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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28화 (28/142)

박의총은 영원에게 답할 틈도 주지 않고 단어를 미친 듯이 쏟아냈다.

영원은 15분이 넘도록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했다.

알고 싶지 않으면서도, 알지 않으면 안 되는 이야기를.

그 덕에 영원은 4회부터는 읽지 못한 현판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파악하게 되었다.

선량한 마음으로 세계를 구하려 했던 최환성이 결국 세계를 구하는 데 실패하고, 지키고 싶었던 이들을 모두 잃은 뒤, 악마 같은 미친놈으로 돌변해 에스퍼들의 목줄을 쥔 패자이자 지구 위의 절대군주로 군림하는 결말.

그러나 현재, 최환성은 절대군주가 되는 엔딩을 거부하는 중이었다.

왜냐면, 그가 소중한 이들을 단 한 명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기 때문에.

차례로 그의 곁을 떠날 어머니, 아버지, 누나, 남동생, 연인, 그리고 친구들까지, 그는 모두를 지키고 싶어 했다.

“저도 근시일 내에 죽을 예정이었습니다.”

“…….”

“죽는 건 받아들이기로 결정했지만, 생명이 연장되었다는 건 확실히 기쁜 일이네요. 감사합니다.”

“제가 뭐 대단한 걸 해서 그런 건 아닐 거고…….”

“아닙니다. 김여현 에스퍼님과 더불어, 존재 자체에 감사드립니다.”

박의총은 은은하게 웃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랑 여현이랑 쌍으로 묶인 아첨이라니, 갑자기 비호감지수 급하락.’

영원은 속으로 헛기침을 몇 번 내뱉었다.

“심영원 가이드님, 우선, 뵙자마자 이렇게 무거운 짐을 넘겨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상황이 이렇게밖에 될 수 없었다는 걸 이해했다.

“어쨌든…… 그레이 딘하우스가 S급 던전을 노리고 달려오고 있어서 급하다는 거죠.”

영원의 촉이 모두 맞아 들어갔다. 의총의 설명에 따르면 세계랭킹 1위 그레이 딘하우스는 확실히 뒤가 구린 인물이었다.

“예. 제 이야기도 갑작스럽고, 정의롭기로 유명한 그레이가 그런 나쁜 악당이라 놀라셨을 겁니다.”

놀라지 않았다. 그래도 영원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의 악행으로 인해 끔찍한 일들이 연이어 닥칠 겁니다.”

“비선별자들의 대거 각성과, 게이트의 무분별한 생성과 더불어서요.”

“맞습니다. 과거의 예언자인 학살자, 스피넬은 우리보다 더 자세한 근미래를 알고 있어요.”

“…….”

“심영원 가이드님, 가이드님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윤 교수와 얽힌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박의총의 말이 거짓일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네에…….”

많은 궁금증이 해결된 건 다행이었다.

비록 귀찮고, 귀찮고, 귀찮으며, 귀찮고, 귀찮고, 귀찮은 일들이 잔뜩 끌려 온 것 같다는 점에서 정말로 좋은 일이라고 기뻐할 수는 없었지만.

그다음에도 의총은 영원의 추가 질문 여러 개에 상세히 답해주었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네. 조심히 가세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띵.

의총을 태운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시계를 보니 무려 3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영원은 좀비처럼 계단을 올라 펜트하우스 2층으로 갔다.

“하아.”

팡.

영원은 침대에 뒤로 넘어지듯 누웠다.

“……으.”

아무래도 귀찮은 일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윤희유 교수, 이창결 부장, 백율 부장, 요련 언니, 박의총 가이드, 최환성 에스퍼 등등이 모두 한편이었다.

그들은 영원이 센터로 와 그들과 함께 세계를 구하는 일에 차근차근히 협조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우선은 S급 던전석이 몇 개 필요하다고 했다. 던전석을 구하려면 여현이 S급 던전을 찾아내 들어가야만 한다고. 그레이 딘하우스도 그걸 노리고 잠시 서울로 올 것이라고.

분명히 서울 어딘가에서 금방 S급 던전이 열릴 텐데, 최근 여현의 잦은 출장은 그 S급 던전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세계수가 힌트를 준 여현의 몸을 치료하는 방법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하시죠.’

‘여현이의 식도나 위를 복구할 방법이 있나요?’

의총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질문에 질문으로 답했다.

‘김여현 에스퍼님 가이딩할 때 어떤 느낌이셨나요?’

‘그게 무슨 관련이 있죠?’

‘그 느낌에 관해 별로 추가할 말씀이 없으시다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아리송하게 말씀하지 마시고 제대로 설명해주세요.’

‘매칭률이 극단적으로 높은 경우, 에스퍼 등급에 맞는 던전석을 접촉하고 가이딩을 받으면, 에스퍼 자신의 힘에 의한 영구 손상도 치유가 됩니다. 매칭률이 최소 80%에 근접하는 경우에만요.’

‘…….’

‘저릿한 전류가 몸을 타고 흐르며, 다른 차원의 쾌락에 사로잡히는 느낌.’

‘…….’

‘비슷한 종류의 황홀경을 겪지 않으셨다면, 매칭률이 그리 높지 않으실 테니까요.’

영원은 방금 나눈 대화를 돌이키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저릿.

손을 들어 천장의 조명을 가리고 손끝에 시선을 고정했다.

여현의 머리카락에 스쳤을 때의 느낌을 떠올려봤다.

‘저릿한 전류, 쾌락이라.’

단순히 그런 비유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어쨌거나 치료할 방법은 알게 되었어.’

극단적으로 높은 매칭률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걸 센터에 비밀로 한 채 여현을 치유하는 시나리오를 짤 수가 없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어쨌거나 결국 출근각인가.”

피할 수 없을 듯했다.

영원은 몸을 꾸물꾸물 움직여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암튼 일단 자자.”

영원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내일의 고민은 내일 모레에.’

잠들기 전 싱크로율만 다시 확인했다.

[심영원, ‘연금술사 대제’]

[현재 싱크로율 5.00%]

[목표 싱크로율 100.0% … 30시간/108시간]

‘5%?’

‘진짜 장난?’

영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업데이트 오류 난 듯.’

그 생각을 마치고는 2분도 지나지 않아 깊은 잠에 빠졌다.

***

박의총은 멍한 기분으로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펜트하우스가 위치한 꼭대기 층.

“도련님.”

“…….”

“도련님?”

“……응.”

그는 차에 오르지 않고 한참이나 그 위를 쳐다보았다. S급 게이트가 공중 위에 떠 있던 명동에서와 마찬가지로,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그러나 희망에 지나치게 도취되어 현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친구분께서 전화로 찾으시는데요.”

“네. 주세요.”

의총은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어.”

―만났어?

“방금.”

희망이 왔다.

희망은 매우 귀찮은 얼굴을 하고서 망했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희망이라는 본질을 품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하자.”

의총은 핸드폰 너머 친구에게 말했다.

그는 원작 현판의 주인공이자, 예견된 미래의 절대군주였지만 그를 거부해온 S급 물리계 및 환상계 에스퍼 최환성, ‘선량한 악마왕’이었다.

***

비슷한 시간, 여현은 출장지에서 굳은 얼굴로 이창결 부장을 마주하고 있었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예언’을 듣게 된 건 여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그동안 센터의 몇몇 이들이 미래를 어렴풋하게라도 예언해왔다는 걸 믿으라고 하시는 건가요.”

“현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건 알아. 우리한테 엄청 화도 날 거고. 우리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는데, 미안하다.”

“아뇨, 받아들이기 어렵지 않고, 화도 안 납니다.”

여현은 그를 둘러싼 이들이 이상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몰라도, 그들이 어떤 미래를 보고 있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초현실적인 힘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정말로 불가능한 건 없을 터였고, 여현은 눈치 없는 바보가 아니었다.

미래를 보는 방식에 대해서도, 어렴풋하게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가끔 한계에 이르렀다 싶은 순간에 세계수는 세계의 불문율을 깨듯 여현에게 손을 내밀 때가 있었다. 예언도 비슷한 방식일 것 같았다.

“네가 어느 순간에 폭주하고 죽을 거라는 예고를 먼저 해줄 수는 없었어.”

“변명 계속 안 하셔도 돼요. 이해했으니까. 과거 말고 미래에 대해 말씀하세요.”

“…….”

“저를 기만하려 애쓴 결과가 아니었다는 거, 당연히 잘 알아요.”

여현은 정말 괜찮았다.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건 영원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창결 부장의 설명만 들어봐도, 예견된 미래가 오지 않은 건 그녀 때문이었다.

그녀는,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나타나 모든 걸 뒤집어 놓은 걸까.

그래서 여현이 먼저 화제를 전환했다.

“제 가이드님에 대한 조사는 끝났나요?”

“어……. 복구한 과거 영상을 보면, 백치였던 게 맞는 것 같긴 해.”

“…….”

알아가려 할수록 알 수 없는 상대였다.

하늘 위에서 머리카락에 손이 스칠 때 느꼈던 무언가는 완전한 착각이 빚어낸 감각이었을까.

여현은 갑갑한 덫에 갇힌 기분이었다.

“뭔가가 바뀐 거겠죠.”

“……아마.”

“…….”

“뭔진 몰라도 그렇겠지.”

“다른 시공간에서 왔을까요?”

잠시 정적이 내렸다. 둘은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영원뿐임을 알았다. 여기서 논쟁해봤자 무의미했다.

결국 대화는 좀 더 생산적인 주제로 돌아왔다.

“그래서, S급 던전을 발견하면 뭘 해야 하는 거죠?”

“우선 S급 던전석을 구해야 해. 던전 클리어도 이쪽에서 해야 하고.”

“네.”

“그리고…… 잠시만.”

우웅. 이창결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품에서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박의총 가이드한테 회신이 왔어. 계획에 대한.”

“계획이요?”

“심영원 가이드님은 계획에 일단 협조하겠다는 모양이야.”

이창결은 장문으로 도착한 메시지를 꼼꼼히 읽었다.

“무슨 계획에요?”

이창결은 여현의 눈치를 조금 보고 말했다.

“납치.”

“…….”

“그레이 딘하우스의 끄나풀이 심 가이드님을 납치하러 갈 거거든.”

“그게 무슨…….”

“만약 S급 던전을 그들이 먼저 발견한다면 말이지. 그 던전을 클리어하려면 가이드 한 명이 희생해야 하는데…….”

여현의 시선이 차게 식었다.

“그레이 딘하우스는 쇼맨십을 좋아하니까.”

“…….”

“김여현의 가이드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물로 삼고 싶어 하겠지.”

뚜둑.

여현의 손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 우리가 S급 던전을 먼저 찾으면 돼.”

“…….”

“아무튼 그레이 쪽도 급해. 그쪽에도 서울의 초토화를 예견한 각성자가 한 명 있었거든.”

김여현의 폭주에 의한 서울 초토화.

S급 게이트의 출몰과 함께 일어나야 했던 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들도 무언가가 틀어져서, 그들의 계획이 어그러졌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세계수가…… 그레이 딘하우스의 동료들에게도 예언을 전해주나요?”

“지금은 아니고, 과거에.”

“과거에요.”

“그래. 과거의 예언자였던 그녀가 그 정보를 이용해 세계를 구하기보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 쓰기로 돌아서기 전까지.”

“그녀가 누구죠?”

“조지나 스피넬.”

여현도 누구인지 아는 S급 가이드였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국가 하나를 지워버린 전범.

“세계수는 박의총 가이드보다 그녀에게 더 상세한 예언을 해주었던 것 같아.”

세계수는 세계를 구하고 싶어 하나, 세계를 구하기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특정 인간의 마음이 불변할지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전능하지는 않았다.

세계수는 조지나 스피넬로 인한 시행착오를 거쳐, S급에게 함부로 예언을 해주면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후에 새로운 예언자로 선택된 A급 가이드 박의총은 상세하고 구체적인 예언을 듣지는 못했다.

“아무튼, 심영원 가이드님은 박의총 가이드님에게 일단 피곤하니까 납치 전까지 주무시고 계시겠다고 했대.”

“……만난 모양이죠.”

“……그렇지?”

기묘한 기류를 이창결도 눈치챘다.

“제, 집에 들어갔나요.”

여현이 느린 속도로 문장을 완성했다.

“그렇게 됐어. 미리 양해를 못 구한 건 미안하다.”

“…….”

“처음도 아니니까, 제대로 납치당한 척 연기하는 건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대.”

“…….”

“김여현 에스퍼님한테 가이딩 밴드로 호출하면 그냥 너무 늦지 않게 구하러 오기만 하라고, 그렇게 전해달래.”

이창결은 말을 마치고 여현과 눈을 마주하려 했다. 그런데 여현이 눈을 감고 한참을 멈추어 있어, 그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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