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8화 (18/142)

사락.

영원은 감탄을 뱉어내지도 못했다.

머리가 맑아졌다.

사락.

옅은 바람이 머리칼을 스치고 갔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짧은 머리가 가볍게 흩날렸다.

영원은 원래 높은 곳에서 땅을 굽어보는 것을 좋아했다. 고층의 풍경은 심장을 공중에 붕 띄우고는 했다.

쿠궁.

콰과광.

발아래에는 지옥도. 그리고 곁에는 아름다운 하늘.

‘방금까지, 끔찍한 뭐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았는데.’

갑갑함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을지로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니, 프론트 가이딩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을 때부터, 영원은 프론트 가이딩은 절대 그녀의 적성일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가끔 이런 장면을 볼 수 있는 거라면, 어쩌면…… 가끔은 프론트 가이딩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름다운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여현이 영원을 안아 든 것은 아니었다.

“가이드님.”

“…… 응.”

“역가이딩을…… 그릇의 크기를 모르겠지만 A급이라 보고, 보수적으로 계산하면 최소 10분.”

“…….”

“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 제가 가이드님 그릇에서 10분 정도 동안 힘을 뽑아낼 겁니다.”

“…….”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서, 적절한 시점에요.”

“…….”

“가이딩은 역으로 제가 합니다. 매칭률이 낮은 가이딩에 대한 경험이 없는 경우, 역가이딩이 아니면 가이딩이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갑자기 현실감이 휘몰아쳤다.

‘심영원의 현재 지위 = 비상식량.’

제정신이 확 들었다.

‘풍경에 홀려 하X의 움직이는 성 무드를 기대한 나님…….’

‘로판 너무 읽었네.’

‘사고회로의 로판패치 반성해라. 반성해라.’

‘여기는 꿈도 희망도 없이 노가다와 뺑뺑이, 야근이 넘쳐나는 하드코어 K-현판이다.’

그 생각을 마치고 나니 긴장이 스르륵 풀렸다. 연이어 맥없는 웃음이 나는 듯도 했다.

영원은 힘을 빼고 여현의 품에 기대었다.

“그래. 편하게, 도시락이라고 생각해.”

“…….”

“마나팩 열심히 뽑아 드시죠. 주저하지 마시고요.”

톡톡. 어깨를 살짝 두드리며 말했다.

굳은 표정의 그를 보고는 미미하게 웃어주기도 했다.

“방금 멍했던 거, 무서워서 긴장하고 있던 거 아냐.”

“…….”

“그냥……. 그냥.”

여현은 영원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먼 곳을 보았다. 영원 역시 같은 방향을 보았다.

게이트가 점차 하늘로 상승하고 있었다. 아직은 게이트가 에너지를 방출할 때까지 시간이 있다는 뜻이었다.

균열의 이동. S급의 게이트에서만 보이는 현상이었다. 영원도 프롤로그에서 읽은 터라 알고 있었다.

쿠구궁.

다른 세계를 비추는 거울 같은 것이 계속하여 높이 떠올랐다.

그때 영원은 드디어 기다려온 가이딩의 기회가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알았다.

“여현아.”

빨리 끝내고 집에 가서 쉬기 위해, 이제는 고구마를 멈추고 무언가를 진척시킬 순간이.

“조금 늦었는데.”

“…….”

“생일 축하해. 그리고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알려주는데.”

“…….”

“너랑 나 사이에서, 가이딩은 쭉 내가 해. 역가이딩은 나한테 안 될 확률이 커.”

무슨 소리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는 여현의 얼굴로, 영원이 손을 뻗었다.

시선이 닿았다.

그의 고통을 거두어주고 싶다.

그가 겪어온 불행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원은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다.

스윽.

영원의 손끝이 서서히, 느리게 상승해 여현 눈가 근처로 갔다. 그리고 조금 옆으로 옮겨져, 찬 공기에 진동하는 여현의 머리카락에 스쳤다.

정말 미세하게.

극도로 짧은 순간.

저릿.

‘어…….’

콰광!

‘어……?’

게이트는 느리게 상승하는 듯했는데, 순간이동이라도 했는지 어느새 저 위에 있었다. 영원은 손을 옮겨 여현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뭐지.’

게이트 때문인가, 아니면 접촉 때문인가.

‘방금…….’

‘머리카락에 닿았을 때…….’

무언가가 감각을 관통하고 지나간 듯했다.

순식간에 굳던 여현의 반응을 생각하면, 혼자만 느낀 무엇도 아닌 듯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느꼈다. 무언가를.

쿵!

그리고 게이트가 힘을 뿜어냈다. 진입 타이밍이었다.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진입할 겁니다. 게이트 안으로.”

어쨌거나 여현의 말에 영원은 일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꽉.

영원을 안은 그의 손에 힘이 실렸다.

그렇게 곧장 차원의 균열로 날아들었다.

이제 S급 게이트가 절정에 이르러 폭발할 때까지 미지의 공간에 머물러야 했다.

‘가이딩 못 해보고 들어가네.’

‘진행 난도 극강이다, 정말…….’

어쨌거나, 영원은 두렵지는 않았다.

과거도, 잠시 후에 닥칠 게이트 안에서의 미래도.

과거는 계속 기억난다.

그러나 과거가 다시 불려올 일은 없다.

지금은 과거가 아니다.

쿠쿵.

어느새, 차원이 맞붙어있다는 지옥의 문 안이었다.

영원은 일단 게이트에 대해 알고 있던 정보를 복기했다.

게이트나 던전에는 각 등급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다.

S급 게이트에는, 기교가 아니라 에너지 대 에너지의 싸움으로 종결된다는 특징이 있다.

던전 공략처럼 굉장한 보스몹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대가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엄청난 재해가 닥친다.

화산 폭발과도 같은 엄청난 에너지 발산이 밑도 끝도 없이 일어난다. 그러니 그를 막아낼 수 있는 에스퍼가 있냐, 없냐만이 S급 게이트의 종결 여부를 결정짓는다.

그러니까 명동 게이트의 끝도 정해져 있었다. 덮쳐지거나, 보다 강한 힘으로 덮어버리거나.

게이트가 제대로 열렸다.

금방 차원의 경계에 진입했다.

‘들어왔구나.’

사방에 뿌연 안개가 있어 눈으로는 사실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지만, 영원 역시 알 수 있었다.

***

윤희유 교수는 그렇게 말했다.

‘가이딩의 제1원칙은 교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영원은 미묘한 표정으로 교수를 바라보았다.

‘육체적 거리 이전에 심리적 거리가 먼저 좁혀져야 하죠. 그렇기에 가이드가 에스퍼와 아무것도 공감할 수 없을 때 가이딩은 이루어지지 않아요.’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었다.

‘다만, 가이드의 그릇은 눈속임에 속기도 해요. 사람은 행복해서 웃지만, 역으로 다른 이의 웃음이 내게 행복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죠. 그처럼 가이드는 에스퍼와 접촉하는 행동으로 자신의 그릇을 속일 수 있어요.”

교감하지 않으나, 교감하는 것처럼.

윤 교수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등급이 상향되고 가이드의 그릇이 예민해질수록, 눈속임이 어려워지기는 해요.’

실제로 깊이 공감하거나, 접촉이 보다 밀접해져야 한다.

가이딩. 그것은 심적인 교감이 밀접할수록, 마음의 벽을 허무는 접촉일수록 쉬운 것.

영원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표정으로 생각했다.

밀접한 접촉이라는 게. 대체 무엇일까.

누군가에게는 성관계가 가장 밀접한 접촉일 테지만, 키스가 보다 더 영혼의 교감에 가깝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절절한 키스가, 무릎을 꿇고 발등에 입을 맞추는 행위가 더 경건하다 믿는 사람에게는 그 행위가 가장 밀접한 접촉이 될 것이다.

그래서 영원은 물었다.

‘밀접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가르는 기준이 뭐죠?’

답은 모호했다.

‘모든 것은 가이드의 경험과 감정, 관점에 달려 있어요.’

교감은 대단히 주관적인 것이며, 더 높은 단계에 오를수록 특이성은 짙어진다.

‘나의 사람.’

‘…….’

‘그런 인식이,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하겠죠.’

영원은 윤희유 교수가 가이딩의 본질에 대해 설명했을 때, 정말 가이딩의 본질이 그런 것이라면 자신이 그 누구도 가이딩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을까, 그렇게 그와 교감할 수 있을까.

타인이 내게 속할 수 있다고, 그런 어이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나.

만약 이 월등한 등급 덕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않으면 가이딩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누구와도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강의를 듣던 영원은 윤 교수에게 묻기도 했다.

‘가이딩은, 오랜 접촉하에서만 이루어지나요? 계속 손을 잡고 있어야 한다든가, 뭐 그런 거요.’

‘꼭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찰나의 순간에, 어떤 교감이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럴까요?’

‘아니면요?’

‘영원 가이드님은.’

‘…….’

‘교감을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

‘그에 달려 있을 겁니다.’

영원으로서는 답할 말을 찾기 힘든 물음이었다.

***

디링.

[심영원, S급 게이트로 진입합니다]

[필드의 관리자, 세계수가 S급 게이트로의 출입을 인지합니다]

S급 게이트 내 힘의 압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두통이 왔다. 영원의 인지구조가 혼란에 빠져, 장면과 장면이 엉켰다.

“……으.”

이쪽 심영원의 몸은 정말 약했다. 그 변화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한데, 게이트가 차분히 기다려줄 리 없었다.

푹.

“읏.”

실제 물리적인 공격 없이도 타격감을 느꼈다.

평정을 잃을 정도로 힘든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의지대로 되지 않는 몸이 당혹스럽기는 했다.

‘레이더, 레이더…….’

‘아, 되네. 다행.’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여현에게는 이 상황이 대단히 익숙해 보인다는 것.

그리고 이쪽 세계로 넘어오기 전부터 쓰던 레이더를 게이트 내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시야가 온통 뿌예서, 레이더가 훨씬 편하네.’

여현 역시 눈 대신 레이더를 사용하는 것 같았으니, 어찌 보면 게이트 내에서도 작동하는 게 당연하긴 했다.

챙!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데 레이더엔 어떤 고체도 걸리지 않았다. 아직 차원의 균열 중간에 있는 듯했다.

콰광!

소리로만 들리는 것과 곁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달랐다.

레이더에는 계속 미끄덩한 젤리 같은 것만 걸려 긴장했다.

‘자칫하다간 큰일 날 것 같은데.’

‘진짜 정말정말 큰일인 큰일.’

‘여기 진짜 사전훈련 없이 들어올 곳이 아니잖아……!’

영원의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괜찮습니다.”

“아…….”

“아직 붕괴의 신호는 없어요.”

“……으응.”

영원을 안고 있는 여현 역시 영원의 긴장을 느낀 듯했다.

“긴장 마세요.”

기분 탓인지, 꽤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을 믿었지만, 낯선 느낌을 마냥 편안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가이딩 필요한 순간에 말해.”

영원은 강조했다.

얼마나 큰 고통을 느낄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이 SSS급이니 역가이딩이 안 된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영원은 여현이 역가이딩이 안 돼 당황할 일은 막자는 뜻에서 말을 이었다.

“역가이딩 아니라, 내가 가이딩할 거야. 역가이딩은 안 될 확률이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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