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24화 (24/142)

대외적으로, 영원이 태어난 세계에는 이능력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세계수가 뿌리를 내리고, 각성자들이 등장하기 이전의 이쪽 세계처럼.

그러나 소수만이 아는 은폐된 실상이 따로 있었다.

우주 저 먼 곳의 존재와 계약할 수 있는 특수한 피. 그 피를 타고난 이들은 먼 곳의 존재, 차원의 ‘감시자’이자 ‘관리자’인 ‘청성’으로부터 간택받아 은밀하게 이능력을 사용했다.

이곳의 선별자가 세계수라는 이름의 나무라면, 그곳의 간택자는 청성靑星이라는 이름의 초거성超巨星.

초거성은 반지름이 태양의 수백 배에 이르고, 중심핵이 붕괴하면 블랙홀이 된다는 항성을 말하는데, 이곳의 세계수가 실제 활엽수가 아니듯, 실제 청성도 초거성이 아니기는 했다.

그래도 스스로 별이라고 하니 나름대로 별이긴 별이었다.

‘뭔가 복잡한데…… 굳이 이해할 필요는 전혀 없지. 지구의 공전과 자전 원리를 꼭 알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 없는 거랑 비슷하지.’

‘걍 파면 팔수록 윗동네 대단하신 설정 덕후 절대자느님들이 컨셉 놀이에 진심이라는 걸 알게 될 뿐, 그 이상 얻을 건 없음.’

청성은 세계수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이쪽 나무보다 덜 출몰하는 은둔형.’

‘목소리는 훨씬 까칠해.’

‘수줍음이 많으신지 세계수처럼 일반인들 상대로 광역 어그로를 끈 적은 절대, 절대로 한 번도 없고.’

청성의 간택은 그의 부름을 통해 이루어졌다.

【나의 ■■】

그는 그가 택하는 모든 이를 1인칭 소유격을 붙여 불렀다. 영원 역시도.

【나의 영원】

영원은 그 목소리를 들었던 첫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의 끝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그 순간에 이미 그 목소리는 이미 들어본 적 있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리 잦지는 않았을지라도.

그래서 어렸을 때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상상 친구처럼 반짝님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입에는 반짝님이 붙어있지.’

반짝반짝님. 항마력 만렙이 필요한 애칭.

아무튼 그야말로, 영원은 연금술사 대제가 될 운명을 짊어지고 태어났다고 할 만했다.

당연하게도 그건 사실이 되었다.

아홉 살.

영원은 그 나이에 연성진 없이도 연금을 해내는, 그야말로 연금술의 법칙의 정점에 이른 극강의 비기를 선보였다. 대제로서의 각성이라 부를 수도 있는 사건이었다.

그 이후부터는 끊임없는 사건의 폭풍을 벗어날 수 없었다.

거부하려 해도, 피와 힘과 운명이 어린 영원을 놓아주지 않았다.

싸움은 그녀가 스무 살 무렵이 되어 일단의 끝을 맞는 듯했다.

그리고 그녀는 바다에 수많은 것들을 봉인하기로 결심했다.

[심영원, 역대제화易大帝化]

[연금술사 대제, 봉인]

[■■■■ ■■, 봉인]

이후로는 평범한 인간의 몸을 가진 백수 집순이 한량이 되어, 봉인된 것들을 평생 잊은 듯 살기로 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은 건 또 아니니, 그냥 태어났다는 이유로 쭉 살아가다가 적당한 때에 평범하게 죽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알다시피…….

쾅.

“……망한 듯.”

‘우리 동네 하늘에 붙은 뭐랑 드디어 안 만나고 사나 했는데…… 다른 동네 땅에 붙은 뭐한테 난데없이 발목 잡힘.’

대강 그렇게 된 얘기였다.

***

기억과 능력이 모두 사라진 듯 산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영원의 힘과 육체는 그녀가 언제라도 그것들을 모두 불러올 수 있는 곳에 남아있었다.

그러니 그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은, 영원의 순진한 착각이자 허황된 바람이었다.

이쪽 세계에 도착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운 세계에서 마주한 초월적인 힘에 대해 느낀 친숙함.

세계수의 음성을 감각하는 방식의 익숙함.

이쪽 심영원보다 더 월등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 같은 범죄자들 곁에서도 유지되던 평정.

이창결이 선보인 힘의 작동 기재에 대한 흥미.

힘을 봉인했던 바다의 풍경이 연상될 때에 느꼈던 거북함.

고통에 대한 면역.

아홉 살 무렵 각성했을 소년의 서사에 대한 연민.

휴식을 갈망하는 영웅에 대한 공감.

그의 앞에서 부리는 여유.

시각이 아닌 제7의 감각확장, 레이더에 대한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일방적 헌신에 대한 경계.

구원을 갈망하는 타인에 대한 거부감.

같은 끝을 보고 싶지 않은 두려움.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는 일에 대한 공포.

과거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본능적인 갈망.

답이 필요한 기로에 서면, 자연히 뻥 뚫린 하늘을 헤집어 찾게 되는 초거성. 그리고 실제로 뱉어낸 물음.

위에 나열한 것들 외에도 많은 것들이, 영원의 의식 또는 무의식에 스며들어 있었다.

지금의 영원은 인정하기로 했다.

과거를 완전히 떨칠 수는 없다고.

게다가, 봉인해둔 힘을 다시 불러오지 않으면 겨우 다시 찾은 평온이 산산조각 나는 걸 지켜봐야 할 터였다.

영원은 작게 탄식하며 생각했다.

아……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지.

***

신체와 관련된 등가교환은 끔찍한 고통을 수반할 때가 많았다. 연성진 없이 한계 이상의 능력을 끌어다 쓸 때 역시도.

두 가지 다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라서, 지금 겪는 고통이 놀랍거나 새롭진 않았다.

“하아…….”

영원은 한숨을 쉬며 침대에 누웠다. 피는 토할 수 있을 만큼 다 토한 것 같고, 이제는 열이 끓었다.

“녹차 아이스크림…….”

“눈꽃 빙수…….”

“티라미수 빙수…….”

영원은 눈을 감고 웅얼거렸다.

연금술사마다 고통을 견디는 방식이 다르지만, 영원은 주로 순연한 고통을 다른 약물 등의 도움 없이 견뎌내는 순정파였다.

아르케미-크리스탈 같은 마약 등등은 본능이 거부했다.

‘제작 과정에 인간의 장기 일부가 들어가니까.’

간같이 회복력이 상당한 기관을 일부 얻어내는 과정에서 사람이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닐 테지만, 어느 정도의 후유증은 분명히 있을 거다. 그러니 고통은 그냥 홀로 느끼고 싶었다.

미련하다고 해도, 그냥 어렸을 때부터 변함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요련 언니는 여현이가 더 큰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사람이랑 하는 가이딩을 피하고 싶어 하는 걸 이해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냥 본능적으로 거북하고 싫을 수 있지.’

‘스킨십도 그렇고. 솔직히 나도 아무나랑 가이딩 하라고 하면 심히 안 좋아했을 듯.’

아주 논리적이진 않아도, 그 선호와 비선호가 이해되지 않는 바가 아니었다.

‘나도 딱히 완전히 논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수치를 비교 계량한 다음 아르케미를 싫어한 건 아니었어.’

‘누구한테 꼭 미안하다기보다, 솔플이 최고라는 생각도 있었고.’

영원은 몸에 힘을 빼고 누워, 고통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계속 생각을 이어나갔다.

‘게임 캐릭은 무조건 솔플 되는 법사 계열. 게임이고 인생이고 솔플이 젤 맘 편함.’

‘여현이도 힐러나 딜러는 안 어울림. 아마 뭐 하나 만들라고 하면 매지션 캐릭터 생성할 듯.’

‘아닌가……? 여현이가 딜하고 내가 힐해야 우리 관계성에 맞는 건가…….’

‘흠…… 음?’

영원은 혼자 이런저런 게임 빙의 망상글을 창작해보면서 한 시간여를 더 침대 위에서 소비했다.

생각보다 더 금방 견딜 만해졌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이 정도 아픈 거야, 뭐…….’

‘견딜 수 있는 만큼을 100이라고 하면 10도 안 돼.’

들어줄 사람은 없지만 속으로 허세도 부려봤다.

그러다 무음으로 설정된 핸드폰이 침대 저편에서 수도 없이 깜빡이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발신자는 여현이었다. 잠시 고민하다 받았다.

“응.”

―통화 괜찮으신가요.

“당연. 그냥 뒹굴뒹굴하고 있었어.”

갑자기 ‘사실…… 내가 옆 차원 킹왕짱 끝판왕 먼치킨 오브 먼치킨 연금술사 대제였어.’라고 고백할 수는 없는 거고. 괜히 아픈 티를 내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으니, 영원은 평소처럼 굴기로 했다.

―저녁으로 드시고 싶으신 거 있나요.

“음…….”

영원은 몸을 천천히 뒤집어 엎드렸다.

‘씹어 먹는 건 다 토할 것 같은데…….’

영원은 고민하다 답했다.

“차가운 거? 빙수?”

입에 넣으면 녹는 차가운 게 그나마 나을 것 같았다.

‘집주인느님이 그렇게 눈치가 빠른 편인 것 같지는 않았지…….’

‘30분만 적당히 달달한 거 냠냠하다 들어와서 다시 눕자.’

영원은 딱히 본인이 대단할 걸 숨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미열이 있는 사람이 나 아프다고 방방곡곡 광고하고 다니지 않는 것처럼,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수준의 통증이라 생각했다.

―빙수요?

“응.”

―다른 메뉴 없이?

“응. 아니, 아이스크림도.”

잠시 여현이 침묵했다.

‘내 에스퍼님도 내가 빈 그릇 알아서 채워주는 정수기처럼 굴기 전까지는 고통을 매일같이 달고 사는 타입이었잖아.’

‘지금 내 쪽이 고통의 정도 면에서는 더 나은 상태인 듯한데.’

‘그리고 내 에스퍼님은 왠지 엄살 부리는 애들 차갑게 보면서 그것도 못 견디냐고 띠껍게 무시할 것 같은 인상임.’

영원은 진심으로 여현이 타인의 기분이나 신체 컨디션을 파악하는 감이 특출하지 않을 거라 편히 생각하고 있었다.

“용건 끝? 끊을까?”

―가이드님.

“응.”

―컨디션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열 있으신가요.

‘귀신이세요?’

영원은 어버버하다가 미열을 인정해버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아파……. 근데, 많이 아프진 않아.”

작게 중얼거렸다. 그다음에는 빠르게 덧붙였다.

“가이딩 때문은 절대 아니고, 그냥 감기 기운인가? 이제 봄 되니까? 아니, 아직 환절기 안 됐나? 아무튼, 감기는 사계절 질병…… 바이러스야.”

살면서 감기에 걸려본 적이 없는지라 괜히 횡설수설했다.

―죽 할게요. 삼계죽. 그거 드세요.

“…….”

―아이스크림도 사 갈게요. 그때까지 편히 쉬고 계세요.

“…….”

―지금 바로 조퇴하고 갈까요?

“……아니, 아니. 완전 괜찮아. 이따 봐. 끊을게.”

통화가 끝났다.

영원은 다시 몸을 뒤집어 천장을 봤다.

최근 며칠은 여현이 힘을 사용하지 않아 가이딩도 안 했다. 가이딩이야 그릇이 일정 이상 비면 그 다음에 하는 거니까.

‘우리…… 확실히 친해진 것 같지?’

‘아무래도 요즘 가장 절친은 서로서로지?’

‘우리 둘 다 친구 완전 없으니까.’

‘나는 그나마 요련 언니? 저쪽은 그나마 이창결 부장님?’

아프다는 투정을 부려본 건 처음이었다.

먼저 몸이 안 좋냐고 물어봐 준 사람도 없었다. 이제껏, 인생 전부를 통틀어서 단 한 번도.

영원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어봤다.

열이 났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