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7화 (17/142)

삐. 삐삐. 드륵.

여현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고 있을 가이딩 기계는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여현아.”

성큼성큼.

영원이 주저 없이 접근하자 여현의 눈이 뜨였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철컥, 영원의 앞으로 멀리 있던 낮은 벽을 옮겨와 그녀의 움직임을 멈추었다.

“이거 치워.”

“……당장은 괜찮습니다.”

“누가?”

“…….”

네가 괜찮아도, 내가 안 괜찮다.

영원은 굳이 그런 설명을 부가하지는 않았다.

퍽.

대신 낮은 벽을 발로 차서 치워버리고는 금세 두어 걸음에 여현의 코앞까지 갔다.

삐. 삐삐.

그 와중에도 기기는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이전에 보았던 29대는 애들 장난이었다. 지금은 눈대중으로만 50대가 넘는다. 디자인도 더 난해하게 생긴 것들이 많았다.

“손 ㅈ…….”

영원의 행동은 빨랐다. 그러나 여현과 접촉하기 전, 굉음이 들렸다.

쾅!

“읏……!”

충격파로 영원은 순식간에 뒤로 떠밀렸다.

푹.

그래도 여현이 재빨리 대처한 덕에 영원은 푹신한 쿠션 같은 것의 부축을 받아 바로 설 수 있었다.

게이트는 가이딩할 틈을 주지 않았다.

크르릉.

콰과광!

균열 확장이 다시 일어났다.

쩌저적.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하늘과 땅이 기이한 모습으로 갈라졌다. 그 진동에 땅에 붙은 건물들이 쓰러지고, 인간들의 비명과 절규도 더 거세어졌다.

2차 쇼크의 시작이었다.

“으…….”

영원은 충격으로 어질어질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전한 곳에 계세요.”

영원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녀의 시선이 여현에게 향했다.

‘어…….’

그리고 영원은 순식간에, 정말 말 그대로 순식간에 ‘땅이 뒤집힌’ 세계를 봤다.

‘방금까지…….’

그 많던 기계들이 모두 박살 나 있었다. 절반쯤은 땅 속에 들어간 듯했다. 영원이 들어와 있던 막사도 절반은 없고, 나머지 절반은 발아래 먼 싱크홀에 떨어진 채였다.

“…….”

게다가…….

끼익-

게이트를 통해 모습을 드러낸 괴수는 그 이름처럼 괴이했다.

삐걱이는 관절, 어마어마한 크기, 비대칭적인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감춰지지 않는 포악함.

콰과광.

쿠궁.

“다치지 않게. 일단 제 말에 따르세요.”

“일단은…… 알았어.”

노타협 직진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현 상황을 보니,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가이딩을 해주겠다고 땡깡을 부려봤자 진상 짓밖에 안 된다.

“빨리 정리할 수 있지?”

여현은 소리 내어 답하지 않았다. 대신 행동으로 보여줬다.

쾅!

이번엔 게이트나 괴수가 아니라 여현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힘이 세계를 흔들었다.

여현은 아수라장을 순식간에 정리했다.

‘밸붕 먼치킨…….’

그는 무너져가는 건물을 염력으로 바로 세우고, 찢어지는 차원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앞에 새로운 바리케이드를 쳤다.

어떠한 고난과 역경 없이도.

‘언제 이리로…….’

동시에 그는 영원을 보다 안전한 곳으로 들어 옮겼다. 강력한 염동력은 엄청난 속도로 영원을 이동시켰지만, 영원이 느낀 것은 찰나의 포근한 이끌림뿐이었다.

갈라진 땅을 사이에 두고, 영원은 여현의 등밖에는 볼 수 없었다.

끼긱.

괴수가 여현을 공격하려 했고,

콰광!

그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낳기 전에, 괴수가 작살이 났다.

‘아주 그냥 녹이네, 녹여.’

여현은 영원을 구하기 위해서 쓴 포근한 힘과는 비할 수 없이 파괴적인 공격을 괴수를 향해 퍼부었다.

시선과 의지만으로, 그는 물리법칙을 흔들고 공간을 짓이겼다.

파스스.

괴수 여러 마리가 흔적도 없이 바스러졌다.

수백 미터 크기의 괴물이라도, 김여현에게는 종이인형과 다를 게 없다. 이론으로는 알았는데, 역시 경험과 상상은 달랐다.

쾅!

물론 부차적인 피해까지 모조리 김여현 혼자 막아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아악!”

민간인이 너무 많았고, 구조 현장이 너무나 복잡했다.

붕괴와 절규의 현장.

여현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지만 영원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을수록 기분이 더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이 강력해 보여도,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위태롭다.

여현이 그 위태로운 선을 걷고 있는 중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쾅!

쿵. 쿠궁.

지천을 뒤흔드는 균열에서 괴수들은 밑도 끝도 없이 튀어나왔고, 여현은 그것들을 끊임없이 파괴하고 짓이겨갔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에도 계속해서 그릇이 비워지고 있을 터였다.

쿠구궁.

명동의 백화점 본점들, 수조 원짜리 자산들이 주룩주룩 흘러내려 끈적한 정체불명의 무엇이 되어갔다.

그래도 여현이 세운 바리케이드가 있어, 사람이 그 밑에 깔리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돌아와!”

상황이 대강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이자, 영원이 다시 타이밍을 노리고 여현을 불렀다.

여현이 뒤돌았다.

“……에스퍼님 전담이 여기 있다고!”

“…….”

“빨리!”

부디 빨리 와.

영원은 일산 게이트에서 집주인느님의 귀환을 기다릴 때와 같은 마음으로 여현을 기다렸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아직 그릇의 한계는 멀었을 것이다. 영원 역시 여현의 생각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들은 매칭률도 모르는 사이였다. 50%가 안 될 확률이 대단히 높은, 매칭률 블라인드 상태. 프론트 가이딩이 적절하지 않은 조합이라는 건 초등학생도 알 터였다.

그렇지만 알 바 아니었다.

“김여현! 지금 진짜 본 스토리는 진행도 안 됐어!”

초장에 분량 잡아먹으면서 비싼 척 오지게 하지 말고 그냥 좀 와라.

영원은 속으로 그런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여현이 느리게 입술을 뗐다.

“고통을 굳이…….”

낮은 목소리는, 멀리서도 고막에 잘 꽂혔다. 듣기 좋기는 했지만, 영원은 문장의 뒷부분을 깔끔하게 씹어 먹었다.

“내 고통이 지금 뭔 상관이야!”

쿵. 쿠궁.

영원은 확신했다.

분명히 여기였다.

‘프롤로그 첫 장면, 이 순간쯤이었어.’

모든 게 여기가 소설의 도입부였음을 알렸다.

모든 묘사가 맞아떨어졌다.

“인간 가이딩이 싫다는 취향은 알겠어. 하지만 앞으로 나만은 예외여야 해.”

“…….”

“혹시 싫은 이유가 가이드의 고통 때문이라면, 적어도 나한텐 그런 걱정 할 필요 없어. 내 고통 때문에,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지 마.”

심영원.

세계수가 부여한 칭호는, 우연의 독재자.

우연치 않게 독재자가 되었다는 뜻이거나, 우연을 독재하는 자라는 뜻이거나.

어떤 뜻이어도, 결국 심영원이 독재자라는 것만은 같다.

그 이름처럼, 심영원은 정해진 길에서 모두가 벗어나도록, 여기에서 독재하며 군림할 것이다.

“김여현. 내 전담 에스퍼님.”

“…….”

그의 감각이 예민하다는 것을 안다.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굳이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다.

“난 허풍 안 쳐.”

“…….”

“그러니까 사실로 받아들여.”

기록된 시작에는 영원이 그의 곁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있다.

“너한테는 내가 필요해. 네 취향보다, 내 고통보다 그게 중요해.”

“…….”

“너도 그걸 믿어야 해.”

그리하여, 이 장면은 독재자에 의해 새로 쓰이는 프롤로그였다.

***

‘비싼 척 겁나…….’

‘내 최애가 이런 고구마였다니!’

영원은 억울한 표정으로 인이어를 받아들었다. 수신과 발신이 모두 가능한 전담 에스퍼-가이드용 무선 통신장비.

어쨌거나 프론트 가이딩을 수락하는 의미기는 했다.

“너…….”

“가이딩은 그릇이 좀 더 비고 나서 받겠습니다.”

“지금 이미 많이 비었…….”

“판단은 제가 합니다.”

여현은 영원의 부름에 답하여 바로 앞까지 다가왔으나, 힘으로 방어막을 씌웠는지 영원이 손을 뻗어도 그에게 닿을 수 없었다.

“인이어는 게이트 내부에서도 연결됩니다.”

삐빅.

착용된 기기가 페어링을 알렸다.

그리고 또.

쾅!

다시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현이 인상을 쓰며 해당 방향을 바라보았다.

영원은 다시 타이밍이 어긋났음을 알았다.

하아.

속으로 한숨을 흘렸다.

“금방 돌아와.”

여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스륵.

영원은 왼쪽 귀의 수신기를 조정하면서,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봤다.

삑-

“빨리 와.”

지직.

좋은 음질은 아니어도, 목소리는 전해졌을 것이다.

쿵. 쿵.

끼익-

쾅!

‘이거…….’

그리고 영원은 왕복 8차선 도로의 한복판에서, 짧은 시간이 한도 끝도 없이 늘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싫다.

그런 감각이 영원을 타고 스멀스멀 흐르기 시작했다.

‘나…… 망했나.’

어떤 일이 닥쳐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은 아마도…… 오만한 착각이었는지도.

와장창.

다다다다다다다다.

끼익-끼이이익!

헬기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소리, 구조차량들이 급정지하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영원은 녹아 사라지는 물질들을 앞에 두고 서서히 굳어갔다.

끼긱. 끼긱.

거대한 괴수들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그처럼 인간들의 관절이 꺾이던 어떤 장면이 기억났다.

‘심영원. 심영원.’

‘……ㄷ제.’

‘그들이 부탁한 그림을 그려 줘.’

잊고 싶었던, 그래서 잊었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불현듯 겹쳐 보였다.

센터에 있을 때에도, 센터에 도착하기 전에도 과거가 떠오르는 일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들에 기억났던 것은, 지난 세계에서 겪은, ‘정말로 잊고자 했던’ 장면들은 아니었다.

쿵. 쿵.

백화점보다 거대한 괴수가 휘어진 관절을 내디디며 땅을 녹였다.

쾅.

“꺄악!”

비명이 뒤에서 들렸다. 갑갑한 게 가슴에 얹혔다.

속이 울렁였다.

한 번 들렸던 비명이 계속 메아리쳤다.

아이들을 먼저 구하라는 외침.

고귀하고 명예로운 권력자인 나를 이대로 여기에 두지 말라는 이기적인 분노.

절망적인 상황이 닥쳤을 때 마주하게 되는 인간 군상들은, 연민만큼 자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고는 했다.

같은 세계인 느낌.

지나쳐온 장면들이 다시 반복된다는 착각이 일었다.

‘심영원!’

‘영원아!’

영원은 목을 더듬어봤다.

흉터 없이 매끈한 목은, 이 몸이 그 심영원의 몸이 아님을 알렸다.

진정해야 하는데, 심장이 더 묵직하게 뛰며 피를 식혔다.

‘그만.’

‘그만해.’

몸은 더 연약해졌다.

지금의 몸은 저쪽 세계에서 단련을 거친 심영원의 몸이 아니었다.

‘기억하지 마.’

식은땀이 났다. 영원은 갈수록 멍해졌다.

“……님.”

“…….”

“가이드님.”

이름이 불리고 있다.

“심영원 가이드님.”

쾅!

영원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빈틈없는 에스퍼 정복이 앞에 있었다.

벽 같은 남자. 그녀의 에스퍼가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마냥 배려하지만은 않겠습니다.”

“…….”

“말씀대로, 스스로 결심하신 일이니까.”

영원은 그제야 목을 가다듬고 답하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팍.

화락.

‘아…….’

순식간에 날아올랐다.

그의 품에 안겨, 고공으로.

“아…….”

물리법칙에 반해, 지표에서 수백 미터에 달하는 높이로.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멈추어 섰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