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은 초록색 칠판을 마주한 책상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꿈속이었다. 영원도 자신이 꿈속에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꿈이 제 무의식의 발로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내 무의식이 이딴 꿈 속에 나를 있게 할 리가 없지.’
초록색 칠판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SSS급 가이딩’에 대한 정보가 적혔다.
‘내가 저런 걸 이미 알고 있었을 리도 없고.’
영원이 그 정보를 익히지 않으면 칠판의 필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슥슥.
영원이 주어진 정보를 충분히 숙지하면 칠판은 깨끗하게 지워졌다.
슥슥.
따닥. 따다닥.
그다음에 새로이 경쾌한 필기가 시작됐다.
팡!
“이건 또 뭐야…….”
파방!
몇 시간의 필기 수업 이후엔, 실기를 할 수 있는 인간 인형 같은 것까지 튀어나왔다.
사이즈가 실제 크기의 절반 정도로 좀 작기는 했지만, 분명히 여현을 본떠 만든 인형이었다.
‘귀엽…… 소장각…….’
“이거, 가지고 나갈 수 있는 건가?”
혼잣말에 대한 답은 없었다.
칠판은 다만 가이딩을 학습하기 위한 지시사항을 알릴 뿐이었다.
‘시키는 거나 제대로 하라는 거구만.’
영원은 몸을 일으켜, 가이드에 대한 실습수업을 이어갔다.
3시간.
6시간.
9시간.
수업은 끝나지 않았다.
영원이 집중력을 잃자 칠판 위로 하얀 급훈 액자 같은 것이 나타났다.
「심영원」
「밖의 시간은 더 느리게 흐르기는 하지만」
「끝내지 않으면 영원히 깨어날 수 없다」
「네 에스퍼도 만날 수 없어」
질린 표정으로 버티던 영원은 결국 펜을 들고 공부를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센터 과외수업 피해서 어떻게 도망쳤는데!’
‘쉬려고 잠들어서 꾸는 꿈 속에서 연강연강연강연강 파워연강이라니, 이거 진짜 미친 거 아냐?’
‘이미 잠들어 있는 상태라서 피곤하다고 다시 잠들 수도 없잖아!’
범인이 세계수라는 건 뻔했다. 영원은 이쪽 필드의 관리자를 좋아하기는 어렵겠다는 불평불만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잠에 빠진 지 만 이틀을 채우고서야 영원은 눈을 떴다.
“……ㅇ현아.”
그녀는 침대 옆의 소파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여현에게 힘겹게 말했다.
“배고파…….”
시간이 빠르게 흐르던 꿈속에서는 일주일이 넘는 시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 시간 동안 무엇도 먹지 못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
며칠이 더 흐른 뒤.
전담 에스퍼와 가이드 사이가 약간은 더 가까워졌을까.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야. 이전과 꽤 달라진 듯하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듯한 느낌.’
영원은 침대를 굴러다니며, 딱히 변한 것 없는 잉여의 시간 속을 유영했다.
물론 아래와 같은 연락이 오는 걸 보면 뭔가 벌어졌던 게 맞는 것 같기는 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뿐.
[요련님: 여현 에스퍼님은 원래 센터에서 난리치고 그런 거 싫어하셔서]
[요련님: 아마 스리슬쩍 표창 같은 것도 업시 그냥 지나갈 듯한데 그치만 뭐라도 필요하면 말해♡ 뭐든 마련해서 보내겠슴당♡-♡]
[요련님: 뭔가 컨디션 안 좋거나 하면 바로 말하구!]
[요련님: 넘나 멋졌따(야광봉//)]
[나: 감사링★]
꽤 오래 잠들었다 깨어난지라 이런저런 검진을 받아야 했지만 이상은 없었다. 오히려 컨디션이 너무 좋은 것 같아 놀라웠다.
특별한 일상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담 에스퍼의 성격 때문인지, 큰 지진이 지나간 다음이어도 직접적인 여파는 없었다.
게시판이나 뉴스에 들어가면 난리겠지만, 굳이 찾아보지는 않고 있었다.
정주행할 드라마가 차고 넘쳐서 그거나 보았다.
‘자고로 유명인들의 기사에는 악플이 달리는 법이니까.’
영원은 사실과 한참 동떨어진 생각을 했으나, 그녀의 생각을 교정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 멘탈이 의외로 연두부 같을 수도 있잖아.’
‘음, 그건 아닌 듯도 하지만. 아무튼 괜히 들여다보면 피곤할 것 같으니까 일단 삼가자.’
원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피할 수 있을 터였다. 영원이 머무는 펜트하우스는 고공의 견고한 성과 같았다.
한강 건너편에서 도촬을 한다고 해도 모든 유리에는 밖에서 들여다볼 수 없는 코팅 처리가 되어 있어 안전했다. 또한 지상에서 아무리 생난리를 쳐도 들리지 않을 만큼 고층이었다.
하지만 며칠째 여유를 즐기다 보니 뭔가 부족했다.
‘심심해……. 에스퍼님은 뭐 하는지 물어볼까.’
영원은 결국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나: 똑똑]
[나: 에스퍼님. 응답하라ㅎㅅㅎ]
[나: 여현아아아아]
[전담 여현이^-^: 네]
[나: 어디?]
[전담 여현이^-^: 서재에 있어요]
‘서재? 여기 서재?’
영원은 벌떡 일어났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최애가 주말 근무를 오전 중에 마치고 돌아와 바로 밑층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머리를 슥슥 정돈하고는 계단을 내려갔다.
똑똑.
“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말했다.
“나 점심 먹을 건데!”
그리고는 엄청난 추진력으로 1분 30초 만에 여현을 식탁 앞자리에 앉혔다.
오늘 식당에 차려져 있는 메뉴는 퀘사디아였다.
“근데 요즘 이건 누가 어디서 사와?”
“뭘요?”
“예전엔 직원분들이 다녀가는 것 같았는데, 에스퍼님이 귀가한 다음에는 시스템이 좀 바뀐 것 같단 말이지.”
인생 미역국, 인생 간장연어, 인생 망고빙수, 인생 게살볶음밥 오므라이스, 인생 치즈김치카츠동, 인생 김치제육볶음 등등을 차례로 영접한 경험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마 오늘 퀘사디아도 인생 퀘사디아가 되지 않을까. 치즈 좋아하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이 맛있는 걸 준비해주셨을까, 감사했다.
담당 직원이 있다면 보너스를 지급하고 싶었다. 비록 돈이 나가는 주머니는 저쪽에 있더라도.
“뭘 말씀하시는지…….”
“요리. 엄청 맛있잖아. 생일에 미역국 몇 숟갈 못 먹은 거 생각할수록 진짜 아쉽고 그러네.”
“아…….”
여현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제 취미라서요.”
“뭐가, 요리 주문하는 게? 김여현 에스퍼님 맛집 파인더로 찐 능력자시네. 에스퍼 아니어도 관련 크리에이터로 대성했겠어.”
“아니요. 요리.”
“응?”
“주문이 아니라, 요리가 취미입니다.”
“…….”
“……제 취미. 미역국 다시 끓여 드릴게요. 다 드신 줄 알고, 오늘은 다른 거 했네요.”
영원은 귀를 의심했다.
직원들이 종종 냉장고 정리도 하는 것 같았고, 다른 사람이 부엌을 쓰는 것 같지도 않아서 당연히 직원들이 사온 것이라 생각했다.
‘여태껏 살면서 누가 집에서 요리를 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당연히…….’
‘그러고 보니 배달 용기에 담겨 있지도 않았지.’
이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직접 한 거예요. 미역국도, 오늘 그 퀘사디아도.”
영원은 눈을 깜빡거렸다.
‘대체 뭘 들은 거지…….’
‘누가 날 위해 요리를 계속 했는데, 더군다나 그게 내 전담 에스퍼?’
계속 깜빡거렸다.
“중식도 좋아하시나요. 생각해보니, 해드린 적이 없네요.”
은혜로운 말씀이 이어졌다.
“좋아, 좋아해.”
“…….”
괜히 오해를 살 것 같아 영원은 헛기침을 하고 덧붙였다.
“중식. 좋다고. 너무 매운 것만 아니면.”
영원은 고개를 푹 숙이고 퀘사디아를 나이프로 슥슥 잘라 먹었다.
“근데 왜 같이 안 먹어?”
“……네?”
“김여현 에스퍼님은 하나도 안 덜어 가잖아. 생각해보니까 맨날 그래.”
식당에 준비된 음식을 가져가는 사람도 영원뿐이었다.
잠시 정적이 내렸다.
“레이더는 아시면서 이건 모르시네요.”
“……뭘?”
“링거를 꽂잖아요.”
링거?
어쩐지 최악의 시나리오가 떠올랐다.
“음식을 앞에 두고 할 얘기는 아닌데요.”
“해 줘.”
“저는 식도랑 위가 거의 없어요. 오래전에, 제 힘으로 인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
“그래서, 요리는 정말 하는 것만 취미입니다.”
“…….”
입맛이 사라졌다.
영원은 그래도 열심히 수저를 놀렸다.
“맛있어. 치즈랑 배합이 좋아.”
맛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꾸역꾸역 먹었다. 억지로 집어넣는 티는 내지 않으면서.
“못 먹는다고는 해도, 내가 먹는 걸 보는 게 나쁘지는 않지?”
“네.”
“어쨌거나 먹을 사람을 생각하면서 만들었을 거 아냐.”
“…….”
“싫지 않다면 계속 앉아 있어. 어떤 맛인지 말해줄 테니까.”
그렇게 영원은 도란도란, 소소한 음식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어제 메뉴는 어땠는지, 그 이전에는 또 어땠는지.
“오늘도 잘 먹었어. 고마워.”
그 이후엔 그를 더 가까이로 불러들였다.
계약의 본분에 충실하기 위해.
“꼭 눈 감기고 뽀뽀까지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아.”
“…….”
“머리 쓰담쓰담 해봐도 돼?”
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느릿.
‘그러고 보니 두상도 참 예쁜 것 같아.’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한쪽 눈꼬리가 참 귀여운 듯.’
이상은 찐삼촌팬 이창결의 주접은 노개연성이라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셨던 분의 생각이었다.
스륵. 슥.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머리카락이 생각보다 부들거렸다. 마약베개를 만지듯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스륵, 스륵.
‘감겨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참 귀엽……. 눈 뜨면 까망까망한 눈동자 홍채 모양이 참 이쁠 텐데……. 왜 감고 있니, 아쉽……. 암튼 이뻐, 이뻐.’
가이딩을 핑계로 사심을 채우는 영원이었다.
***
영원은 2층 유리벽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며칠 새 공기가 많이도 따듯해졌다. 봄이 성큼성큼 오고 있었다.
계절은 흐르고, 또 흘러갈 것이다. 그런 변해가는 것들에 섞여, 변치 않는 자리를 지키는 하나의 항성을 찾아냈다.
“별.”
하늘을 보고 불러보았다.
답은 없었다. 그래도 부름은 이어졌다.
“아니면 세계수.”
무자비한 너희.
“지금 보고 있어?”
결국 질문하게 됐다.
첫인상부터 위험하다고 느꼈던 그 직감은 정확히 이런 미래를 예고했다.
그래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타인의 상처와 고통에 설득되어, 너무 많은 것을 감당해주고 싶어질까 봐.
그렇게 제 호의를 받은 이는 결국 상처와 실망을 도로 안긴다. 호의가 권리인 줄 착각해서.
반하게 했던 면모들은 생각보다 금방 빛을 잃는다.
갑자기 어느 순간, 과거의 애정은 기억에서도 꺼낼 수 없게 되는 그런 뻔한 굴레가 그려졌다.
실망하다 지쳐, 아무런 애정도 기대도 남지 않을 미래.
김여현은 다른가.
알 수 없다.
그래도, 저 너머의 무엇들이 답을 당장 주지 않아도, 제 물음을 듣기 시작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궁금한 게 있어.”
결국 이렇게 물음을 던지고 만다.
“나는 저 미련한 에스퍼님이 다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두 눈으로 세상을 보게, 만들 수 있어?”
고요한 정적.
영원은 오래도록 기다리다, 다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관리자들’은 그들의 음성으로 답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답이 정말 없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침묵도 답변이다.
답을 알고 싶으면 제대로 뛰어들어, 대가를 지불하라는 의미를 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