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은 회갈색 눈과, 짙은 푸른 눈의 시선이 맞닿았다.
“네가 받아들여야 하는 제안을 내가 말해줄게.”
“…….”
“조건 하나. 헛소리 멈춘다. 조건 둘. 사과한다. 조건 셋. 죽는다.”
눈높이는 영원 쪽이 낮은데도, 오히려 그녀가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가이드ㄴ…….”
“여현아. 가만히 있어도 돼.”
영원은 여현의 제지를 넘어섰다.
난 괜찮아.
영원은 작게 속삭이며 여현의 팔을 잠시 잡았다가 놓았다.
타인에게 다정한 태도는 거기까지였다.
다시 그레이를 향하는 눈길과 목소리에는 싸늘한 날이 섰다.
“누가 양보하는 걸까?”
방금, 그레이가 한숨을 쉬고는 여현에게 던진 것과 같은 질문이었다.
“이쪽에도 스피넬을 죽일 기회가 수만 번은 있었어.”
영원에게도 있었고, 여현에게도 있었으며, 백율이나 이창결에게도 있었다.
“선량한 사람들이 너그러운 아량을 베풀어 준 거야. 감사할 줄 알아야지.”
조지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레이의 수하인 A급 에스퍼 둘, S급 에스퍼도 둘.
여현과 다른 센터의 각성자들은 그들을 모두 기절시켰을 뿐 죽이지 않았다.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에 반해 그레이는 센터의 각성자 모두를 고민 없이 죽였다. 너무나 쉽게.
센터의 A급 각성자들은 그에게 먼저 덤벼들지도 않았을 텐데.
명찰 다발이 땅으로 투두둑 쏟아졌을 때, 영원은 누군가는 칼을 빼 들어 저 오만한 놈을 교육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감정적인 충동만으로 내린 결정도 아니었다.
영원이 그동안 거쳐 온 시간에 대한 기억이, 그래야만 한다고 충고했다.
‘저 녀석은 가만히 두면 여태까지 죽인 것과는 비할 수 없이 많은 사람을 죽일 거야.’
더 많은 피해자가 생겨나기 전에 사라지게 만들어야 했다.
‘알아서 변할 거라고, 바뀔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건 도움이 안 돼.’
정의구현은 셀프다.
신이나 다른 어떤 존재가 대신 엄벌해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직접 해줄 생각이었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양보는 이쪽이 하고 있잖아.”
영원은 랭킹 1위를 마주하고서도 긴장한 기색 하나 없었다.
차가운 어조로 연이어 뱉어낸 말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잠깐 동안 그녀의 행동에 위화감을 느낀 사람이 누구도 없을 정도로.
“…….”
“…….”
그레이는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영원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갑자기 청력을 상실했나?”
“…….”
“뭐, 상관은 없어. 네 대답에 따라 달라질 것도 아니니까.”
사락.
영원만이 감각할 수 있는 연금의 힘이 요동쳤다.
영원은 이미 한계까지 뻗어 나간 레이더의 민감도를 계속하여 높여갔다.
센터 사람들 앞에서 다른 차원의 힘을 쓰는 건 계획에 없었지만, 이미 상당 부분 망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멈추지 않기로 했다.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게다가 무개연성 급발진 사이다가 주는 쾌감이 또 있지.’
기왕 이렇게 된 거, 하고 싶은 참교육이라도 제대로 해야 했다.
사악.
영원은 이 던전 최하부에서 그녀가 손댈 수 있는 원소들을 모두 파악해냈다.
조금 전 싱크로율 100%에 이른 뒤 몸을 풀면서 이것저것 시도해 본 터라 모든 게 익숙하고 편안했다.
“내가 친히 양보해서.”
그래도 신중할 필요가 있으니 말을 몇 마디 덧붙이며 전략을 구체화했다.
“고문 같은 거 없이 죽여주는 데 감사나 해.”
콰광.
쏴아아-
저 멀리서 갑자기 벼락이 치며 산성비가 내렸다. 거대한 먹구름이 서서히 다가왔다.
비에 닿아 녹아내릴 것을 걱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어차피 S급 던전의 환경 자체는 이곳의 누구에게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나를.”
그레이는 묘한 눈길로 영원의 손끝을 봤다.
“죽인다고.”
이후엔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하하.
영원은 표정 하나 없이 그와의 거리를 쟀다.
그레이가 사용할 능력을 짐작하고, 그에 대처할 수천 개의 경우의 수를 그리는 데만 집중했다.
그런데.
“다음에.”
콰광.
산성비를 머금은 구름이 더 가까이 왔다.
“S급 던전 한두 개쯤이야 다른 데에서 금방 또 열리겠지.”
그가 바로 자리를 뜰 거라는 건 예상치 못했다.
“또 봐.”
그렇게 그레이는 인사를 건네고 사라지려 했다.
“K. 그리고…….”
영원은 당황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방금 생각했듯이, 인생은 원래 계획대로 되지 않으니까.
예기치 못한 상황이 닥치면, 적절한 새로운 대응법을 찾아내면 된다.
“아니.”
탁.
도망치려는 놈은 붙잡으면 된다.
“안 보내.”
“어…….”
영원이 순식간에 그레이의 앞에 다가섰다.
그레이, 여현, 그 외 모두의 반응속도는 영원보다 한참이나 늦었다.
심지어는 알림마저도.
도롱.
[목표달성▶ 48시간 내 심영원 5m 근처로 접근]
[제9 목표 달성자, 그레이 딘하우스, 타이틀 ‘유일자’]
알람이 제대로 완성되기도 전에 영원의 힘이 그의 목에 닿았다.
푹.
반항할 틈 없이 그레이의 동맥을 향해 무형의 힘이 꽂혔다.
과거에는 생명을 저물게 하는 일 앞에서 항상 망설였다.
그리고 얻은 깨달음은, 생명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상대가 아니라 이쪽뿐이었다는 것.
‘감정을 지닌 사람일 거라 기대하는 실수, 다신 안 해.’
그레이 딘하우스도 마찬가지다.
그가 거둔 생명을 생각하면, 망설이지 말아야 했다.
“또 볼 일 없어.”
그 속삭임과 함께.
생명줄을 완전히 끊기 전에 방어막에 가로막혔지만, 조금도 빗나가지 않은 공격은 큰 타격을 남겼다.
“욱.”
대제의 힘을 곧장 보이는 건 부담이었다.
그래도 숙련되지도 않은 SSS급 가이드의 힘을 어설프게 사용하는 것보다야, 10년이 넘도록 갈고닦아온 능력을 쓰는 게 나았다.
게다가 각성자들의 특성에 대해서는 그레이가 더 전문가일 테니까. 미지의 위험은 감수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귀찮게 센터에 끌려다니며 이 힘을 소명하는 것보다, 그레이 딘하우스가 앞으로 벌이는 일을 막으러 다니는 게 천만 배쯤은 더 고생하는 길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여러모로 이렇게 끝내는 게 이득이야.’
쾅!
콰곽.
영원은 그레이의 퇴로나 반항을 차단하기 위해 발을 디딘 땅을 둘만이 갇힌 감옥으로 만들었다.
콰과곽.
감옥은 순식간에 견고한 형태를 갖추었다.
이 공간을 조성한 건 여현을 비롯한 센터의 각성자들을 그레이와의 싸움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필요 이상으로 나를 걱정할 테니까.’
그래서 감옥을 만드는 과정에 여현이 개입하려 하자, 영원은 그를 직접 끊어냈다.
‘미안, 당장은 도움이 안 될 것 같아.’
그레이는 그 찰나에 감옥 저편으로 몸을 이동시켰다.
퍽.
그 과정이 순탄치 않아, 그의 등과 감옥 한쪽 벽면이 거세게 충돌했다.
“욱.”
그레이가 각혈했다.
후두둑.
뱉어낸 피가 땅에 거칠게 떨어졌다.
“으.”
명색이 랭킹 1위니까, 영원은 약간의 수고쯤은 더 들이기로 했다.
그렇더라도 상황 종료까지 5분이면 넉넉했다.
퍼벅.
다시 거리가 좁혀졌다. 영원은 다시 유사한 공격을 하기 위해 치고 들어갔다.
그레이가 딛고 선 땅을 흔들고, 그의 주변의 공기를 짓누르면서.
퍽.
그레이는 에스퍼의 힘을 사용해 등 뒤의 감옥을 허물고자 했으나, 그의 ‘의지’가 가로막혔다.
“네 능력, 못 쓸걸.”
그런 방식은 심영원에게는 씨알도 안 먹힌다.
퍽.
“읍.”
그레이의 몸이 땅에 패대기쳐졌다.
그래 봐야 SSS급 가이드 앞의 S급 에스퍼니까.
“으윽.”
영원은 가이드의 힘으로 에스퍼의 고유 능력을 통제하는 방법에 관한 수업을 받았다. 게이트에서 의식을 잃은 뒤 깨어나기 전까지 꿈속에서.
가이드의 힘으로 에스퍼를 공격하는 게 어디까지 가능한지 잘 몰라도, 통제에 관해서는 꽤 자신 있었다.
그레이가 ‘의지 구현’을 사용하려 할 때, SSS급 가이드의 힘으로 그를 통제하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에 대한 대응 시나리오는 수천, 수만 개였다.
영원은 가차 없이 다시 대제의 힘을 꺼내들었다.
이제 정말로 끝이었다.
이 이상 말을 주고받을 만큼 각별한 관계는 조금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직.
그레이가 영원의 통제 속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작게나마 무언가를 구현해냈다.
의지도 아니고, 에스퍼의 다른 능력에 의한 것도 아닌 무언가를.
‘……?’
영원의 의문이 그녀를 잠시 고민에 빠뜨렸다.
그사이 그레이는 영원의 감옥에 미세한 틈을 내, 감옥 밖에 있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순식간에 죽였다.
영원이 아니라, 자기 편 사람들을.
그들은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순식간에 쓰러졌다.
‘뭐…….’
영원은 레이더를 통해 대량 살생의 현장을 파악했지만, 그 이유는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도로롱.
도롱.
알림이 연속해서 그녀에게 도달하기 전까지만.
[던전 내, 심영원의 5m 내에 접근했던 목표 달성자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시간제한 미도과 상태 종료]
[메인 이벤트가 게시됩니다]
[보스, ‘볼케이노’ 소환 개시]
도롱.
[보스, ‘볼케이노’와의 결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Y/N]
그레이는 그가 만들어낼 수 있는 영원의 유일한 틈을 찾아낸 것이다.
영원이 무언가를 선택하는 데에 써야 하는 시간.
그는 영원이 이 던전의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을 거라 판단했다.
전략은 유효했다.
[보스, ‘볼케이노’와의 결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Y/N]
알림이 사라진 다음, 영원의 앞은 허공이었다.
그레이 딘하우스가 사라졌다.
보이는 것도, 느껴지는 것도 없었다.
‘…….’
‘당했나.’
사락.
레이더를 더 넓게 확장해도 찾는 대상이 없었다.
조지나도 함께 데리고 나갔는지 그녀 역시 레이더에 잡히지 않았다.
S급 에스퍼 둘도 이곳에 없었다. 다만, 그 옆에 함께 기절해 있던 A급 에스퍼 둘은 시체가 된 채였고,
등급으로 구획한 철저한 차별인 듯했다.
“…….”
영원은 그레이가 토해낸 피가 흩뿌려진 바닥을 보았다.
허를 찔렸다는 걸 조금도 부정할 수 없었다.
영원은 받아들였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빠르게 인정할수록 유익하니까.
‘실수를 안 할 수야 없지.’
‘똑같은 실수를 다시 하지 않으면 돼.’
자책까지 빠르게 걷어낸 영원은 그레이가 남기고 간 피의 흔적에 힘을 뻗쳤다.
에스퍼의 힘이 아닌 다른 힘.
이전에 직접 겪어본 적은 없는 힘.
그러나 또, 익숙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사락.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 하나 더 있는 게, 그리 놀랄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이방인이야.’
그것도, 정확한 정체를 알 수 없는 데다가 거북한 힘을 가지기까진 한 이방인.
그레이 딘하우스.
알려진 것의 몇 배는 되는 삶의 기억을 가진 존재일 수 있다.
마치 영원 자신과 같이, 그는 각성자들의 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힘을 품고 있었다.
‘이쪽 세계에서 태어난 인물이 절대로 아냐.’
그의 힘을 돌이킬수록, 확신은 짙어졌다.
그리고 짐작건대, 그레이 딘하우스 역시, 같은 확신을 품은 표정이었다.
그는 회갈색의 눈을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읽어내려 하고 있었다.
쩌저적.
그리고 영원 자신이 창조했던 감옥의 벽이 허물어졌다.
[보스, ‘볼케이노’ 소환 완료]
이 던전의 시스템은 영원에게 그녀가 조용히 사색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했다.
콰광!
감옥의 천장이 사라졌다.
쏴아아-
보글보글.
첨벙.
동시에 영원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끓는 빗물 속으로 빠졌다.
‘미친…….’
“읍!”
【대화를 하지】
이방인에 이어, 예측 못 한 짓을 벌인 건 관리자였다.
【가이드의 희생 없이도】
【시련을 끝내줄 테니까】
쿠궁.
지층의 요동에 따라, 영원은 더 깊은 지하로 빨려 들어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더 깊이 들어갔다.
영원에게 관리자의 초대를 거부할 방법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