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5화 (15/142)

“아…….”

“…….”

덕질의 대상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영원은 성덕의 기쁨에 취하기 전, 미미한 향을 먼저 느꼈다.

가볍지는 않은데 깊고, 달콤하면서도 거북하지 않은 것이 그녀를 쓸고 갔다.

‘체향……?’

‘향기까지 이러기야?’

예상치 못한 감각에 정신이 흐트러져 말을 더듬었다.

“아…… 안…… ㄴ하세요.”

저번에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선보인 쿨함이 잊히고 갑자기 하찮아진 것은 아니겠지.

영원은 어벙한 인사를 건네고는 급히 걱정했다.

“네, 안녕하세요.”

여현은 다소 편안해 보이는 차림이었다. 베이지색 니트와 검은색 슬랙스.

여러 가지로 그 자신의 숨통마저 조이는 것처럼 보이던 정복보다는 압박감이 옅었다. 영원의 긴장감을 죄는 느낌도 덜했다. 그래도 존재감이 굉장한 것은 변함없었다.

예쁜 손이 움직였다. 그 손이 문을 더 활짝 열었고, 다른 쪽 예쁜 손이 영원에게 쇼핑백을 건넸다.

“맞춤 제작 끝난 가이드 정복입니다.”

톡.

“여기 둘게요.”

“아…… 네.”

기본적으로 소설이든 만화든 현실성이 있으려면 공격형 능력자들은 손이 무디고 상처가 많아야 하지 않나.

‘아니, 어떤 설정이 덧붙었든 저렇게 손이 예쁜 건 유죄야, 유죄. 무기징역감이라고…….’

‘손만 잡고 가이딩’이 띠링띠링 경고음을 울렸다.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닐 것 같기도 했다. 평정을 유지 못 하고 성덕이 된 축복에 매우 과몰입해버릴 것 같아서.

“지금 시간 괜찮으신가요.”

“……네.”

영원은 여러 상황을 각오하고 그를 따라 나갔다. 부디 지난 만남 때 잘 지켰던 체통을 잃지 않고 존엄성을 쭉 유지하기를 바라며.

타박타박.

따라 걸으며 뒤에서 보니 어깨는 역시 태평양이었다.

‘주접 그만, 이제 그만.’

‘오늘 할당량 다 채우지 않았나. 더 했다가는 내 주접에 나까지 질릴 기분이야.’

영원은 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며 여현의 서재로 들어섰다.

“편히 앉으세요.”

서재 응접 테이블 앞. 그가 상석 방향의 소파를 권했다. 영원은 사양 않고 먼저 앉았다.

“A급 50위권 내 랭커.”

“…….”

“최소 그 정도는 되실 것 같다고 들었습니다.”

영원이 서론에 긴 시간을 쓰지 않았듯, 여현 역시 그러지 않았다.

“부장님의 역가이딩이 조금도 안 먹히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니까요.”

영원은 며칠 전 이창결 에스퍼와 악수한 순간을 돌이켰다.

이창결 부장은 그날, 영원과 악수하며 역가이딩을 시도했다.

명백한 범법행위를, 에이아이가 빤히 지켜보고 있을 별관 지하 60층의 복도에서.

이쪽에서 역가이딩이 얼마나 심각한 범죄인지 생각해 보면, 공무원이 본인이 근무하는 청사에서 마약을 빠는 것과 비슷한 짓이었다.

결과만 말하자면, 다행히도 범법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약이 들어있는 줄 알고 털어먹었는데, 알고 보니 빈 봉지였던 상황이랄까.

이창결 에스퍼는 완전히 실패했다.

어중간한 A급 가이드 정도만 되어도, 힘이 조금이라도 딸려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원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아가지 못했다.

‘요련 언니네 부장님…… 들키면 바로 해직되고 철컹철컹일 수도 있었는데 은근히 도박사 기질이 있더만.’

그리고 그 정보가 시차를 두고 여현에게 전해진 모양이었다.

허풍이 아니란 걸 확실히 알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동안 기계 가이딩으로 그릇을 상당량 채워 안정을 찾아서인지 여현은 지난 만남보다 영원에게 우호적인 것처럼 보였다. 영원을 잔뜩 긴장시키던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들어 있었다.

말투나 행동도 덜 딱딱했다. 저번보다 전체적으로 어려 보이는 느낌도 있었다.

그렇다고 거리감이 확 좁혀졌단 생각이 드는 건 또 아니었지만.

“일단 센터와 관련된 것들은 제가 다 처리했습니다. 전담 지정 보고나 그런 것들. 제가 생각하기엔…….”

“…….”

“센터에 있는 수많은 감시의 시선 속에 다시 들어가는 걸 거북해하시는 것 같아서요.”

“…….”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숨기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실 집을 나가기 싫은 건 말 그대로 집을 나가기 싫어서일 뿐이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쪽에서 인물 설정을 꽤 그럴듯하게 잡아주는데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영원은 약간의 시차를 두고 답했다.

“네.”

“…….”

“가능하면 센터의 직접적인 감시를 받지 않는 장소에 있고 싶어요.”

지난 만남 때의 텐션으로 돌아왔다.

“외출하는 일 없이 쭉 이곳에만 있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영원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의자에 기댔고, 여현은 차분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았다.

서로가 상대방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가시적인 적대감은 없었다.

속을 알 수 없는 자와의 기약 없는 기나긴 동거가 예정되어 있는 지금. 그 기묘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모두 신중했다.

“숨기고 싶으신 게 있다는 건 알겠습니다.”

“……네.”

“저도 전담 가이드를 고르라는 센터의 압박에서 벗어나 편해졌으니, 당장 비밀을 털어놓으라 요구하진 않겠습니다.”

“…….”

“가이드님이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위험인자인 경우에도, 제 감시의 범위 내에 있는 게 본부에 있는 것보다 국가안보에 유익합니다.”

여현은 나름대로 여러 생각을 정리해서 온 듯했다.

“가이드님을 억지로 센터에 다시 모시고 갈 생각은 없습니다.”

논리적인 흠결 없이 적당한 속도로 말하는 모습에서는 지난번과 같은 날 선 기분을 읽어낼 수 없었다.

그래도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가면으로 기분을 가리고서 더욱 경계해야 하는 상대라 판단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니.

“원하신다면 계속 이곳에 계세요. 저 역시 그걸 바랍니다.”

“네. 그럴게요.”

영원은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제게 말씀하셨던 요구사항.”

“…….”

“원하는 대가가 분명하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영원은 멍하게 여현을 응시했다.

‘뭐야…….’

‘여기서 더…….’

‘맞아, 천국에는 천사가 살지…….’

그리고 더 요구해야 할 것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원했던 분명한 것들은 이미 얼떨결에 다 얻어버린 상태였다.

“그건, 다음에요.”

그럼에도 괜히 있어 보이는 척, 말을 흐렸다.

여현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가이딩, 매칭률 50% 미만과 해본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50% 미만은 물론, 그 이상과도 경험이 없었다. 가이딩을 하는 법 자체는 익힌 터라, 센터에서 연습 겸 몇몇 에스퍼와 매칭을 시켜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 매칭률 검사가 안 되었다는 등의 핑계를 대며 피했다. 혹시라도 SSS급 능력이 드러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영원은 다소 긴장되는 마음으로 주먹을 꼭 말아 쥐었다. 그 양손에 여현의 시선이 차례로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는 잠깐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그릇이 많이 비어 있는 것 같으면 오늘 가이딩 하자고 먼저 제안해볼까도 했는데……. 오늘은 그런 상태는 전혀 아닌 것 같고.’

‘떠나기 전에 요련 언니한테 다시 물었을 때에도, 고통만이 가이딩을 피하는 이유가 아닌 것 같다고…….’

‘인간이랑 하는 가이딩 자체를 엄청나게 싫어한다는 소문이 알게 모르게 많이 퍼져 있다고 했지.’

그래서인지 그는 바로 가이딩이나 역가이딩을 해보자고 제안하지 않았다.

오늘은 아닌 모양이었다. 영원도 괜히 거절당할 게 뻔한 시도를 해보지는 않기로 했다.

이미 저쪽에서 내쫓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으니 당장 무슨 능력을 보이지 않는다고 쫓겨나는 것도 아닐 테니까.

“저는, 가능하면 가이딩을 쭉 받고 싶지 않지만…….”

영원의 생각을 증명하듯, 여현이 먼저 오늘의 가이딩에 대하여는 선을 그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하게 되면 매우 고통스러우실 테니, 각오는 단단히 하고 계세요.”

“네.”

서재는 한동안 조용했다.

“……정말입니다.”

“……뭐가요?”

“정말 고통스러우실 겁니다.”

여현이 다시 강조했다.

영원은 특별한 대꾸 없이, 그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봤다.

자신의 고통보다, 타인의 고통이 두려운 사람은 흔치 않다.

“저보다.”

“…….”

“걱정이 많으시네요.”

“…….”

“제가 견딜 수 있다고 했잖아요. 저도 정말이었어요. 앞으로도 쭉 정말일 거고.”

영원은 괜찮다는 의미로 웃어주었다.

잔잔하긴 해도, 꽤 밝게.

여현의 앞에서는 처음으로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 위에 여현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제가 얼마 전에 알게 됐는데 말이죠.”

영원이 헛기침을 하면서 화제를 전환했다.

“네.”

“우리 동갑이던데요. 심지어 생일도 똑같아요.”

“……몰랐네요.”

“그러니까요. 출생 연도 같은 기본적인 프로필도 위키에 없으셔서, 제가 요련 가이드님한테 알아내달라고 연락했다니까요.”

“…….”

그 참에 영원은 며칠 전에 생각만 해두었던 제안을 꺼냈다.

“서로 말 놓으면 좋을 텐데.”

“…….”

“동갑 친구 사이에, 그냥 편히 말하면 좋지 않나.”

영원의 눈이 반짝였다.

“2월 17일. 심지어 같은 날 태어났던데요.”

“…….”

“생일 며칠 안 남은 거 아시죠?”

최애와 말 놓는 친구 사이가 되고 싶은 마음이 요동쳤다.

“혹시 불편해요?”

“…….”

“제가 싫으세요?”

답정너를 시전해 봤다.

“말 놓는 건 제가 바라는 분명한 요구사항 중 하나인데요. 대가 말이죠.”

오래 미룰 줄 알았던 카드를 급히 꺼내 들었다.

“저까지…….”

“네.”

“놓아야 하나요?”

영원은 잠시 고민했다. 약간 질려 있는 표정을 보니 싫다는데 강요하고 싶지는 않기도 하고.

“편치 않으시면 그건 천천히 하죠.”

“네. 그럼 먼저…… 편하게 말씀하시죠.”

“응, 그래. 여현아, 잘 부탁해.”

말은 놓기로 했으면 노빠꾸로 놓는 게 국룰이다. 괜히 망설이면 어색해지기만 하니, 뻔뻔한 철판 깔기를 초기에 잘 시전하는 게 중요하다.

영원은 그 기본적 원칙을 잘 준수하기로 했다.

“그리고 폰번 저장하자. 폰 줘.”

“…….”

“요구사항이야, 요구사항.”

여현은 큰 이의 없이 폰을 건네주었다.

잠금은 걸려 있지 않았다. 영원은 자신의 핸드폰번호를 입력한 뒤 전화를 걸어 자신의 폰에도 그의 번호를 남겼다.

영원은 센터의 다른 동갑내기 여사친-남사친 조합(주: 백율-이창결 부장님들 조합)에 비해 트렌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념하에 서로의 이름을 젊은 감성(주: 사회통념과 무관하게 오로지 영원의 관점에서)으로 저장했다.

영원의 폰에 저장된 김여현 에스퍼:

[전담 여현이^-^]

여현의 폰에 저장된 심영원 가이드:

[전담 영원이>_<]

여현은 특별히 저장명을 확인하지 않고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편히 주무세요.”

무의미한 잡담이 이어지진 않았다. 짧은 협상은 금방 끝났다.

영원은 2층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엎어졌다.

늘 쉽게 찾아오던 수마의 기운이 오늘따라 느리게 다가왔다.

내친김에 여현의 메신저 프로필을 살폈다. 예상과 일치하게, 프로필 사진엔 아무것도 설정된 게 없었다.

이후에는 저장명을 묘한 표정으로 들여다봤다.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영원은 친구들의 이름에서 성을 떼고 이모티콘을 덧붙여 폰에 저장한 적이 있었는지 돌이켜봤다.

‘중고딩 때도 폰에 이름만 저장한 친구들은 없었지. 그러면 성이 기억 안 나니까.’

‘밑도 끝도 없이 사건 사고에 휘말려서…… 학교에 거의 못 나갔던 덕분에.’

그나마 저쪽 세계에서 친했다 싶은 건, 이십 중반 이상의 이들뿐이었다.

‘처음이면 어때.’

누구나 처음은 있는 법이다. 영원은 여현의 이름 뒤에 붙인 이모티콘을 보며 미미하게 웃었다.

[^-^]

좋은 의도로 이름 뒤에 넣어둔 이모티콘인데, 어쩐지…… 약간 띠꺼운 표정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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