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35화 (35/142)

여현의 과보호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근처의 땅을 정돈하여 소파 같은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영원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센터 에이스(주: 라고 쓰고 어쩐지 병풍이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 4인의 패닉은 점점 더 깊어졌다.

“담요도 둘러드릴게요.”

사락.

분명히 이곳은 열대우림이었다. 공기는 덥고 습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 열대 풍경 속의 영원은, 여현이 만들어 준 차갑고 쾌적한 공기 속에서, 여현이 제작해준 포근한 담요에 폭 둘러싸였다.

‘완전 시원하고 청량한 공기.’

등 뒤의 말랑말랑 폭신한 쿠션은 덤이었다.

포옥.

영원은 오랜만에 펜트하우스의 침대만큼이나 아늑한 환경을 경험하게 됐다.

“잠시 주무셔도 돼요.”

그쯤 되자 영원 역시 여현의 대접이 과하게 극진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으응…….”

챙겨주는 거야 좋았다. 그러나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할 정도라기엔, 몸이 지나치게 멀쩡했다.

‘고백하긴 그렇지만 사실은, 적당히 멀쩡한 정도를 한참 넘어서서 그냥 금강불괴인데…….’

어쩐지 저 멀리 우주 구석에 버려둔 양심이 콕콕 찔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무서우셨죠.”

“아, 음? 어, 응.”

“이제 비슷한 일 겪지 않으실 거예요.”

영원은, 이곳에 들어온 뒤로 사실 거의 모든 고생은 사서 했다는 고백은 여현에게 하지 않기로 정했다.

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쾅!

“꽤액!”

퍽!

여현이 근처에 다가온 몹을 쓸어버리거나 힘을 사용할 때의 눈빛과 분위기가, 조금 무서웠다.

콰광!

퍽.

영원에 대한 다정한 태도와는 무관하게, 그의 기분은 여전히 험악해 보였다.

‘엄청 화났어.’

‘오랫동안 연락 안 해서 걱정시킨 내 탓도 있지 않을까?’

‘저 분노의 확산에 내가 기여한 바가 크다는 걸 알릴 수는 없어.’

일단은.

적어도 일단은 그랬다.

‘숨겨둔 이야기 몇 개를 꺼내는 건 여기서 나간 다음에.’

비밀을 밝히는 건 둘만 있을 때 해야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우리 편이라고는 해도, 저 랭커들이 있는 데에서 밝힐 수는 없지.’

이제 영원은 4명의 랭커들이 자신과 여현의 관계를 보고 놀랐다는 걸 대강은 눈치챘다.

그 경악의 정도를 제대로 파악해내진 못했지만.

이창결, 백율, 강화연, 장제권은 오랜 시간 당혹을 잠재우지 못했다.

‘저런 사이였다고? 사무실에서 봤을 때랑 온도 차 왜 저런 거야?’

‘S급 물리계가 어쩌다가 에어컨+공기청정기에 빙의? 친구 조카놈 인생이 원래 이런 장르였니? 저 귀염성 없는 놈이 담요를 직접 짜서 덮어준 건 맞나? 게다가 뭔가 귀여운 디자인의 쿠션까지 제작됐어?!’

‘저한테 정신착란이 일어나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

영원과 여현을 보는 병풍 4인은 그들의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

추가 한 시간여 경과.

[퀘스트 종료까지 잔여 시간 42시간/48시간]

주변부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백율과 강화연이 주변 상황을 요약해 전달한 뒤 앞으로의 계획을 제안했다.

“일단 이동은 하지 말자.”

“지하감옥도 그렇고, 근처에 여기보다 더 나은 지형도 없어 보여요.”

“동의.”

“저도요.”

이창결, 여현, 장제권이 차례로 같은 생각이란 뜻을 표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향하는 시선에, 영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대로, 여기 던전석은 확실히 아무런 특징이 없는 것 같아.”

“나중에 몹들을 정리한 다음에 분신술 가능한 환상계 에스퍼들 대거 투입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해요.”

백율과 강화연은 영원이 혼자 짐작해낸 이곳 던전석의 특징을 확인해주었다.

“응. 지금 우리가 흩어져서 찾기엔 리스크가 크고 효율도 안 나와.”

“네. 30시간쯤 들여도 하나도 못 찾을 확률이 높으니까요.”

여현, 이창결, 장제권도 다시 한번 그녀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영원은 자신이 S급 던전석 하나를 획득한 게 얼마나 큰 행운이었는지를 제대로 알게 됐다.

‘내가 하나 몰래 킵한 걸 고백하는 것도 나중에.’

‘여러모로 각종 진지한 대화는 다 여기서 나간 뒤에 여현이랑 둘이서만 따로 해야 할 것 같아.’

백율과 강화연은 이어서 영원도 대강 알고 있던 ‘계단 우림’에 대한 정보를 나누기도 했다.

“보스 소환 퀘스트는 완료했으니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42시간 뒤에 보스가 나타나기는 하겠지.”

“희생양을 하나 선별해야 한다는 게 어려운 점이긴 하겠죠?”

“뭐. 저쪽에 사형감인 범죄를 저지른 쓰레기 가이드가 어디 한둘뿐일까. 당장 땅 아래에도 하나 있는데.”

백율은 자신이 ‘시끄럽고, 어차피 너한테 캐낼 정보도 더 이상 없겠다’며 아까 기절시킨 조지나를 떠올리며 말했다.

영원은 그 외에도 랭커들의 대화를 통해 다른 던전에 대한 정보도 많이 얻었다.

그래서 던전에 대한 각종 정보를 이전에 경험해 보았던 S급 게이트와 비교하여 머릿속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게이트는 의지에 반하여 발생하는 자연재해 같은 거라면, 던전은 직접 찾아내서 제 발로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접근 불가능한 숨겨진 보물창고.’

‘게이트는 우연한 사건이라 필드 관리자인 세계수가 그 발생을 알려주는 게 전부. 반면에 던전은 필드의 관리자가 아닌 미지의 관리자들이 통제하는 놀이 같은 것.’

다만, ‘보물창고’에서 벌어지는 ‘놀이’라고는 해도, 던전은 귀염뽀짝한 즐거운 놀이공원은 아니었다.

위험할 때엔 엄청나게 위험했다. 던전에서 사망한 랭커를 셀 수 없을 만큼.

물론 이곳의 센터 소속 각성자들 중 S급 던전 자체가 무서워서 위기의식을 느끼는 이는 없었다.

무엇보다 일단 백율-강화연 조합이 이곳에 있었다.

‘던전 클리어 능력으로는 비할 상대가 없는 조합이라고 했지. 완벽한 월드클래스. 탑 중의 탑.’

영원은 윤 교수에게 둘의 환상적인 케미에 대해 여러 번 들은 바가 있었다.

둘뿐만이 아니었다.

S급 에스퍼인 여현, 사실상 S급 에스퍼인 이창결, 여현의 전담 가이드인 영원, 원거리 가이딩에 관하여는 전설을 창조했다는 S급 가이드인 장제권까지 여기에 있었다.

던전이 S급이 아니라 SS급이라고 해도 던전 자체가 두려울 건 없었다.

“그레이가 문제지.”

이창결이 영원의 생각을 대신 뱉었다.

여기서 무엇보다 경계해야 할 진짜 문제, 그건 그레이 딘하우스였다.

세계 랭킹 1위.

게이트 웨이브와 비선별 러쉬를 통해 세계를 전부 자신의 발아래 두고자 한다는 가면 뒤의 지휘자.

“원래부터 말이 많았지. 사생활이라는 이유로 행적을 알리지 않고 종종 사라지는 것부터 수상했거든.”

이창결은 그레이가 있을 하늘 위편을 쳐다보았다.

그가 최하부로 내려오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지하에 갇힌 조지나와 연락이 닿지 않으니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도 남았다.

“언젠가부터 그레이가 뒤가 구린 이들과 내통한다거나, 테러 세력과 커넥션이 있다는 얘기가 한국 센터에도 돌기 시작했고.”

몇 개의 추측은 비밀스럽게 증명됐다.

그리고 그렇게 그레이의 비밀을 밝혀낸 사람들은 다른 사실들까지 함께 알게 됐다.

너무나 많은 세력이, 인물이, 기업이, 각종 이권이, 그레이의 편에 섰다는 걸.

인류 절반 이상을 노예로 만들어 한 탕씩 해먹으려는 놈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의 일탈을 세상을 향해 낱낱이 고발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는 것도.

‘미국 센터는 끝났어. 일본도. 전부 그레이 손바닥 안이에요. 우리 쪽 정부에도 그레이를 도와주려는 놈들이 있어.’

이창결은 윤희유 교수, 박의총 가이드가 주고받던 대화를 떠올렸다.

‘교수님. 언론을 끌어들이면 더 난잡해지지 않을까요.’

‘맞아요. 언론플레이는 승산 없어요.’

‘싸움을 할 거면, 직접 계획을 훼방 놓는 편이 나을 거란 말이죠.’

‘네. 일단 첫 번째는, S급 던전석 확보를 최대한 막는 것.’

이창결은 그들이 우선적으로 막아야 하는 걸 말했다.

“우린 딘하우스가 S급 던전석이 모자라 던전석난을 겪고 있다는 걸 알지.”

“맞아요. 한국 센터도 마찬가지지만, 미국이나 그레이 쪽은 더더욱 지금 S급 던전석의 보유량이 문제라고 해요.”

가이딩 밴드를 비롯한 각종 가이딩 장비, 각성자들의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사용되는 테스팅 기계 등등, S급 던전석이 없으면 제작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S급 던전석에 대한 수요는 꾸준히 늘어났으나, 공급이 늘어났던 적은 없다.

“앞으로도 던전석난은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덜해지지는 않을 거예요.”

“그걸 아니까 S급 던전이 발견되는 곳마다 그레이와 그 끄나풀들이 달려가고 있는 거겠지. 가면이 벗겨지는 위험까지 감수하면서.”

영원은 이제야 왜 그레이가 타국의 S급 던전에 행차하게 되었는지 다 이해했다.

김여현의 전담 가이드가 된 자신을 직접 보기 위해서만은 아닐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그리고, 장애물이 될 것 같은 현이의 전담 가이드, 심 가이드님을 여기서 제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모두의 시선이 영원을 스쳤다.

영원은 긴장하는 기색 없이 모두의 시선을 받아냈다.

“계획대로 안 될걸요. 제 목숨줄이 꽤 질겨요.”

영원은 여현을 보며 말했다. 그러면서 살짝 웃어주기도 했다.

“…….”

그리고는 작게 떠 있는 SSS급 퀘스트창을 잠시 보았다.

[스테이지1: S급 던전석 5개 취득]

[스테이지1 목표달성▶ S급 던전석 1개/5개]

‘모두가 원한다는 던전석. 내게 뭔가 알려주고 싶은 게 있었나.’

스테이지1.

2, 3, 그 이후에 무언가가 더 있기도 할 터였다.

영원은 세계수가 그리고자 한 밑그림이 무엇일지 알아내고 싶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영원의 표정이 심히 딱딱하게 굳었다.

여현이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빠른 대응이었다.

다른 센터 에이스들 역시 영원의 곁에 섰다.

그들은 모두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버석. 버석.

누군가의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버석.

상대는 느리게 걸어왔다.

버석.

끝내, 그 방향의 수풀이 걷혔다.

모두가 예상한, 예고된 만남이었다.

너무 하얘서 은발처럼 보이는 금발. 태닝한 피부. 짙고 푸르른 눈.

비현실적인 미남이 환히 웃었다.

“오랜만이네, K.”

세계 랭킹 1위 S급 에스퍼.

그레이 딘하우스, 타이틀 ‘유일자’가 인사를 건넸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