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삼 본부 지하 대강당.
지표로부터 약 200m 아래.
그곳에서 반짝이는 거대한 문을 열면, 차원을 넘어 층고가 5km쯤 되는 대강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스르릉.
쿵.
[심영원, A급 던전으로 진입합니다]
지름 10km가량의 원형 공간.
과거에는 몹이 출몰하는 A급 던전 ‘격투장’이었으나, 현재는 몹이고 구조물이고 S급 에스퍼들에게 싹싹 밀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지금은 던전으로서의 기능은 다하고, 주로 센터 각성자들의 훈련 공간으로만 사용되고 있었다.
‘오……. 비주얼 웅장해.’
강당에 처음 발을 들일 때 영원의 기분은 꽤 가벼웠다.
그러나 3시간 후.
영원은 자비 없는 과외선생, 강화연 가이드를 망연자실한 얼굴로 봤다.
“하아, 하아…….”
차오른 숨을 거칠게 몰아쉬면서.
동시에, 호기롭게 그녀의 과외 제안을 수락한 과거의 심영원이 얼마나 태평했던가를 생각하면서.
“이제 반이에요.”
긴 머리카락을 두 갈래로 땋아 올림머리를 한 작은 체구의 화연은 외양과는 어울리지 않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 더 가시면 됩니다.”
“네?”
“절반 하셨어요. 그러니까 절반 남았네요.”
“…….”
화연이 뱉은 말을 못 알아들어서 되물은 것은 아니었다.
“끝에서 끝까지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에스퍼 모형 1000개 상대로 동시 가이딩, 10회 실시합니다.”
영원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신체도 강했다.
그러나 에너지의 밀도가 높은 A급 던전 안에서 1000개의 에스퍼 모형에 3시간이 넘도록 계속 동시에 가이딩을 넣는 건…….
“실화…….”
“실화입니다. 실시하세요.”
영원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화연이 공중으로 높게 떠올라 멀어지는 것을 봤다.
과외선생, 강화연.
대한민국 S급 가이드 중 유일한 비선별.
‘하면 된다’의 화신.
그녀는 A급에서 S급이 된 노력형 천재였고, 센터 소속 각성자 전체를 통틀어 평균 근무 시간이 가장 긴 것으로도 유명했다.
필요하다면 자신만은 주 168시간(= 24시간 × 7일)도 근무할 수 있다고 온화한 얼굴로 말하는 야근계의 네임드 오브 네임드.
그녀의 어록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저에게는 퇴근이 필요하지 않아요.’
‘제가 쉬겠다고 말씀드린 건, 자정 전에 퇴근하겠다는 말이었어요.’
‘휴식은 직장에서도 취할 수 있는데요?’
심지어 윤 교수와 요련마저도 강화연 가이드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그 어떤 누가 와도 강화연 가이드님의 근무 열정과 센터 사랑을 이길 수는 없어요.’
‘내가 감히 비견될 수 있는 분이 아냐.’
영원은 열정과 노력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종류의 인간들을 보통 싫어했다.
‘그런데 어째서…… 이 동네 언니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후광이 나는 건데?’
그건 그들이 하나같이, 타인에게 꼰대질을 하지는 않기 때문일까.
“영원 가이드님.”
“네.”
영원은 빙그르르 돌며, 강당 벽면을 따라 세워진 1000개의 모형을 쭉 둘러보았다.
“시작하세요.”
“네.”
아무튼, 뿌리고 다니는 아우라가 그녀들을 거역하기 어렵게 했다.
‘분명, 이 동네 뭐가 있어.’
‘마가 낀 게 분명해.’
그러니까 화연이 지금 시키는 노가다도 결국에는 묵묵히 받아들이게 됐다.
영원은 속으로 한숨을 포옥 쉬고 강당의 한쪽 벽면에 붙었다가, 힘을 끌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질주했다.
‘생략.’
‘생략.’
‘노가다 답답 설명 구간은 생략한다.’
쿠쿵.
털썩.
“하아, 하아…….”
끝내 10회를 마쳤다.
그리고 영원이 이제 이 지긋지긋한 대강당에서 벗어날 시간이다 싶어 기쁘게 널브러졌을 때, 화연은 다음 지옥문을 열어주었다.
“영원 가이드님.”
“네…….”
“시간이 좀 남았으니까, 재밌는 거 하나 더 추가해 볼게요.”
“재밌는 거요?”
재밌는 거라면 환영이었다. 영원은 등 뒤로 땅을 짚고 상체만 일으켜 화연을 올려다보았다.
“1000개의 모형을 정리 겸해서 하나하나 중간에 모아 쌓을 거예요.”
어쩐지, 거기까지만 들어도 이미 등골이 싸했다.
어쩐지, 뒷부분은 안 듣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도 했다.
“가이딩으로요. 조건도 있어요.”
“…….”
“B급 수준 가이딩의 힘만 뽑으세요. 미약한 힘으로, 불가능한 걸 해내는 겁니다.”
“…….”
“말씀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지만, 연금술도 당연히 안 됩니다.”
‘뭐?’
영원은 이번에는 정말 잘못 들었나 했다.
“쌤…… 연금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A급도 아니고 B급……요?”
“네.”
“여기 A급 던전 아니었던가요?”
“당연히 맞습니다.”
“…….”
“실시합니다.”
영원은 소극적인 반항을 시도해봤다. 이름하여 살포시 딴죽 걸기.
“가이딩하는 힘으로 물건 옮기는 건 S급만 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B급의 힘만으로 하는 거예요.”
“…….”
‘??’
“쌤.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도 안 재밌는데요. 다른 재밌는 거 하면 안 될까요? 재밌는 거 하자면서요.”
“재밌어요.”
“…….”
화연의 표정에는 웃음기가 조금도 없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재미가…….”
“있습니다.”
“…….”
화연은 매일 단호박을 한 통씩 삶아 먹는 게 분명했다.
아니면 적어도 단호박즙이라도 매일 한 팩씩 뜯어 먹거나.
“가이드님.”
“네에.”
“그럼 더 재밌게 C급…….”
“재밌습니다. 아하하. 넘나 SSSSS급 잼이네요!”
영원은 필사적으로 미소를 짜내어 웃어 보이고는 벌떡 일어났다.
그다음엔 화연에게 혹시 특별한 노하우가 있는지 물었다.
하기로 했으면 해야 하는 거고, B급 힘으로도 할 수 있다고 하니까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힘 통제에 관하여, S급 에스퍼의 전설이 김여현이라면, S급 가이드의 전설은 강화연이라고 했지.’
‘나도 그 명단에 이름을 올려주마.’
영원은 결의를 다졌다.
화연은 힘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몇 가지 조언을 해주고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저는 B급 힘으로 에스퍼 모형 하나 옮기는 데 2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네, 그럼 저는 올해 말…….”
“심 가이드님께서는 2시간 만에 해치워보는 게 좋겠어요.”
“…….”
“마치고, 늦은 저녁 먹으러 가시는 거 어떤가요?”
잘못 말한 것이길 바라지만, 화연의 표정이 너무나 뻔뻔했다.
‘네?’
‘네??’
영원은 소리를 내지도 못하고 표정으로만 물었다.
‘2년과 2시간 사이……. 대체 그 간극 뭔데요?’
‘너무 급발진 아닙니까?’
화연은 질문에 답하지 않고 타이머를 켰다.
삑.
“시작.”
당연하게도, 영원은 2시간 만에 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추가 3시간.”
삑.
3시간이 또 흘렀다.
또 다음 날.
“3시간만 더 해 볼게요.”
삑.
영원은 호흡을 참으며 집중했다.
전직 먼치킨, 현직 먼치킨으로서 승부욕에 활활 타올라 매진하게 만드는 트리거가 당겨졌다.
“심 가이드님. 앞으로 한 달 안에는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으세요?”
“아뇨.”
“그럼 두 달…….”
“2주.”
“…….”
“2주 안에 해볼게요.”
강화연은 그게 무리한 계획이 아닌 것처럼 수긍했다.
“그러세요.”
성실하고 똑똑한 스승은, 게으르고 똑똑한 제자를 어떻게 해야 심히 급발진하게 만들 수 있는지 아는 능력자였다.
심영원은 약속한 시간 내에 해낼 터였다.
화연도, 영원도 알았다.
***
“그레이.”
“…….”
“그레이?”
“……어. 이반.”
그레이 딘하우스는 소파에 기대 깊은 생각에 잠겨있다가,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한 명 찾아냈어. 비선별로 각성자가 된 것 같던데. 기기 돌려봐야 알겠지만, S급 나올 것 같아.”
“신상은?”
“열다섯. 동양인. 여자애야.”
“이름은?”
“하늘. 한국어를 번역하면 스카이. 그런 뜻이래.”
검은 피부의 노인이 그레이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넸다. 마르고 까무잡잡한 소녀가 웃고 있었다.
“한국?”
그레이는 얼마 전 다녀온 K의 국가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떠올렸다.
“비선별 러쉬 중 S급 첫 타자일 확률이 커. 조지나의 말에 따라도 그렇지.”
“이반.”
“응.”
“조지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레이는 이 자리에 없는 그의 전담 가이드를 언급하며, 소파에서 일어날 듯이 자세를 바꾸었다. 멀리 있던 구두가 날아와 양발에 끼워졌다.
그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무언가를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듯.
그러다가 천천히 일어나며 풀려있던 셔츠 단추를 몇 개 잠갔다.
“나는 알 수 있었어.”
“뭘?”
“조지나를 처음 봤을 때. 매칭률이 대단할 거라는 직감이 왔지. 느낌이 달랐거든.”
그레이 딘하우스와 조지나 스피넬의 매칭률은 77%.
S급 에스퍼와 S급 가이드의 조합으로는 가히 독보적이었다.
“어떠한 매칭률 테스트 없이도, 보자마자, 직감적으로.”
그런데 얼마 전, 그 순간보다 더 거센 파도에 덮쳐진 기분이었다.
뭐였을까.
어째서 그런 기분이었을까.
예뻐서?
그레이는 작게 웃었다. 확실히, K의 전담 가이드는 K가 화상으로 망가지기 이전만큼이나 생김새가 인형 같기는 했다.
“비슷하게, 아니, 더 강렬한 기분이었어.”
“뭐가?”
이반은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호선을 그린 그레이의 입술만 보았다.
“정말로 강렬한 느낌.”
그리고 그 가이드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연금술사?
그것도 그렇게나 강한 연금술사라니.
미래에 언젠가 다시 나타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던 대제大帝.
“K와 매칭률은 50%. 비디오 판독 결과는 그렇다고 했지.”
“……맞아.”
그레이는 업무용 데스크 앞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손에 턱을 괴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반. 가설이기는 한데, K의 가이드 말이야.”
“응.”
“K와의 매칭률이 높은 게 아니라, 의외로 낮은 걸 수도 있지 않아?”
“무슨 소리야.”
“K랑은 50%. 나머지 에스퍼들이랑은 80% 가까이.”
K는 원래 가이드들과의 극악의 매칭률을 자랑했다. 심영원 역시 ‘극악의 매칭률’의 예외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중에서 유독 낮은 게 50%인 거지.”
연금술사라면, 아마도 자신처럼 세계수에게 불려 이쪽 세계에 왔을 터였다.
예외 중의 예외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나랑은 얼마일까?”
즐거웠다.
망상일지도 모르는 생각이.
“요새 삶에 재미가 별로 없었어.”
보통 사람들이 아침에 일어나 카페인을 들이붓고 심장이 뛰는 걸 느끼기 시작할 때 이런 기분이려나.
카페인이 안 드는 몸을 가지고 있어 알 수 없었다.
“내가, 매칭률이 높은 가이드면 C급, D급을 가리지 않고 찾아내려고 얼마나 혈안이었는지 알지.”
그 흥미가 좀 가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가지고 싶어.”
무언가에 중독된 것처럼 손끝이 떨려왔다.
“영원은 이곳에서의 삶을 싫어하진 않을 거야.”
믿을 만한 정보원에 따르면, K의 가이드는 K의 펜트하우스에 자진해서 감금되려고 각종 기행을 벌였다고 했다.
요즘엔 다시 센터에 나와서 가이딩 훈련을 하지만, 매일매일 퇴근하고 싶어서 몸부림친다고.
“K의 펜트하우스보다, 여기가 넓잖아. 더 아름답고.”
그레이는 블라인드를 모두 걷어버리고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는 수평선을 눈에 담았다.
“더 호화롭고, 완벽한 새장.”
K는 그래 봐야,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극동의 반도에 사는 일개 공무원일 뿐이었다.
“얼마 만이더라.”
미소가 지워지질 않았다.
“내게 온전한 결정권이 없는 이런 기분.”
약간의 무력감이 충동을 키웠다. 작은 불길에 부채질하고, 기름을 콸콸 들이붓는 기분이 되었다.
“신선해. 좋아.”
그레이는 환히 웃었다.
“이런, 갈증에 허덕이는 상태를 언제까지 즐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짜증이 차오르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터였다.
그는 인내심이 풍족한 타입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빨리 가져야겠지.”
저번에 보았을 때는 따로 나누어둔 몸이 있어 많은 제약이 걸려 있었다.
다시 마주칠 때는 지금처럼 힘을 나누어 둔 상태여서는 안 된다.
모든 힘을 퍼붓지 않고서는 대적할 수 없는 상대일 테니.
떠나온 미래의 연금술사 대제.
영원.
심장이 뛰었다.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체감한 건 참 오랜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