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집순이의 평화가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명동 게이트 종료 후 열흘 뒤, 영원은 침실 바닥에 전지 한 장을 깔았다.
팔락.
그리고는 가만히 서서 텅 빈 하얀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생각을 정리하기엔 이만한 게 없었다.
그런데 침대 위의 스마트폰이 통화가 걸려오고 있다며 빛을 냈다.
깜빡깜빡. 깜빡깜빡.
생각의 흐름이 끊겼다.
‘아무래도, 펜트하우스 라이프는 명동 게이트 전이 더 좋았어.’
며칠째 윤희유 교수가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다. 영원이 받을 때까지 줄곧 거는 바람에 벨소리는 무음으로 바꿔두었다.
영원은 포옥 한숨을 쉬고는 전화를 받았다.
“네에.”
―영원! 오늘도 저예요.
“……네에.”
용건의 요지는 보통, 주3회 아니면 주2회라도 센터에 부디 출근을 해달라는 거였다. 영원이 좋다고 하면 김여현 에스퍼는 본인이 설득해주겠다고. 영원으로서는 아주 끔찍한 제안이었다.
―혹시…….
“아니요. 여전히 몸이 안 좋아요…….”
우리나라 국가기관 및 해외 각국에서 영원에 관한 정보를 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있다고. 그러니 부디 센터에 나와 주면 고맙겠다고. 진짜 A급인지, 정말 김여현과의 매칭률이 50% 이상인지도 확인해보자며.
영원이 각종 핑계를 대며 열심히 거절하고 전화를 끊어도, 윤 교수는 다시 다른 핑계를 덧붙이며 그다음 날 또 전화를 걸었다.
핑계와 핑계의 대결.
고도의 회유, 계책, 비기, 은닉, 술수가 죄다 동원되었다. 역삼 본부의 역사를 통틀어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역대급 창(주: 부디 이틀이라도 출근하시길)과 역대급 방패(주: 죄송요 그것도 못 나가겠어요)의 전투라 할 만했다.
매일같이 수준이 드높아지는 다이아몬드 컷 다이아몬드.
‘건강이 나빠서, 가이딩으로 인한 긴장이 덜 풀려서’로 시작된 핑계는 갈수록 저 먼 나라의 판타지까지 나아갔다.
‘그런데도 포기 안 하시는 교수님은 진짜 찐인 것 같아.’
‘근데…… 내 양심은 어디에?’
‘아, 원래 없었지.’
각성자에 관하여 맺은 국제조약이 어떻고, 협정이 어떻고…… 별로 자세히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이 오늘도 이어졌다.
영원은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 귀로 들은 내용을 한 귀로 흘릴 수고마저 할 생각 없이, 아예 듣는 쪽의 고막에서 음파를 반사해냈다.
‘교수님 열정은 대단하십니다. 끝없는 학구열과 헌신이야 인정합니다만…….’
영원이 생각하기에 윤 교수는 영원을 본인의 연구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흑심도 있어 보였다.
아니, 보이는 게 아니라 너무나 명백했다.
노가다와 뺑뺑이를 강요당할 끔찍한 미래가 머릿속에서 비디오로 알아서 재생됐다.
‘안 되지, 안 돼…….’
‘어떻게 입성한 펜트하우스인데, 절대로, 절대로 제 발로는 못 나갑니다.’
‘제 발이 아니어도 못 나갑니다.’
‘꿈속에서의 수업도 진짜 힘들었단 말이에요. 그 이상은 무리무리. 사양사양.’
오늘 윤 교수는 거대한 우방국들은 물론, 그런 나라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국가 이름까지 줄줄이 읊었다.
영원은 질린 표정으로 빈 전지를 다시 봤다.
‘S급이라고 판단되면 요구가 더 빗발칠 게 뻔하지.’
‘끔찍해…….’
처음에는 은사를 대할 때와 같은 죄송한 마음이 일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뚫리지 않는 방패가 되고자 하는 마음만 남았다.
‘A급이 이 정도인데. SSS급인 걸 들키면…… 그다음은 상상하기 싫다.’
‘절대 등급은 알리지 말아야 해.’
얼떨결에 해버린 여현과의 매칭률 조정도 마찬가지였다.
‘논문 몇 편 검색해보니까 온 우주를 통틀어서 그거 할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아. 그것도 들키면 큰일 나.’
그리고 먼치킨의 감이 추가로 덧붙여 속삭였다.
김여현 에스퍼에 대하여 90.01% 범위 내에서 매칭률을 조정하는 것.
영원의 능력이 여기서 끝이 아니라면. 김여현만이 아니라 다른 S급들과도 그게 가능하다는 게 알려지면……. 국제적 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우방국들이 쳐들어올지도 몰라.’
세상은 그리 아름다운 곳이 아니니까.
세계대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 딱 한 문장만 떠올려도 피로감이 몰려와서, 그 이후의 망상 시나리오는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일단은 50.10%로만 유지하는 거야.’
어쩌다가 여현과의 매칭률을 50.10%로 만들 마음이 들었고, 그건 아주 좋은 결과를 냈다. 서로에게 고통을 주거나 중독에 빠트리지 않는 적정한 숫자라 특히 그런 듯했다.
그래서 영원은 귀찮을 일 더 만들지 말자는 생각에, 여현과의 매칭률은 앞으로도 쭉 똑같이 유지하자고 다짐했다.
‘일 만들지 말자. 집에서 쉬기만 하자.’
또한, 결국 오늘도 방패가 승리를 기록할 모양이었다.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들어가세요.”
―그래요……. 편히 쉬어요.
무패의 기록은 유지됐다.
툭.
영원은 스마트폰을 다시 침대 위에 던져버리고는 빈 전지를 마주했다.
김여현의 마나팩으로 사는 일과는 여러 가지로 만족스러웠다.
여현은 특별히 영원에게 무어라 자세한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다. 아픈 기억이 있다고 했으니, 알아서 경계하며 조심해 주는 거겠지.
‘그러고 보면, 참 세심하단 말야.’
‘내 최애, 역시, 갓-벽.’
하지만 문제는, 이대로 집에서 뻗어 있기만 하다가는 이 만족스러운 삶이 유지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집주인느님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발로 일시적으로 아주 잠시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줄 수는 있지.’
‘약속에 따라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기도 하고.’
그리하여, 근미래에 닥칠 것으로 보이는 두 가지 사건을 영원은 특히 경계하고 있었다.
하나, 비선별 러쉬.
둘, 게이트 웨이브.
기억을 쥐어짜 구성해낸 시간표에 따르면, 빠르면 한 달, 느리면 세 달쯤 뒤에 격변이 찾아올 터였다.
영원은 머릿속으로 ‘비선별’이라 적힌 부분과 ‘게이트’라 적힌 부분에 동그라미를 쳤다.
‘이제, 두 단어의 의미는 뭔지 알지.’
비선별. 세계수가 선별해내지 않은 각성자.
게이트. 괴수가 튀어나오는 차원의 문.
확신할 순 없지만 그 뒤에 ‘러쉬’와 ‘웨이브’를 덧붙인 각 용어가 의미하는 바도 대강 짐작이 갔다.
비선별 러쉬. 아마도, 비선별들이 과거에 비하여 대규모로 각성하는 사건을 의미하지 않을까.
‘세계수의 선별 없이 각성한 각성자들이 센터에 마냥 협조적일 것 같진 않아.’
게이트 웨이브. 이건 아마도, 게이트가 엄청나게 짧은 간격이나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사건을 말할 듯했다.
‘내 에스퍼님이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
김여현의 힘을 믿는다.
가이드를 얻은 김여현은, 거대한 사건에 휩쓸려 쉬이 무너지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우선은 이 몸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어쩌다 다시 S급 게이트 안에 들어가서, 똑같이 무력한 상태가 될 수는 없어.’
그래서 영원은 작게 한숨을 쉬고 붉은 펜을 들었다.
촤륵.
깨끗한 전지의 위치를 다시 조정했다.
동서남북, 옳은 방향에 맞추어서.
그리고는 바닥에 양 무릎을 꿇었다.
거대한 도형을 그리고, 그 안에 글자를 빼곡하게 나열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의 본업종사였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 연성진을 완성했다.
정말로, 오랜만에.
연성진鍊成陣.
절대 무를 수 없는 자신의 직업, 연금술사에게는 몸의 일부와도 같은 것.
‘그리고 먼치킨은 먼치킨답게, 끝판왕 신체 강화 정도는 대사 하나로 끝냅시다.’
“개방開放. 소환召喚. 합체合體.”
법칙에게, 완벽히 계량된 거래를 제안했다.
***
차라락.
“욱…….”
울컥.
차락.
[심영원, ‘■■■■ ■■’]
계약의 페이지가 펼쳐졌다.
[심영원, ‘■■■■ ■■’]
“우욱!”
쿵. 쿵. 쿵. 쿵.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듯이 뛰었다.
“우욱……. 하아, 하아.”
영원은 욕조를 잡고, 한참을 피를 토해냈다.
“으아, 하아…….”
주저앉아 헐떡였다.
쿵.
그리고는 넘어지듯 주저앉았다.
“으으……. 아으아. 하아…….”
온몸에 힘을 풀고 드러누워 헐떡였다. 그리고 읽어냈다. 그 한 문장의 결과를.
쿵. 쿵.
파지직.
[심영원, ‘■■■■ ■■’]
촤라락.
[심영원, ‘연금술사 대제’]
[현재 싱크로율 35.00%]
[목표 싱크로율 100.0% … 0시간/108시간]
먼치킨이 먼치킨했다.
“하아, 하아…….”
영원은 고통을 받아내면서 속으로 박수를 쳤다.
‘108시간만. 그래. 그 정도야, 뭐.’
고통은 깊었다. 각오한 만큼.
“하아…….”
하지만 못 버틸 건 아니다. 두통이 욱신거려, 괜히 혼잣말이 나왔다.
“나 엄청 객기 부리면서 이런 아픈 거 잘 버틴다고 했는데.”
영원은 살짝 웃기도 했다.
“아…… 역시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네.”
그러다 익숙한 푸르른 기운이 목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원래의 몸을 다시 불러들였으니, 흉터가 다시 생기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리고.
들렸다.
【나의 영원】
【무슨 바람이 들어서】
“…….”
이 존재는 세계수가 아니다.
영원이 이전부터 알고 있던 또 다른 관리자.
【회복에는 시간이 걸리겠구나】
【그 후엔 다시 이길 게임을 해야지】
이쪽의 음성은 달콤하지 않다.
차갑고 건조하다.
영원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 미미하게 웃었다.
“……게임이 아냐.”
대화는 오랜만이었다.
“내가 결국 이긴다는 게 유일한 규칙인데 그게 어떻게 게임이야.”
감정 없는 웃음이 들리는 듯도 했다.
“심영원은 무조건 승리한다는 절대법칙의 증명이지.”
여유롭게 외쳤으나, 다소 쪽팔리게도 속이 울렁거려 다시 욕조에 얼굴을 밀어 넣는 수밖에 없었다.
우욱.
영원은 피를 쥐어 짜냈다. 다시 이 몸에 진입하는 대제의 힘이, 신체의 모든 액체를 쥐어 짜낼 기세로 몸을 짓눌렀다.
“하으…….”
두 시간 뒤, 영원은 구역질을 멈추고 욕실을 나섰다.
남은 108시간이 부디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