이 남겨둔 쪽지.
[왔다 가요.]
그 옆의 달달한 다과.
[일어나면 드세요.]
영원은 이불 밖으로 벗어나지 않은 채, 접시를 들고 브라우니를 한 입 베어 먹었다.
아침부터 집 안을 채우던 달콤한 초콜릿 향의 원인.
꾸덕하고, 쫀득하고, 진하고…… 완벽했다.
당 공급이 스트레스 지수를 팍 베어 낮췄다.
드륵.
물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연습시간 10분 전입니다]
[제가 일이 많아져서 밀착과외는 못 하지만 행동감시 모니터링은 돌아갑니다]
[대강당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감지되지 않으면 제 폰에 알림 와요]
[제가 없는 동안에도 열심히 하셔야 해요]
[약속한 2주 끝까지, 사흘 남았습니다]
화연에게서 연달아 메시지가 왔다.
‘나서서 하려던 맘이 들어도 시키면 싫어지는 법.’
업무를 어서 끝내라고 압박하는 연락이라는 생각이 들자, 출근이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네, 네.”
영원은 기지개를 크게 켜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지하 60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대강당이 있는 층으로 올라갔다.
약속한 2주가 다할 때까지 사흘이 남았다. 앞으로의 사흘은 정말로 해낼 수 있다는 걸 증명할 시간이었다.
“해볼까.”
어쨌거나, 영원은 자신 있었다.
***
영원이 착실하게 능력을 성장시켜나가는 요즘.
비선별 러쉬와 게이트 웨이브에 대비하기 위해, 영원뿐 아니라 다른 이들 역시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이창결 부장은 국내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을 추려 공고한 인적 네트워크를 짰고, 백율 부장은 해외까지 정보망을 넓혀 사소한 정세의 변화도 감지할 초국가 정보공유체를 조직했다.
윤희유 교수는 영원과 여현의 도움을 받아 수많은 가설을 검증하고 분석했고, 박의총 가이드는 1달러, 1원까지 긁어모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한 비상자금을 확보해두었다.
요련과 장제권 가이드는 각종 핑계로 세계 곳곳에 출장을 다니며 비선별 러쉬나 게이트 웨이브가 벌어졌을 때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안전가옥이나 모임 거점을 만들었다.
강화연 가이드는 영원을 교육함과 동시에 역삼 본부 내의 스파이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여현은 대한민국 곳곳에 생겨나는 게이트와 던전을 믿을 수 없는 속도와 파괴력으로 처리하며, 대한민국 에스퍼 랭킹 1위, 서시용과 접촉했다.
앞서 언급한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이들이 수면 밑에서 무언가에 헌신하고 있었다.
특히, 현판소의 주인공이었던 최환성 에스퍼는 해외에서 비밀공작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오후.
‘하늘. 그런 이름의 한국 소녀가 그레이에게 간 것 같아. 자발적으로. S급 가이드야.’
‘그다음엔 시드니 어딘가의 할아버지. S급 에스퍼.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어.’
‘아마, 시작이겠지.’
백율이 모세혈관처럼 짜놓은 정보망 말단에서 비선별 러쉬의 단초가 감지되었다.
S급 비선별의 연속적인 등장.
모르는 사이에, 대격변의 폭풍전야가 이미 끝났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대격변은 이미 와 있는지도.
그러자 이창결은 여태껏 전부 함께 모인 적은 없었던, 심영원, 김여현, 이창결, 백율, 강화연, 장제권, 윤희유, 박의총, 고요련, 그렇게 핵심 멤버 총 9인을 소집했다.
여기에 참여하였어야 할 다른 멤버인 최환성은 한국에 있지 않아 올 수 없었다.
장소는 역삼 본부 별관 지하 61층 회의실.
다들 오전에는 별일 없는 듯 평범하게 출근해 별관에 들어왔다. 감시의 눈이 있으니 특별한 일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됐다.
이창결이 지정한 외진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61층으로 하나둘 가기 시작한 건 오후 3시 무렵이었다.
―확인 완료. 접근 승인.
9인의 멤버들은 역삼 본부 에이아이의 엄격한 보안통제를 거친 뒤, 수동으로도 각자의 신원을 증명해야 했다.
가장 늦게 도착한 건 백율 부장이었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인사도 없이 착석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이창결이 입을 뗐다.
“비선별 러쉬.”
이창결은 무엇이 시작되었는지 확실하게 알려주었다.
“정말로 확실합니다.”
다들 조용했다.
“한 달 정도는 큰 사고가 일어나진 않을 겁니다. 딘하우스 쪽의 던전석 문제는 여전하니까.”
던전석 보유량은 이쪽이 그레이보다 훨씬 우위였다.
“S급이 더 많이 나타날수록, 그레이 측의 던전석 부족은 더 문제가 될 거예요.”
센터는, 영원이 계단 우림에서 싹 쓸어온 S급 던전석뿐 아니라 여현이 그 전후로 차곡차곡 모아 온 게 많아 아직까지는 버틸 만했다.
“우리에게 시간은 많이 없어요. 그럼에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창결은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은 멤버 8명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었다.
평소에는 발랄하던 이들까지도 모두가 진중하고 묵직한 분위기를 감고 있었다.
“우리끼리만 협력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는 일이 해결되지 않아요.”
모두가 알던 바였다.
“센터 외부의 인사들도 있고, 대한민국 사람이 아닌 이들도 우리와 만나게 되겠죠.”
인원이 늘어나면, 당연히 배신자가 생기고, 실수와 실패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
“누구도 믿을 수 없어요.”
“…….”
“그걸 알고 계셔야 합니다.”
이창결은 영원과 시선을 맞추고 말했다.
영원은 의자에 기댄 채로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인간의 속은 알 수 없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저 말만이 진리인 것 같았다.
“인간을 대할 때 제1원칙. 쉽게 믿지 않는다.”
“…….”
“제2원칙. 믿게 된 자를 의심한다.”
“…….”
“저는 여러분을 의심할 겁니다. 여러분도 저를 의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