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현은 지난 며칠 동안의 기억을 되짚었다.
영원이 납치당했다는 연락을 받던 순간부터.
집에 도착한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도착한 순간의 기억만은 선명했다.
여현은 펜트하우스에 들어서며,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기를 바랐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집.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마음에 평안을 주던 그 풍경이, 극도의 공포를 안겼다.
낯선 공포.
자신에게는 너무나 익숙하지 않았던 감정. 10여 년분의 공포가 한 번에 쏟아지는 듯했다.
영원이 납치당할 수도 있다고 미리 들었지만, 사건이 벌어지는 순간 막아낼 계획이었다.
그런데 망가졌다.
시작도 하지 못한 계획이.
싸아.
밖에서는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 빗소리가 유독 크게 들리는 건 2층의 통유리가 전부 박살 났기 때문이었다.
툭. 투두둑.
여현은 유리창 앞으로 갔다. 깨진 유리조각들이 구두에 밟혀 더 잘게 부서졌다.
“추적.”
가이딩 밴드에 등록해놓은 명령에도 기기는 반응하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반응하지 못했다.
영원에게 해당 기능을 활성화해두라는 말을 용기 내어 뱉지 못한 것을, 이렇게 후회할 줄 알았다면.
어디서든 나 역시 당신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달라고 조심히 말을 꺼내고, 애원이라도 했을 텐데.
비이성적인 생각이 두뇌를 지배했다.
절망인지 분노인지, 정확하게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미세한 떨림이 진정되지 않았다.
―시흥IC, 시흥IC 근처가 아닌가 합니다!
―센터 인원 출동하였습니다!
영원이 들어가 있을 던전의 위치가 파악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앞까지 달려간 과정은 띄엄띄엄 기억난다.
던전 입구를 알리지 않으려는 그레이 딘하우스의 추종자들에게, 평소보다 잔인한 짓을 했다.
‘아악!’
그들의 비명이 조금도 안타깝지 않았다.
무엇이든 부수어버리고 싶다는 생각과, 그 무엇도 중요치 않으니 지금 필요한 사람과 마주하게 해 달라는 바람이 한데 섞여 머릿속이 완전히 엉망이었다.
가이드를 잃은 에스퍼들이 저질렀던 미친 행태가 전부 이해 갔다.
가이드 하나 때문에 그런 미친 짓을 저지르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미친 짓이 거기서 끝났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어떻게 고작 그 수준에서 멈출 수 있었던 걸까.
그 에스퍼들의 인내심과 자기 절제 능력이 역으로 놀라워졌다.
사실은, 냉장고에 죽을 넣고 펜트하우스를 나설 때까지만 해도 의심하고 있었다.
심영원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거지.
그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A급, S급, 혹은 그 이상?
언제쯤 이 관계에 확신을 가지게 될까.
그녀에게 의지해도 되는 것일까.
심영원 가이드는 그 어떤 질문에도 답을 주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어쩌면 언젠가 그녀를 자신 스스로 놓아버려야만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기계 가이딩으로 돌아가야만 할지도 모르겠다고.
낯선 인간을 함부로 믿을 수 없으니까.
심영원을 믿을 수 없다면, 포기해야 할 거라고.
완전히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그녀가 사라졌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이 그녀를 놓쳐버린 걸 깨달은 순간. 그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는지 깨달았다.
콰과광!
던전에 들어서서는 화풀이하듯, 효율도 생각지 않고 힘을 퍼부어댔다.
이럴 일인가.
정말,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인가.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도 평정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로 끔찍한 끝에 닿을지 모르니까.
‘살아 있어.’
‘살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어.’
‘다시 만날 수 있어.’
‘다시 품에 안을 수 있어.’
여현은 부정적인 생각을 덜어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가만히 앉아, 그를 올려보는 영원의 얼굴을 마주하는 그 순간까지, 여현은 정말로 필사적이었다.
그 무미건조한 시선, 약간의 미소에 얼마나 안심했는지, 그녀는 절대로 모를 것이다.
‘여현아.’
그 순간엔 이름이 특별해진다.
세계수가 그에게 부여한 이명은 어쩌면, 그녀와의 만남을 예정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괴이한 망상이 피어오른다.
‘괜찮아.’
차가우면서도 다정한 분위기, 말투, 표정, 몸짓, 목소리, 시선, 행동, 호흡, 그 모든 게, 너무나 큰 의미가 됐다.
그제야 다시 사고가 천천히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성이 겨우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동시에 진정한 이성은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라 직감하게 됐다.
세상에 대한 일방적인 헌신에 다소 지쳐가고 있다고도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도 완전히 저물었다.
세계를 구하는 것이, 자신을 지치게 할 리가 없다. 같은 의지를 공유한다는 걸 알겠으니까.
그래서 더, 여현은 다시 그녀가 빈 옆자리를, 자신이 견딜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다시.
끔찍한 일이 다시금 벌어졌다.
여현은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고, 그녀는 완전히 낯선 존재가 되어, 그의 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있는 것밖에는.
그즈음이었다.
지직.
여현이 분노에 차 공간을 왜곡시키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이 의지만으로도 시공간 자체를 뒤엎을 수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전에는 쓸 수 없던 수준의 힘이었다.
동시에.
도롱.
[김여현, 오픈 타이틀 ‘영원의 헌신자’]
[김여현, 히든 타이틀 ‘영원의 감옥’]
[2단계 등급 상승, SSS급 등급 상승 조건을 오픈하시겠습니까? Y/N]
감정의 격동은 그가 가졌던 힘의 벽을 한 단계 허물었다.
그럼에도 격동은 잦아들지 않았다.
영원이 다시 그를 찾는 순간까지.
[나]
[살아있어]
[괜찮아]
[걱정 마]
영원히 정지해 있을 것만 같던 여현의 시간은 영원이 보낸 문자로 다시 시작되었다.
여현은 더는 그녀가 없던 시간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집]
[2층]
[피곤]
[ㅠㅅㅠ]
[먼저 잠]
[일찍 일날ㄱㅓㅣ]
[낼바]
그리고 다시는 어디에도 그녀를 보내지 않기로 했다.
이성을 초월한 의지가 여현의 인식세계를 덮었다.
이 판단과 생각이 논리적인지는 조금도 중요치 않았다.
그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절대.
그러니 이런 식으로 떨어지게 두는 일은 두 번 다시는 없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의 숨이 먼저 멎게 되더라도.
툭.
여현은 영원의 침실 방문에 기대어 잠든 그녀를 바라보았다.
새근새근.
미약한 숨소리에 집중했다. 조금 더 작게 들려오는 심장의 고동 소리에도.
영원.
그 이름을 운명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때엔 억지로 세계를 뒤집어엎어서라도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다.
***
다시 아침.
짹. 짹.
영원은 자기 전에 고민을 하다 맞추어 두었던 새소리 알람을 힘겹게 껐다.
“으…….”
‘내가 웬일로 알람을……. 아.’
여현의 기상시간에 맞추어 대화를 해 보려고 설정해 둔 것이었다.
집에 와서 여현을 기다리고 싶기도 했지만, 그를 마주하기가 약간은 두려웠다.
반지의 제왕 1인 플레이를 한 덕에 너무 피곤해서 일단 자야겠다 싶기도 했고.
그런데 또 무작정 자버리기엔 여현을 걱정시킨 게 신경 쓰이기도 해서.
무작정 잠들지는 말자며 알람이라도 맞춰 두었다.
미적거리던 행동이 정지했다.
어제 자기 전에 느꼈던 기분이 잠깐 일시 정지되어 있었다가 다시 재생되었다.
그래도 영원은 바로 침대를 벗어나진 못했다.
꾸물꾸물.
잠시 후 1층에서 여현이 부엌을 오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영원은 힘을 내어 상체를 일으켰다.
좀비같이 양치를 하고, 대강 세수를 마친 뒤에 계단을 타박타박 내려갔을 때엔, 아침 식사를 반쯤 차린 여현이 영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질페스토 치킨 치즈 파니니. 고소한 냄새가 짙게 났다.
“일어나셨어요.”
여현의 인사는 평소만큼 다정했다.
“으응……. 좋은 아침.”
“네. 좋은 아침.”
영원은 일단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주말이라 출근 안 하지?”
“네. 오늘은요.”
청포도 스무디가 앞에 놓였다. 영원은 잔을 두 손으로 집어 빨대로 한 모금 마셨다.
‘맛있…….’
‘이런 아침 넘나 그리웠어.’
“샐러드 드레싱은, 어떻게 드릴까요?”
“음…… 랜치?”
여현은 알았다며 뒤돌았다. 달칵. 냉장고 문이 열리고, 여현이 드레싱 병을 꺼내 들었다.
영원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여현의 넓은 등을 보며 잠시 말을 골랐다.
그리고는 스무디가 든 유리잔을 아일랜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달칵.
“여현아, 우리.”
“네.”
“얘기를 좀, 해야겠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더는 피할 수 없었다.
그래야 182개나 득해버린 S급 던전석 몇 개를 사용해 여현을 치료할 수 있을 테고, 여현이 그녀를 볼 때마다 피어오를 불신도 해소할 수 있을 터였다.
아닌 듯해도, 그동안 이 관계는 공중정원처럼 기초 없는 곳 위에 지어져 있었다.
여현은 샐러드 위에 드레싱을 다 올린 뒤, 뒤돌았다.
둘은 잠시 그렇게 시선을 교환했다.
“가이드님.”
“응.”
달칵.
알록달록한 샐러드를 담은 볼이 앞에 놓였다.
“우선 드세요.”
“…….”
“그리고, 모든 걸 설명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여현은 영원의 앞으로 파니니가 든 접시를 밀어주고, 앞에 앉았다.
“이야기를 하다가도, 천천히 쉬어가셔도 돼요.”
모두 영원이 필요로 했던 말이었다.
“대신, 곁에 계셔야 해요.”
이것까지도.
“다른 곳에 가실 수는 없어요.”
톡. 톡톡.
여현은 영원의 가이딩 밴드에 손을 뻗어, 영원으로 하여금 수많은 기능을 스스로 실행하도록 만들었다.
족쇄가 하나둘 생겨나는 중이었다.
이제, 어딜 가든 여현은 영원의 위치를 알 터였다.
신체 컨디션도 알고, 원한다면 음성을 곧장 연결할 수도 있을 터였다.
영원의 아무런 동의 없이도.
“함부로 사용하진 않을게요.”
“응.”
“혹시라도 괜찮지 않다고 하시면…….”
“괜찮아.”
지금 괜찮고, 앞으로도 계속 괜찮을 터였다.
“함부로 쓰지 않겠다고 했잖아. 그럴 거 알아.”
“…….”
“믿어.”
한번 웃어 보인 영원은 맛있는 파니니를 썰어 먹었다.
“맛있다…….”
영원은 여느 아침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반응했다. 그를 바라보는 여현도 평소와 같은 표정이었다.
영원은 안심했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 같아.’
실제로 바뀐 것이 많지만,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다.
잠들기 전, 영원은 실은 많은 걱정을 했다.
이 관계가 변화할까, 무언가가 망가질까, 그는 나를 이용하려 하려나.
나는 또 나도 모르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에게 벽을 쌓게 만들었을까.
하지만 믿을 수 없이 편안했다.
잠들기 전 밤,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 했던 무수한 걱정이 모두 우스워질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