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 딘하우스.
그가 선별된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세계 에스퍼 S급 10위권 랭킹이 변동합니다]
[에스퍼 그레이 딘하우스, 타이틀 ‘유일자’]
[세계 에스퍼 랭킹 S급 1위/32인]
그 이름도 성스러운 ‘유일자’.
그의 존재가 처음 세계에 알려졌을 때, 그를 인류의 메시아로 여기는 세력이 대륙 곳곳에서 우후죽순처럼 자라났다.
‘저는 신이 아니라 세계수에게 선별되었습니다.’
‘저는 당신들에 비해 그리 특별하지 않습니다.’
‘저는 평화와 사랑만을 바랍니다.’
‘제 존재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 광기에 물들진 마십시오.’
아름다운 소년은 마이크를 잡고 그렇게 말했다.
그림 같은 외모, 특히 사람을 홀리는 벽안, 곧은 시선, 감미로운 음색, 다정한 표정, 성숙한 분위기.
대중은 그가 인류를 재앙에서 구해낼 거라는 믿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레이는 저 ‘게이트’라는 정체불명의 재난에서 인류를 구해낼 거라고.
[세계 에스퍼 랭킹 S급 1위/47인]
[세계 에스퍼 랭킹 S급 1위/68인]
[세계 에스퍼 랭킹 S급 1위/81인]
[세계 에스퍼 랭킹 S급 1위/94인]
십수 년간 그의 왕좌가 탈환된 적은 없다.
그리고 그 기간 내내 그레이는 누가 봐도 이보다 모범적인 답변이 없을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미국 연방정부도, 바티칸도, 어느 국가나 단체, 각종 거대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카메라 앞에 선 그레이 딘하우스는 놀랍도록 빈틈없이 완벽했다.
올바름의 교과서.
정의의 교본.
그레이 딘하우스가 오랜 기간 보인 행보는 항상 그러했다.
하지만 정말로 모두가 그의 매력에 빠져 허우적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장막 뒤편에서 유력가들은 극과 극의 평가를 했다.
‘그가 랭킹 1위라 다행이야.’
누군가는 그가 실제로도 뼛속까지 천사라고 주장했고.
‘저놈 옆에서 벌어지는 일, 그 그림자에 가려진 미친 새X들이 얼마나 제정신이 아닌지를 제발 보아 주세요!’
누군가는 그가 완벽한 통제력을 지닌 악마라고 호소했다.
여현을 비롯한 센터 일원들의 평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후자 쪽으로 기울었다.
천사의 모습을 한 악마.
이곳에 나타난 그 악마는, 천사의 탈을 쓸 의지도 잃어버린 듯했다.
“일단, 축하해.”
그렇지 않으면, 피에 젖은 옷을 저렇게 당당히 입고 나타나 웃는 표정을 할 리가 없었다.
“50%가 넘는 전담을 찾았다며.”
“…….”
“지금 등 뒤에 숨긴 거지?”
그는 조금도 선한 인간인 척 연기하지 않았다.
“왜, 내가 죽이거나 빼앗아갈까 봐 겁나?”
톡. 톡.
그의 양팔에서 흐르는 붉은 선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 여기 니들 뺀 동양인들은 오는 길에 보일 때마다 처리했어.”
그는 센터 소속 각성자 정복에서 뜯어낸 명찰 몇 개를 쥔 손을 들어 보였다.
“남김없이.”
투두둑.
“거슬려서.”
그가 던지듯 손에서 놓아버린 명찰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졌다.
“아무튼.”
“…….”
“내가 인사를 했는데, 답도 없이 가만히만 있을 거야?”
영원은 땅에 흩뿌려진 8개의 명찰에 적힌 A급 에스퍼, A급 가이드의 이름을 읽었다.
차근차근히, 한 글자 한 글자 곱씹으면서.
‘…….’
얼굴이 떠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얼굴이 기억난 두 사람도, 어떤 접점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센터를 오가다가, 구내식당 같은 곳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 그들이 요련에게 인사를 건넸던 기억이 있을 뿐.
그러나 마음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스륵.
영원의 어깨를 덮고 있던 담요가 옆으로 치워졌다.
파직.
그레이와 여현의 중간쯤에 있는 지층에 균열이 생긴 것과 동시였다.
여현과 그레이의 힘의 영역이 충돌하여 일어난 반응이었다.
쩌적.
눅눅했던 우림의 땅이 순식간에 메말라 그 사이에 한 뼘 정도의 틈을 냈다.
“그래, 뭐.”
그레이는 그 틈을 보고는 말했다.
“내 X대로 살기 시작하면 다들 나를 그런 표정으로 볼 거라고는 생각했지.”
그레이는 여현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것이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듯이, 조금 더 여현의 가까이로 다가섰다.
사박.
“나쁘지 않아.”
“…….”
“어쩐지 즐거운 것 같기도 하고. 이런 게 해방감일까.”
“…….”
“이제 모두가 더 나를 제대로 두려워할 때가 되었는데. 그렇지, K?”
사륵. 파지직.
끼익.
그레이의 눈길에 따라 주변부의 모든 식물이 급격하게 성장했다가 썩어 문드러졌다.
물리계 에스퍼는 모두가 염력을 주특기로 사용해 개개인의 고유성은 크지 않다.
반면에 환상계 에스퍼들은 각자 특별한 능력이 한두 개씩 있었다.
그레이 딘하우스의 주특기는, ‘생각만으로도 이루어지는 의지의 구현’.
그 힘은 생生과 성장에까지 미친다고 알려졌다. 널리 알려진 정보는 사실이었다.
그야말로 사기 중의 사기.
S급 환상계 에스퍼들은 그 힘을 구현하기 위해 특별한 무기나 매개체가 필요한 경우가 많았다.
지하에 갇힌 S급 환상계 에스퍼 둘에게 소환해낸 총이나 화살이 필요했던 것처럼.
그것은 ‘유일자’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는 얘기였다.
밸런스 따위 고려치 않고 부여된 능력.
선천적인 것도, 후천적인 것도, 그와 비견되는 에스퍼는 없었다.
적어도 김여현에게 전담 백업 가이드가 붙지 않았던 때까지는.
파직.
그레이와 여현의 중간쯤에 있는 지층에 더 깊은 균열이 생겼다. 그대로 대치상태가 유지됐다.
“…….”
정적을 깬 건 여현의 옆에 서 있던 이창결이었다.
“이제, 사람들에게 천사로 보여야 할 필요는 사라진 건가?”
그레이의 시선이 이창결에게로 옮겨갔다.
그레이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우선 웃었다.
그는 손을 올려 화사한 백금발을 쓸어 넘겼다. 가는 머리칼이 흐트러지고, 고아한 분위기가 그를 둘러쌌다.
“그래.”
푸른 눈은 이창결에게 향했지만, 그는 현재 그의 눈에 담긴 상대가 아닌 미래의 장면에 더 집중하는 듯했다.
“알겠지만, 이제 제대로 된 진창이 올 테니까.”
게이트 웨이브나 비선별 러쉬가 만들어낼 대혼란의 상황을 염두에 둔 듯한 말이었다.
“국가의 형벌보다 당장 목을 조를 무력이 중요한.”
“…….”
“아니. 미래에 올 게 아니라, 이미 그런 시간이 시작됐지. 내가 이렇게 행동함으로써.”
매우 빠르고 급격한 변화가 세상을 덮치리라는 건 이 자리의 모두가 알았다.
어쩌면 이 시각 바깥에서, 이미 무언가가 벌어지기 시작했는지도 몰랐다.
“전에는 대의와 선한 명분에 어긋나는 짓을 했다가 괜히 적을 많이 만들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것 같았지. 그리 생각한 시간이 길었어.”
“…….”
“연방정부를 등지는 건 나한테도 부담이니까. 근데 이젠 워싱턴의 하이에나들이 다 내 편이라, 망설일 게 없지.”
약육강식의 아수라장.
목전에 온 미래를 그려보면 계속 웃음이 났다.
“이제 새로운 법칙이 무엇인지 세상에 알려줄 생각이야.”
“…….”
“내가 이렇게 길게 나불대는 걸 보면, 그동안 참 이렇게 굴고 싶었나 봐. 잘도 참았지?”
쿡쿡. 그레이는 눈을 내리깔고는 웃었다.
“K.”
그리고는 다시 여현을 봤다.
“늦지 않았어. 나의 제안은 여전히 유효해.”
“…….”
“원한다면, 시용과 함께 내 편으로 넘어와.”
서시용.
대한민국 S급 에스퍼 랭킹 1위의 이름이 등장하자 이창결, 백율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여현은 별달리 동요하지 않았다.
“그럴 일 없습니다.”
단지, 차갑게 답했을 뿐이었다.
그레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표정을 내보였다.
“마음 아프지만.”
“…….”
“안타깝게 됐네.”
진심이 담기지 않은 탄식이었다.
“그럼, 서론은 이쯤 해도 될 것 같으니, 본론으로 갈까.”
슥.
그레이는 옷에 묻은 피를 한 번에 다 빼내버리고는, 먼지 하나 묻지 않은 상태에서 말했다.
“이 던전의 던전석을 절반씩 나눠 갖자. 그리고 조지나를 돌려줘.”
“…….”
“여기 클리어 조건을 위해 내가 알아서 가이드 하나도 제공할게. 질 나쁜 인신매매범.”
“…….”
“올바르고 곧은 너희도 죽일 때 별 양심의 가책 안 느낄 재밌는 놈으로 선별해주지.”
불필요한 소모전과 유혈사태는 막자는 제안이었다.
“너랑 내가 지금 싸워서 좋을 게 없어. 시간이 좀 더 지나 세계가 급변하는 걸 보면, 너도 나처럼 무력한 인간들에게 환멸을 느낄 거야. 그런 생각 안 해봤어?”
“…….”
“그리고 지금 나는 다치기 싫고, 너는 네 가이드를 잃기 싫을 테니까.”
네 가이드.
그레이는 두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영원. 그런 이름이었나.”
“…….”
“영원의 헌신자. 그 안의 ‘영원’과 같은 ‘영원’이지?”
사락.
그쯤, 그레이의 힘이 담긴 산들바람이 여현의 가까이로 왔다.
뒤편의 영원을 향해.
쾅!
파직.
그리고 그 공기의 흐름이 여현을 스칠 때, 여현은 그를 밀어냄과 동시에 근방의 모든 우림을 전부 날려버렸다.
사악-
콰르르.
각종 식물이 우거져있던 들판이 순식간에 시야를 가리는 것 없는 평지가 됐다.
영원에게 공격의 초점을 맞추고 있는 29명의 에스퍼가 한 번에 드러났다.
S급, 혹은 A급 에스퍼 29명. 그 뒤에서 대기하는 약 30명의 S급 혹은 A급 가이드들까지.
모두 그레이의 수하들이었다.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그들을 둘러싼 공기만 계속하여 차갑게 가라앉았다.
여현 때문이었다.
엄청난 에너지의 밀도에도 불구하고, 여현의 힘이 그들이 서 있는 모든 공간으로 뻗어 나갔다.
광범위한 영역의 온도가 급격하게 하강했다.
으슬으슬.
최소 영하 30도 언저리.
쩌적.
땅이 얼어붙고 호흡이 짙은 입김을 만들어냈다.
오로지 영원이 앉아 있는, 여현 등 뒤의 좁은 영역만 여전히 인간이 편히 숨 쉴 수 있는 온도였다.
그레이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세상은 변해.”
“…….”
“유예기간을 두고 좀 더 숙고하는 게 낫지 않겠어?”
그레이는 부드럽게 설득하는 어조로 말했다.
영하 40도 근처. 온도는 더 하강했다.
“다들 내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하잖아. 여기서 그만하는 게 좋겠다고. 너희들이라도 빨리 말려 봐.”
그레이는 이창결과 백율을 잠시 보기도 했다. 그들은 반응하지 않았다.
하아.
그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누가 양보하는 걸까?”
말투에는 서서히 짜증이 섞였다.
“나한테는 네 가이드를 죽일 기회가 이미 많았어.”
“…….”
“그러니까 그냥…….”
그쯤, 영원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삭.
얼어있던 나뭇잎이 영원의 발에 밟혀 부서졌다.
여현이 반응했고, 모두의 시선이 영원에게로 왔다.
“이래라저래라.”
영원은 몇 걸음 더 움직였다. 그제야 랭킹 1위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뭣도 모르면서 아는 척.”
아무리 잘생겨 봤자 취향 아닌 비호감상이었다.
그리고 그레이 역시 영원을 돌아보았다.
“…….”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듯, 당혹감이 어린 표정이었다.
“감히 내 에스퍼님한테 명령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
“네 말은 이해하려고 애쓸 가치도 없어서, 내 에스퍼님이 짐승 울음이다 생각하고 넘기는 거 모르겠어?”
“…….”
“그리고, 누가 누굴 잃어?”
자기 자신을 죽이겠다는 말은 영원을 특별히 기분 나쁘게 만들지는 않았다.
꿈을 꾸는 거야 누구에게나 자유니까.
하지만 그걸 수단으로 삼아 여현을 협박하는 건 문제였다.
“더 이상 들어줄 수가 없네.”
여기서 벗어던질 가면이 있는 사람은 그레이 딘하우스 혼자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