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41화 (41/142)

제4장

세계수의 작명센스는 실화인가

20세기가 저물고 21세기가 시작될 무렵, 이곳 세계에는 E급 각성자들의 각성과 함께, ‘관리자’라는 존재가 나타났다.

그때의 선별은 지금처럼 체계적이지 않았다. 선별자들에게 제공되는 알림과 각종 인터페이스도 지금 같지 않았다.

E급 중에서도 능력이 약한 각성자들 중에는 자신이 ‘선별’되었다는 것, ‘각성’하였다는 것 모두를 인지하지 못하는 케이스도 종종 있었다.

세계수가 인간들과 소통하는 적절한 방법을 익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발전해갈 기회를 얻는 건,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행운은 아니었다.

【나는 ■■■다】

【때로는 감시자, 때로는 관리자】

【내게 선별된 그대들은】

【세계의 소멸을 막을 수 있을까】

2001년의 봄.

관리자는 처음으로 몇몇 각성자들에게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관리자의 이름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묵음의 이름 ■■■.

어떤 각성자는 자신에게 환청이 들린다며 정신병원으로 찾아갔고, 어떤 각성자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달콤한지를 설명했으며, 어떤 각성자는 그 목소리를 연구한 논문을 냈다.

■■■.

미치도록 달콤한 목소리를 낸다는 그, 혹은 그녀.

그 존재는 어떤 이들에게는 한동안 믿을 수 없는 심령과 같은 존재였다.

‘각성자들은 다 저렇게 정신병에 걸리게 되는 건가요?’

‘각성? 관리자? 초능력? 대체 이 지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는 존재의 이름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봉인이 해제되어야 한다고 했다.

【열쇠는 ‘게이트’】

【‘게이트’가 열려야 한다】

일부 각성자들은 관리자가 말하는 ‘게이트’의 개방을 염원했다.

[게이트, 개방]

그 ‘게이트’라는 것이 그들의 세계를 어떤 지옥과 연결할지 짐작도 못 한 채로.

[지구의 단일한 감시자, ■■■의 이름이 해방됩니다]

[행성 ‘지구’의 모든 필드의 관리자 ‘세계수’]

태양계 안에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연이어 알림이 갔다.

최초의 대규모 알림이었다.

그 순간에는 누구도 몰랐던, 지옥과 지구가 드디어 연결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

도롱.

[필드 ‘대한민국’ 개방]

미국.

도롱.

[The Field, ‘United States of America’ Opened]

중국.

도롱.

[場, ‘中华人民共和国’ 开放]

그 외의 모든 ‘필드’에 속한 이들의 눈앞에도 전부 알림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후 10시간 동안, 1천만 명의 숨이 멎었다.

그래 봐야 B급 게이트에 불과했던 ‘사천성 게이트’는 인류가 겪은 가장 끔찍한 사건 중 하나로 남았다.

도롱.

[필드 ‘대한민국’의 관리자 세계수가, 새로운 게이트가 무수히 생성될 것임을 경고합니다]

그리고 인류는 그 지옥이 끊임없이 반복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영원의 재출근 첫날.

영원은 기다리지 않았던 모닝콜을 받았다.

―영원! 오늘 출근한다면서요!

그 덕에 출근이 두 시간은 앞당겨진 기분이라 우울했으나, 오랜만에 듣는 윤 교수의 목소리가 어쩐지 정겹기도 해서, 묘했다.

‘윤 교수님은 각성자는 아닙니다.’

이상하게, 마침 박의총 가이드가 남긴 윤 교수에 대한 찬사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찾아올 각종 재난에 대한 대응책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한 분이시죠.’

‘가이딩 기기를 개발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박의총 가이드에게 들은, 그녀가 그동안 해온 고생도 연이어 떠올랐다.

‘출근 맨날 하면, 요련 언니까지 셋이서 밥도 먹고 그렇게 지내겠네.’

빠른 포기가 모토인 영원은 모든 걸 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교수님. 예, 예.”

―들었겠지만, 그레이 관련은 비밀이에요.

“네, 네. 전담님한테 전해 들었어요.”

―청와대 요청도 있고, 백악관에서 오늘 새벽에도 전화 넣었다고 하고. 여러 가지로 함구, 함구.

그레이 딘하우스와 김여현의 충돌은, 그 스케일이 정말로 대단했다. 눈치싸움에 끼어든 게 미국과 한국만도 아니었다.

그 덕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국 대통령들의 기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양이었다.

영원의 S급 힘, 연금술에 대해서는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닫기로 정했다. 그래서 충돌 외 추가 보고는 올라가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연금술의 존재가 알려지면 수면 밑에서 무슨 일이 또 일어날까.

물론 영원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않기로 했다.

“그것도 여현이한테 들었어요. 대통령 핫라인 따라 의사 교환됐고, 잘못 입 밖에 내면 국제분쟁 시작된다고.”

모든 관련 단체 및 기관들이, 일단은 그레이의 변절과 관련한 이슈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지 말자는 데에 동의했다.

어떤 대소란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그래요. 아무튼, 폭풍전야니까 같이 걱정하자고 전화한 것만은 아니고. 오랜만에 온다니까, 얼굴 한번 꼭 보자고 압박 넣을 겸 전화했어요!

“네에…….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출근.

기분 탓인지, 영원은 스스로가 뭔가 대단한 인기인이 된 것만 같았다.

‘너무나 많은 사람의 관심이 나에게로 향하는 느낌적인 느낌.’

일단 영원에게 제공된 개인 사무실에 다녀간 방문자부터가 너무 많았다.

요련이나 윤 교수는 물론 백율 부장, 이창결 부장 및 기타 부장님들, 강화연 가이드, 장제권 가이드 및 기타 이름도 다 기억 안 나는 실세들이 자그마한 사무실에 인사차 들렀다가 환영 선물을 놓고 사라졌다.

홍삼이랑 유산균, 비타민이 3년 치는 쌓인 듯했다.

‘여기 온 사람들 다 여기 본부 실세라고 들었는데.’

‘아무래도…… 루머인가?’

‘찐실세는 따로 있는 것인가? 대체 누구? 직책 있는 올 만한 사람들 다 왔는데?’

‘찐실세…… 믿을 수 없지만, 혹시 난가?’

영원은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는 사실을 떠올려내고는 순간 굳었다.

그러다가 구내식당에 들어가면서, 자신이 센터 근무자들 관심의 중심에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쏟아지는 시선.

갑자기 줄어드는 소음.

하나같이 느려지는 동작.

‘기분 탓 아닌 거 확실해.’

‘진짜 다들 눈 흰자로라도 나를 보고 있어.’

그리고 실상은 영원이 예상한 대로였다.

회갈색 머리칼의 바로 ‘그’ 가이드가 구내식당에 나타날 것이라는 뉴스가 퍼지자, 구내식당(오늘 점심: 메마른 북어찜)이 거의 인☆ 핫플만큼 웨이팅이 걸리는 장소가 됐다.

세계 최강 S급 물리계 에스퍼 김여현, ‘영원의 헌신자’와 매칭률 50% 이상.

그 이름도 찬란한 ‘영원’.

기계 가이딩을 고집하던 김여현을 영원이 바꿔놓았다.

센터 밖에서는 함구해도, 안에서는 모두가 알고 있던 오랜 숙제를 그녀가 끝낸 것이다.

난데없는 등장과 함께 쓰인, 대한민국을 재난에서 구해낸 서사.

빙하 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에스퍼의 품에 안겨 공중을 날아다니는 관계성.

차가워 보이는 외형이나, 김여현의 곁에서는 온도가 올라가는 것만 같아, 마음을 선덕하게 만드는 비주얼.

그에 더해, 백율 및 이창결 부장(주: 직책상 매우 진중해야 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음)에게서 시작된 루머 아닌 루머가 센터 근무자들 모두를 구내식당에 모이게 만들어 버렸다.

“오늘 주메뉴인 북어가 동났습니다.”

“네? 반찬 없어요?”

그 결과 반찬을 잃은 영원의 눈이 크게 뜨이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발생했다.

“좀 있으면 내일 메뉴 튀겨져 나오니 조금만 기다리셔요.”

다행히도, 영원은 얼떨결에 내일 메뉴인 치킨 너겟을 받는 이득을 누리게 됐다.

갑자기 나타난 최애와 함께 시간을 보낼 핵이득은 덤이었다.

달그락. 푹. 냠.

“맛있으세요?”

“응, 응.”

“……많이 드세요.”

관심의 중심에 있든 아니든, 영원은 그냥 오늘의 치킨 너겟에 집중하기로 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이 자신에게 관심이 많은지 알아서 나아지거나 나빠질 것도 없을 듯했다.

“어…… 근데 여현아, 네가 만들어주는 게 더 맛있을 것 같아.”

영원은 점심을 먹으며 소소한 대화나 가볍게 이어갔다.

“나중에 해드릴게요.”

그러면서 영원은 어쩐지 평생 갖고 싶지 않았던 출근 장소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물론 그런 생각은 2분 만에 사라졌다.

‘아무리 그래도 무명의 노출근 펜트하우스 붙박이에 비할 수는 없지.’

‘당장 출근의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하아.’

영원은 오후부터 줄줄이 잡힌 일정을 떠올렸다.

무엇도 피하거나 미룰 수 없다.

이제부터는 매일매일 적에 대해 학습하고, 가이딩을 갈고 닦는 일에 매진해야만 했다.

연금술만으로 그레이에게 대적하는 전략은 개인 대 개인의 싸움이라면 괜찮은 방법일 수도 있지만, 여현이 끼면 얘기가 달랐다.

여현은 에스퍼였다.

가이드의 가이딩이 필요한 에스퍼.

그러니 가이딩을 해야만 했다.

‘천재도 정보와 학습은 필요해.’

‘우선은 가이딩, 그리고 그레이에 대해서도.’

그레이의 정체에 대한 가설은 있었다.

‘역사 속의 연금술사.’

그 이름도 유명한, 회灰(재 회; 재, 재로 만들다, 태워버리다, 망하다).

영원은 ‘그레이’라는 이름의 연금술사는 몰랐지만, ‘회’라는 과거의 유명인은 알았다.

‘회’를 회색灰色으로 해석한 게 ‘그레이’라면 그 이름이 이해가 갔다.

과거엔 서양인의 외양이 아니었겠지만, 차원 이동을 하고 긴 시간을 넘었는데 생긴 게 조금 바뀐들 뭐 그리 대수일까.

어쨌거나, 가설이 맞는다면 그는 과거의 대제였다.

현재는 세계수가 인정한 정점의 에스퍼고.

그 이름도 대단한 ‘유일자.’

‘그렇다고 뭐.’

‘이름으로 싸우나.’

그가 앞으로 내보일 능력이 두렵진 않았다.

역사 속에서 영원 자신보다 강한 연금술사는 없었고, 상대는 강해 봐야 S급 에스퍼의 능력만 붙인 것일 뿐이니까.

영원은 긍정 회로를 팽팽 돌렸다.

‘할 수 있다.’

‘아자!’

영원이 그리 생각하며 쌀밥을 크게 퍼서 입에 넣을 때.

그 근처 테이블에서는 공무원들끼리 서로 속닥거리며 싸우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 드셨으면 일어나시죠?”

“아, 그게…….”

“다 드셨잖아요.”

“꼭 음식을 먹는 사람만 앉아 있으라는 법 있나요?”

여현과 영원을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 앉고 싶었던 공무원 하나는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공무원의 논리를 반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가이드’ 앞에 앉아 무엇도 먹고 있지 않은 어떤 에스퍼 때문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식판조차 없이 앞에 앉아 있는 에스퍼, 김여현.

그는 역삼 본부에 출근한 이래 처음으로 구내식당에 발을 들였다.

그 덕에 순전히 호기심에 영원의 얼굴을 보러 왔던 이들까지 완전히 발이 묶였다.

김여현은, 그 이름만으로도 센터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에게 울림을 주는 영웅이었다.

김여현과 심영원이 함께 담긴 장면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림 같았고, 두 사람 모두가 편안해 보였다.

김여현 앞에서 음식을 먹게 하면 누구라도 체할 것 같은데, 심영원 가이드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기색으로 야무지게 소스에 푹푹 찍어 치킨 너겟을 맛있게도 먹고 있었다.

‘저분이…….’

‘그 소문의…….’

‘제 너겟도 드릴 수 있는데…….’

그렇게 복귀 후 첫 점심시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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