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2화 (12/142)

여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차디찬 시선은 흔들림 없이 영원을 관찰했다.

어떻게, 어째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추측해보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보인 것은 영원의 기대를 넘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높은 등급 기준을 충족시킬 자신이 있으셨으면 검사를 제대로 받아서 결과지 들고 오시지, 왜 그냥 오셨나요.”

핵심을 찌르는 질문.

그는 스스로 가진 약점을 인정하기보다는, 영원의 약점을 먼저 짚어냈다.

“비선별 가이드님은 대체 센터에 뭘 감추고 싶으셔서?”

영원은 답하지 않았다. 답할 의무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대로 조용한 대치 상태가 유지됐다. 여현은 여러 가능성을 재어보는 듯했고, 영원은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림 끝에 여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가이드님의 요지는 알겠습니다.”

“알겠다고 하신다면…….”

“최소 A급. 그렇단 말씀이시겠죠.”

무언은 긍정이었다.

“허풍이라는 게 들통 나면 정말 많은 걸 잃으실 겁니다.”

스윽.

서랍이 열리고, 펜트하우스의 카드키로 보이는 것이 여현의 손 위에 안착했다.

결정을 내린 여현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이유는 불분명하지만, 센터가 아니라 제 펜트하우스에 계시고 싶으신 것 같은데. 원하신다면 가서 계세요.”

영원이 바라던 고지가 코앞이었다.

“말씀과 같이, 제가 밀어붙이면 못 할 건 아닙니다. A급인 것 같다고, 적당히 둘러대는 것까지 원치 않으시는 건 아니겠죠.”

“네. A급인 것 같기도 하다고, 그 정도로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S급 비선별이면 또 몰라도, A급 비선별 가이드 정도의 신분이면 센터의 빈틈없는 주시에서 벗어나 김여현 에스퍼의 울타리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외적으로 등급 평가가 다소 상향되는 건 영원 역시 예상한 바였다. A급 정도는 되어야 김여현 전담 가이드가 된 사건에 개연성도 생길 테고.

영원은 소파에서 일어나, 그에게로 갔다.

“그럼, 뭘 대가로 바라시는지는 다음에 듣겠습니다.”

앞에 마주 섰다. 아직 키는 그의 손에 있었다.

“어떻게 부장님을 데리고 내려왔나 했더니, 수단은 협박이었나요?”

“……네.”

그가 키를 내밀었다. 영원이 카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완전히 코앞이었다.

여현이 키를 조금 뒤로 뺐다. 시선이 섞였다.

“이창결 에스퍼의 등급을 폭로하면, 이후에 누구까지 적으로 돌리게 될지 충분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마침내, 키가 영원의 손으로 넘어왔다.

꽉.

영원은 키를 쥔 손을 내렸다.

“알고 있어요. 진심으로 떠벌릴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제 목적은 처음부터 이거였으니까요.”

주머니 깊숙한 곳으로 카드키가 들어갔다. 이제 완전히 그녀의 것이었다.

“……비선별 가이드님.”

“아뇨.”

영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그냥 ‘비선별 가이드’가 아니었다.

영원이 파악한 바로는, 그녀가 세계수와 소통하게 된 시작은 일반적인 ‘선별’들과도, 또한 ‘비선별’들과도 달랐다.

자신은 분명히 이쪽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선별’되었다. 그러나 이토록 은밀한 선별은 전무후무한 듯했다. 적어도 알려진 바로는.

그리고 영원은, 알려지지 않은 역사까지 통틀어 보더라도 SSS급 각성자만은 자신이 처음일 거라고 확신했다.

[동일 등급 미존재로 SSS급 랭킹 폐쇄]

‘그게 거짓말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니 영원이 생각하기에 ‘비선별 가이드’는 그녀에게 맞는 호칭이 아니었다.

“‘비선별’이란 수식어를 붙여 저를 부르지 마세요.”

김여현의 곁에 오래 머무르려면, 그에게 특별해질 필요가 있었다.

세계수로부터 ‘영원의 헌신자’라는 타이틀을 부여받은 랭커에게 ‘영원’이라는 이름은 특별한 의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처음부터 꾸준히 말씀드렸듯이, 저는 심영원 가이드입니다.”

“…….”

“심영원. 제 이름은 ‘영원’입니다. 그렇게 불러주세요.”

영원은 이름 두 글자를 힘주어 말했다.

상당한 시간, 서로가 서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심영원 가이드님.”

그가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럼, 그만 나가주세요.”

“네. 댁에서 뵐게요.”

“……”

“그리고 저는 알고 있어요.”

뭐를.

그가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눈이 아니라, 레이더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시네요.”

‘제가 몰래 쓰는 것보다, 성능은 떨어져 보이지만.’

‘적당한 때가 되면, 그 성능을 더 올리도록 도와드릴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비밀이에요.”

“…….”

“애석하게도,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생각보다 저한테 놀라운 점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되실 겁니다.”

“…….”

“꺼져라, 후회할 일은 너나 만들지 마라, 뭐 그러신 거 떠올리며 민망해서 괴로워하실 미래가 뻔히 그려지네요.”

그가 던진 말에 상처는 받지 않았다. 그러나 되로 받은 걸 말로 갚아주고 싶기는 했다.

“아무튼 잘 부탁해요, 내 에스퍼님.”

영원이 생긋 웃었다.

영원은 그렇게 그녀 역시 성격이 좀 있는 가이드임을 알렸다. 아주 오랜 파트너가 될 그녀의 에스퍼에게.

***

달칵.

풀썩.

영원이 떠나간 방에서, 여현은 다시 쓰러지듯 소파에 누웠다.

숨기는 것이 있는 듯한 가이드를 경계하느라 예기치 못하게 힘을 소모해버렸다.

내내 시설에 갇혀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그 배경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없는 점이 많았다.

출장을 다녀와 몇 시간 동안 채워 놓은 게 소용없어졌다.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하루가 그를 괴롭혔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어지러웠다.

그런데도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어째서.

여현은 차분하게 말을 정리해가던 가이드의 행동들을 되짚어봤다. 손도 대지 않은 찻잔이 레이더에 걸렸다.

심영원.

색이 옅은 비선별 가이드에 대해 떠드는 이들이 많아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 전담 가이드가 되고 싶다고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방금 ‘고통의 크기와 무관하게 가이딩에 협조하겠다’고 했던가.

‘오래도록 자신을 곁에 두는 게 이득일 것’이라는 말도 한 것 같다.

여현은 그녀가 이제껏 고통을 제대로 겪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라 생각했다. 역가이딩 한 번이면, 두고두고 볼 미래 같은 건 언제 말했냐는 듯이 돌변할 터였다. 그렇게 저로부터 도망치고자 난리를 치겠지.

우스웠다.

아무것도 겪어본 적 없으면서 후회할 약속을 뱉어내는 게.

스으윽.

철컥. 철컥.

삑. 삐빅. 스릉. 스릉.

다시 여현의 몸에 연결된 기기들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여현은 불시에 이 공간을 헤집고 떠나간 가이드에 대해 당장은 더 오래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가 A급이든, S급이든, 감추는 게 무엇이든, 일단은 쉬고 싶었다.

그릇이 좀 더 채워져서 머리와 몸이 제대로 굴러가는 때가 오면, 그때…… 더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을 터였다.

***

‘기 빨려…… 피곤…….’

오랜만에 기 싸움 제대로 했네, 그런 생각을 하며 영원은 방을 나왔다. 문 앞엔 이창결 에스퍼가 있었다.

“저, 이제 200ㅍ…… 아니.”

속물적인 속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영원은 곧바로 말을 정돈했다.

“……아무튼 에스퍼님 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영원은 힘겹게 얻어낸 카드키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창결 부장은 이리 될 줄 예상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는 감이 없는 평범한 각성자가 아니었다.

“가이드님.”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창결이 손을 내밀었고, 둘은 악수를 했다.

악수는 두 번째였다. 지난번과는 달랐다. 이 악수에는 의도가 있었고, 영원은 이창결 부장의 의도를 알고 있음에도, 모르는 척 응했다.

이창결 에스퍼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기쁜 것 같기도, 황당한 것 같기도 했다.

잡았던 손이 풀렸다.

“아무래도, 이제 본부에서의 일정은 싹 취소해야 할 것 같죠?”

영원은 센터장의 이름으로 5년 전에 발령된 ‘김여현 에스퍼 전담 가이드 관리지침’의 전 내용을 다 외웠다.

그에 따르면, 이제 영원이 담당할 업무는 김여현 에스퍼의 펜트하우스에서 그를 기다리는 일 하나뿐이었다.

일단은 성공이었다.

1단계 목표, 완수.

***

같은 날 저녁, 매칭 랩.

긴급출동 제2부 업무를 마치고 랩에 방문한 요련은 우울한 표정이었다. 그녀의 앞에는 종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요련 가이드님. 뭐가 잘 안 됐어요?”

매칭 랩의 수석 연구원이 살며시 요련의 옆으로 다가왔다.

“……네에. 망한 것 같아요.”

영원과 붙어 지내다 보니 ‘망했다’는 말이 요련에게도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갈수록 더 침울해지는 요련에게 수석 연구원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뭐, 주업무는 이게 아니시니까, 완전히 망치신다고 해도 인사고과에 영향 없잖아요?”

“그렇긴 해요…….”

“이창결 부장님도, 긴급출동 제2부의 업무뿐 아니라, 가이드님이 자진해서 매칭 랩의 연구에 애쓰시는 거 대단하다고 칭찬도 하시던데.”

“네에…… 위로 감사합니다.”

“잘하고 계세요. 좀 더 여유를 가지실 필요가 있어요.”

수석 연구원은 양 주먹을 꽉 쥐고 파이팅 자세를 해 보였다.

“힘내세요.”

요련은 작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좋은 결과가 나오면 좋겠지만, 길게 본다고 해서 뭐 큰일 나는 거 아니잖아요.”

“그렇겠죠?”

“근데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건데요?”

수석 연구원은 그제야 요련을 우울함에 빠뜨린 ‘망한 결과’에 관심을 보였다.

“그게요. 수석니임…….”

“네.”

요련은 다시 완전히 풀이 죽은 채로 종이더미를 슬금슬금 만졌다. 수석의 시선이 제일 위에 놓인 결과지로 갔다.

“비선별 테스트 하셨었죠?”

“네.”

“그 비선별 가이드…… 심영원 가이드님 결과랑 관련된 건가요? 이 기기로 한 거.”

퉁퉁.

수석 연구원이 오른편의 기기를 건드리며 말했다.

“……네. 아무래도 소프트웨어에 오류가 있어서, 영원이 테스트 결과가 말도 안 되게 나온 것 같아요.”

요련은 더 땅굴을 파고 들어갔다.

“베타테스트는 언제 가능하려나요…….”

“결과가 안 나왔나요? 비선별 가이드 대상으로는 안 돌아가요?”

“아뇨. 그게! 돌아가기는 했거든요. 제가 선별해서 넣은 에스퍼님들 10명이랑요. 그런데 완전히 황당무계한 결과가 나와서.”

“줘 보세요. 궁금한데.”

이쯤 되니 수석 연구원도 흥미가 생겼다.

“그게요…….”

“이건가요?”

“네. 그거, 보세요.”

요련이 가리킨 제일 위의 결과지를 수석이 집어 들었다.

[매칭률 결과분석]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1위, 에스퍼 김여현(S), 90.01%(possible)]

[2위, 에스퍼 이지준(S), 73.75%(possible)]

[3위, 에스퍼 최화랑(A), 72.52%(possible)]

[4위, 에스퍼 최환성(S), 71.39%(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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