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27화 (27/142)

―가이드님. 가이드님?

영원은 전화를 끊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종류별로 소분되어 냉장고에 들어있는 달콤한 호박죽과 담백한 전복죽을 떠올렸다.

어제 저녁에 여현이 끓인 것은 삼계죽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아침, 점심엔 단호박죽이랑 전복죽 드세요.]

아침에 눈을 떠서 냉장고 앞으로 가니 담백한 글씨체를 담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분명 현관까지 배웅했는데, 그릇을 정리하는 틈에 그건 어떻게 써 붙여 놓은 건지.

게다가 늘 그렇듯, 괜히 생색내는 말 하나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지지 않았던가.

‘여현아…….’

냉장고 앞에서, 영원은 열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 김여현에게 치인 기분이 됐다.

‘심지어, 무려 저녁 먹고 다시 밤에 출근하는 길이었어…….’

죽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한 입 뜬 다음에는 다시 또 심히 치인 기분이 됐다.

‘죽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 맛있을 수 있는 거였던가?’

당연히, 그가 맛있는 것을 먹는 기쁨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다음에 함께 마주 앉아 맛있는 음식을 먹고도 싶었다.

‘연금술로 식도랑 위를 복구해낼 수 있을까.’

그러나 위 질문에 대해 영원은 꽤 회의적이었다.

여현을 치료해 주려다가 대제의 힘을 들키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연금술사가 사용하는 힘은 각성자의 힘과 조화되지 못할 확률이 컸다.

‘힘의 본질이 달라. 특히 에스퍼의 그릇과 연금술은 상극일 것 같아.’

‘게다가 내 몸이랑 내 몸을 합체해도 지금 108시간짜리 구토·미열·두통·어지러움·메스꺼움·근육통 버퍼링이 걸렸는데…….’

대제의 힘이 이쪽 세계 물리계 S급 에스퍼의 힘과 거하게 충돌이라도 하면 무슨 난리가 날지 몰랐다.

그 리스크를 감당하면서까지 치유를 시도하는 게 적절한지 의문이었다. 그 결과로 여현이 폭주할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듣고 계신가요?

“……네.”

그런데 때마침 막다른 골목 앞에서 청성이 힌트를 준 것이다.

박의총이 여현을 치유하는 데에 무언가 도움을 줄 수도 있다고.

‘가이드의 능력을 사용해 에스퍼의 영구적인 상처를 치유할 방법이 있기는 한 모양이지.’

영원은 금방 마음을 바꿨다.

“박의총 가이드님께 올라오시라고 말씀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청성은 아리송한 말을 할 때는 있어도 도움이 안 되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근데, 외부인 펜트하우스 출입, 이거 센터에서 괜찮다고 하는 건가요?”

―네, 네! 제가 센터에 연락 넣어서 확인받겠습니다.

“그럼 센터에서 컨펌하면 문자 넣어 주세요. 감사합니다.”

스륵.

영원은 펜트하우스 1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핸드폰 잠금을 해제해 박의총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었다.

[박의총]

자동완성된 검색어가 주르륵 밑으로 이어졌다.

[박의총 S급 금수저]

[박의총 고화질 클로즈업]

[박의총 정장핏]

[박의총 꽃사슴]

[박의총 최환성 절친 모먼트]

영원은 기본 검색 아이콘만 터치했다.

[박의총, 가이드(A급 11위), 타이틀 ‘성실한 초대자’, 만 26세]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타이틀이었다. 나무늘보가 되고자 하는 영원의 본능이 경고등을 켰다.

‘누구를 성실히 초대하는 건데? 어디로?’

‘설마, 갑자기 등장한 초유명 재벌3세 셀럽이 너를 기다려왔다며 나를 개고생으로 초대하는 그런 노답 진행 아니겠지.’

아래에는 희멀겋고 유해 보이는 얼굴 사진이 보였다. 스크롤을 내리자 수많은 정보가 쏟아졌다.

현 한국 나이 28세. 각성자를 서포트하는 광범위 하드 및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의 CEO.

10여 년 전 설립된 그의 회사는 여현이 사용하던 3세대 기계 가이딩 기기와, 영원이 전달 받은 전담용 인이어 등의 제작사인 듯했다.

‘왜 이걸 여태 몰랐지?’

‘그야…… 나는 차원 이동했으니까……?’

검색 페이지는 영원에게 계속해서 추가정보를 퍼부어주었다.

특히 눈길을 끄는 특이사항은, 아무래도 박의총은 최환성(주: 현판 주인공일 확률 90% 정도로 예상됨)의 절친 중의 절친인 것 같다는 것.

‘현판 주인공 절친……?’

‘아까 타이틀은 무슨무슨 초대자랬던 것 같은데, 아닐 거야.’

싸하다. 매우 싸해.

그리고 그가 여현을 향해 날을 세우는 것 같은 태도를 취해왔다는 것도 재차 확인했다.

[김여현은 재앙이 될 겁니다.]

[김여현은 세상을 구할 영웅이 될 수 없습니다.]

[어쨌거나 그의 힘을 경계해야 합니다.]

단순한 열등감 문제로 보이진 않았다.

‘비호감……이기는 한데, 뭔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것 같긴 해.’

박의총에게는 영원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매우 귀찮아질 것 같아 알고 싶지 않은. 하지만 어쩐지 금방 알게 될 것 같은. 그리고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 같은 무언가가.

‘현판 메인 스토리 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구요.’

‘저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말하는 감자이고 싶었단 말입니다.’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멈춘 다음에 도로 내려보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다.

그렇지만, 영원은 이미 그녀가 김여현의 늪에 빠졌음을 인정했다.

주고 싶은 것이 생긴 순간, 지키고 싶은 욕심이 생긴 순간, 약간의 고생은 하게 될 줄 알았다.

그래서 딱 15분만 참아보기로 했다.

띠링.

‘15분. 15분 컷이다.’

영원은 전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타난 박의총 가이드를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박의총 가이드님.”

영원은 나름대로 가면을 쓰고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했다. 여현과 관련한 정보만 취한 다음, 15분 내에 그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충격적인 알람과 함께 위 계획은 5초 만에 삭제당했다.

도롱.

[심영원, 오픈 타이틀 ‘성실한 초대자’ 박의총과 조우, 박의총의 히든 타이틀 오픈 조건 달성]

도롱.

[심영원에게 박의총, 히든 타이틀 ‘과거의 예언자’ 오픈]

도로롱.

[심영원, SSS급 퀘스트 진입 조건 달성]

[세계수의 SSS급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스테이지1: S급 던전석 5개 취득]

[스테이지1 목표달성▶ S급 던전석 0개/5개]

‘어…….’

‘아냐.’

‘안 돼.’

[필드의 관리자, 세계수가 SSS급 퀘스트의 보상에 대해 안내합니다]

[실패 시▷ 세계멸망, 무한회귀 루트]

[성공 시▷ 특별한 보상은 없음]

[제한시간▷ 없음]

“네, 안녕하세요. 박의총 가이드입니다.”

영원은 그와 눈을 맞추지도 않은 채, 허공을 보며 속으로 외쳤다.

‘장난하냐?’

‘미친 관리자.’

‘도랏?’

본격 SSS급을 위한 SSS급 퀘스트 개시.

‘내가…… 회귀자?’

‘아니, 이건 현판 주인공 속성이잖아!’

영원은 절규했다.

‘진짜 관리자 너 장난하냐!!!!!!’

【부탁해】

【마지막이다】

달콤한 목소리와 차가운 목소리가 연이어 울렸다.

【나의 영원, 네가 이것을 마지막의 마지막으로 만든다면】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약속에, 영원은 주먹을 꽉 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박의총은 열세 살에 갑작스럽게 B급 게이트에 휩쓸려 들어갔다. 두 부모를 여읜 지 사흘 만의 일이었다.

굴지의 재벌기업 후계자가 될 운명으로 태어나 열두 살 무렵 C급 가이드로 각성한 소년은, 그저 그에게 친절한 줄만 알았던 세계가 완벽하게 뒤집어지는 사건을 연이어 경험했다.

당연히 죽을 거라 생각했다.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만, C급 가이드가 에스퍼 없이 홀로 B급 게이트에 휩쓸리면 당연히 죽는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으, 으으…….’

두려움에 떨었다. 괴수들 사이에 홀로 떨어졌을 때의 공포를 여전히 기억한다. 그리고 그 앞에 김여현이 나타났을 때의 기분도 기억한다.

살았다는 환희.

그때에는 그를 구하러 온 영웅이 엄청나게 어려 보인다는 생각만 했을 뿐 정확한 나이는 몰랐다.

그런데 아홉 살. 김여현은 그때 겨우 그런 나이였다.

콰광.

소문으로만 들어온, 물리계 S급 에스퍼.

B급 게이트를 아무런 무리 없이 홀로 녹여낸 여현은 의총을 구하고는 고맙다는 말을 듣지도 않고 사라졌다.

그리고 3년 뒤.

그로부터 또 4달 뒤.

다시 또 1년 뒤.

여현은 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의총은 죽을 위기 앞에서 여현에게 총 네 번이나 구조를 받았다.

의총은 여현이 그를 알든, 알지 못하든, 자신 역시 여현에게 무언가를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죽을 위기가 왔다.

의총은 다시 게이트 앞에서 여현을 만났다. A급 게이트의 쩍 벌어진 입을 마주하고서, 등급을 상향시켜 A급 가이드가 된 채로.

그때에는 그의 동기동창인 최환성과도 함께였다. 환성은 이후에 S급 에스퍼로 각성했으나, 당시에는 일반인에 불과했다.

‘하아, 하…….’

여현은 과거의 어느 순간보다 위태로워 보였다. 그릇이 거의 다 비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의총은 고통을 각오하고 자신의 팔을 내밀었다.

매칭률이 30%도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그를 돕고 싶었다.

‘나, 나한테 여…… 역가이ㄷ…….’

여현은 그를 싸늘한 눈으로 볼 뿐 힘을 조금도 뽑아가지 않았다. 대신 가이딩 기계의 바늘을 화상 자국 가득한 팔에 꽂았다.

여현은 교복 셔츠를 더 걷어 올리며 보통의 에스퍼들은 하나도 견디지 못할 기계를 화상이 빼곡한 몸에 줄줄이 달아갔다.

그리고 다섯 번이나 생명을 구해낸 은인은 의총에게 처음으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싫어합니다.’

‘…….’

‘가이딩.’

싫어한다, 가이딩을.

그게 처음으로 나눈 대화의 핵심 요지였다.

그렇구나, 싫어하는구나.

그다음부터였다. S그룹은 가이딩 기계에 엄청난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부터 박의총은 세계수의 예언을 듣기 시작했다.

【김여현의 폭주가 멸망의 시작이 될 거다】

예언의 요지는 그랬다. 김여현만이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 것이나, 당장 예견된 건 김여현의 폭주로 개시된 세계의 멸망뿐이라고.

또한 그 무렵 세계수는 의총의 친구 중 누구보다 곧고 선한 최환성을 S급 에스퍼로 선별했다.

【그러나 환성과 네 힘만으로도 부족할 것이다】

의총은 환성과 함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뒤 윤희유 교수를 찾아갔다. 그녀만은 믿을 만한 사람이라 판단하고서.

‘김여현의 폭주가 재앙의 시작이 될 거란 말이군요.’

‘네.’

‘일단, 두 분이 정말 세계수의 음성을 듣고 있는 게 맞는지 알기 위해 실험을 설계해야겠어요.’

결국 윤희유 교수는 그들을 믿었다. 이후엔 더 많은 이들이 그들의 계획에 동조하게 되었다.

언젠가 찾아올 여현의 폭주는 엄청난 분기점이었다.

그러나 여현이 폭주할 때를 정확히 짚어내기는 어려웠다. 또한 여현에게 폭주가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현에겐 신중해라】

세계수가 신중하게 입을 열라고 경고한 데다, 여현에게 그 사실을 말한들 아무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데 세 사람 모두 동의했기 때문이었다.

‘김여현 에스퍼에게 더 많은 짐을 지우는 것뿐이잖아요.’

‘동의합니다. S급 게이트 안에 같이 들어가 폭주를 막아줄 프론트 가이드는 어차피 매칭률 때문에 못 구합니다.’

‘서울이 초토화될 걸 대비하자고 서울에서 벗어나 있게 할 수도 없을 거예요.’

‘맞아. 현이가 사라지면 서울의 안보가 뚫리니까.’

그리고 얼마 전, ‘영원’이라는 가이드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박의총은 예고된 재난이 도래한 자리에서 달려가는 그녀를 보았다.

‘김여현, 김여현 에스퍼님 어디 계신가요.’

언뜻 스쳐 지나갔다. 아이스크림 같은 느낌의 가이드였다. 하얗고 아기자기할 것 같지만, 실질은 차갑고 딱딱한.

영원.

그녀는 김여현의 품에 안겨서 하늘로 날아올랐고, S급 게이트에 그녀의 에스퍼와 함께 진입했다.

【‘영원’이 이제 미래를 정말 미래답게 만들겠지】

세계수는 이제 박의총에게 미래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미래는 이제 그저 미래다】

【우연으로 난잡하게 범벅된,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그래서 달려왔다.

원래 존재하던 미래를 그녀에게 알리고, 그녀를 그들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초대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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