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물 에스퍼님, 나를 감금해도 돼 11화 (11/142)

천천히, 그가 눈을 떴다.

영원은 잠시 숨을 참았다. 이번엔 공간을 가득 채운 약품이 내는 향 때문이 아니었다. 저 남자가 안기는 중압감 때문이었다.

여현의 시선은 이창결을 스치지도 않고 곧장 영원에게로 와 닿았다.

“심영원 가이드입니다.”

“…….”

“제 이름을 기억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며칠 전에 주차장에서 한 번 인사드렸어요.”

“…….”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요.”

영원은 여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이창결 부장을 향해 말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부장님 조카님께 해를 가하지 않아요.”

“아무래도……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심영원 가이드님.”

“…….”

“…….”

기묘한 대치상태는, 여현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임으로써 끝났다.

이창결 에스퍼는 여현의 동의에 따라 자리를 비워주었다.

달칵.

이창결 에스퍼가 나가고, 둘만 남았다.

여현이 상체를 서서히 일으켰다. 그런 그에게 영원이 점차 다가갔다.

“가이딩 싫어하신다는 얘긴 들었어요.”

타박, 타박.

“역가이딩이 아니면 가이딩이 안 되는 에스퍼로 악명 높으신데, 그 역가이딩마저도 안 하신다고도.”

“…….”

“그런데 제가 배운 바로는, 그 기계들은 역가이딩보다 더 고통스러우면서 효율은 더 안 나온다던데…….”

어지간한 에스퍼들도 한 대도 버거워 못 견딘다는데, 무려 29대. 사실상 한 자릿수 매칭률 가이딩을 견디는 것과 다름없다.

그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고통으로 쇼크사를 해도 수천 번은 했을 것이다.

“그렇게 싫으신가요.”

답은 없었다.

드륵.

영원은 큰 소파와 떨어져 놓인 1인용 소파의 위치를 조정한 뒤 말했다.

“그래도 등급이 높은 전담 가이드는 필요하시잖아요.”

말을 마치고는 옮겨놓은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제가 되어드릴게요. 전담 가이드.”

서론에 긴 시간을 쓰지 않기로 했다.

“매칭률이 얼마나 나오든, 필요한 순간이 되면 고통의 크기와 무관하게 가이딩에 협조할게요.”

만약 가이딩을 싫어하는 게 타인의 고통을 보는 게 싫어서라면, 모든 고통을 가리고 웃으면서 가이딩을 해줄 자신도 있었다.

“어쨌거나 센터에서는 한 명이라도 가이드를 붙여두려고 할 거잖아요. 끈질긴 압박이 귀찮아서라도 결국 센터의 제안에 응해주시는 거 알아요.”

“…….”

“어차피 누군가에게 줄 그 자리, 저한테 주세요. 저는 고통이 겁나지 않아요. 무엇을 상상하시든, 그보다 더.”

그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이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고통받는 모든 생명을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은 오래전에 증발했다. 흔적도 없이.

하지만 김여현의 고통은 나누어 받을 결심을 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헌신하고 싶어서는 아니에요.”

“…….”

“제가 제안하는 건 거래고, 그 대가로 제가 원하는 건 분명해요. 그건…….”

스륵.

여현의 팔이 움직였다.

“가이드님.”

기억보다 더 잠긴 목소리. 그 무형의 것에 휘감겼다. 착각이겠지만, 정말로 무언가에 묶인 기분이 됐다.

시선도 기억보다 더 강하게 영원을 옭맸다.

“그 제안이 방문의 목적인가요.”

“……네.”

“내 전담 가이드가 되겠다고. 그래서 부장님을 설득해서 내려왔나요.”

“……맞아요.”

“제가 아는 바에 따르면, 그런 제안을 할 수 있을 만한 능력이 없으신데요.”

기억하고 있던 것과 조금도 변한 바 없이 검고 짙은 눈동자가, 저번과 마찬가지로 영원을 놀라울 정도로 긴장시켰다.

“그러니까…….”

“…….”

“용건이 끝나셨다면, 당장 꺼져주시면 좋겠습니다.”

영원은 깔끔한 거절에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당장 그녀가 감추고 싶은 진실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말해도 될 범위를 천천히 정리해봤다.

센터에서 지내는 동안, 영원은 센터 사람들이 가르치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알기 원했던 것들을 하나하나 배워갔다.

그렇게 얻고자 했던 지식은 다 털어서 얻어냈다. 단 하나만 남기고.

“에스퍼님.”

이제는 남은 하나를 가질 때였다.

그리고 지금, 마지막 하나를 줄 수 있는 상대와 만났다. 괴물이라 불리는 에스퍼. 펜트하우스와 블랙카드의 소유자.

여긴 그와 자신 둘뿐이다.

방해자는 없고, 대화할 시간도 충분하다.

“방금 꺼지라고 말씀하셨나요?”

영원은 다리를 꼬았다. 소파에 등을 편안히 기댔다.

“싫어요.”

협상테이블을 마주한 영원은 여유를 잃지 않고 속삭였다.

“저에게는 에스퍼님 상상 이상의 능력이 있어요. 저를 곁에 두시는 게 두고두고 이득일 겁니다.”

“…….”

“괜히 저를 쫓아내고, 먼 길 돌아가서 후회할 일 만들지 마세요, 에스퍼님.”

***

웃었나.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아주 미세하게.

가소로움을 내비치는 비웃음이나, 어이없다는 뜻의 헛웃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긍정적인 느낌의 반응이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히 김여현이 웃었다.

생각지 못한 반응에 영원은 놀랐고, 순간 멍해졌다.

“비선별 가이드님.”

투둑. 쿵.

‘아…….’

슥.

“시계를 느슨하게 매시네요.”

철컥.

영원의 손목시계가 한 칸 앞으로 당겨 새로 채워져 있었다. 영원의 몸은 앉아 있던 소파와 함께, 50cm 정도 옆으로 이동했다. 그의 시선을 정확하게 정면으로 받아내는 위치였다.

그런데도, 바람 한 자락 스쳐 가는 느낌도 받지 못했다.

영원은 오른손으로 시계를 찬 왼쪽 손목을 짚어보다, 풀려 있던 적갈색 아우터 소매의 단추마저 채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뭐…….’

모든 게 찰나에 이루어졌다.

칼날을 휘둘러야겠다고 생각했다면, 동맥을 끊어버릴 수도 있었겠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너를 죽일 수 있는데, 내 앞에서 후회할 일을 논하는 거냐. 그런 무언의 가르침이 들리는 듯했다.

그의 웃음은, 기대가 불어넣은 착각과는 달리 명백히 조소였는지도.

“…….”

첫 만남 이후로, 다시 그때처럼 당황하지는 않을 줄 알았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방심했다.

아무리 좋은 패를 들고 있는 타짜라도, 카드를 찢고 목을 딸 수 있는 칼을 든 자 앞에서 여유를 부리려면 신중해야 하는 법.

“비선별 가이드님.”

“……네.”

“가이드님이야말로 후회할 일 만들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영원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김여현은 정말이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래서 진심을 다해 응수해주려고, 영원은 여현이 느낄 수 없을 레이더를 흩뿌렸다.

사방으로 에너지를 쏘아, 360° 전 방향으로 사각지대 없이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 영원은 아홉 살 때부터 시각만큼이나 익숙하게 사용해온 감각을 열었다.

이제는 똑같이 당하더라도, 모르고 당하지는 않을 터였다.

사락.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에스퍼 정복 재킷이 허공에 붕 떴다.

“그래도,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는 하신 모양입니다.”

나른하게, 느릿느릿하게, 예쁜 손이 마치 보이지 않는 무엇으로부터 그 재킷을 건네받는 것처럼 움직였다.

투둑. 툭.

29개의 링거가 동시에 해체되었다. 역시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서.

스으으윽. 바퀴가 달려 있지 않은 29대의 기기가 마찰력 따윈 없다는 듯이 동시에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철컥. 삑. 드륵. 삐익-

단발의 기계음을 끝으로 사무실의 모든 기기가 정리됐다.

어느새 김여현은 에스퍼 정복을 완전히 갖춘 상태가 됐다. 풀려 있던 넥타이도 빈틈없이 꽉 조여져 있었다. 느슨했던 분위기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미쳤네.’

그리고 영원은 레이더를 통해 보았다.

조금도, 정말로 조금도 낭비되는 힘이 없었다. 새어 나오거나 과하게 소모되는 힘이 정말 한 톨도 없었다.

비유적으로 한 톨도 없다는 게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한 톨도’ 없었다.

S급.

그래, 김여현은 S급이었다. 그릇에 힘이 넘치고 넘쳐, 미세 컨트롤 따위는 필요하지 않을 S급.

‘……? ……?? ……???’

영원은 마치 수조 원 대 자산가가 신용카드 포인트 132원을 얻으려고 4만 6천7백 원짜리 떨이 상품을 신용카드 하나와 체크카드 두 개로 분할 결제하는 걸 보는 기분이 됐다.

‘무슨 S급이…….’

‘이렇게 힘을 나노 단위로 쪼개서 절약해……?’

‘있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역시 조상님들 말씀 틀린 데가 없어.’

이래서, 이렇게 힘을 운용하니까 모든 에스퍼들이 입 모아 김여현은 사차원 벽 너머의 재능충이라고 떠들어댔던 거겠지.

이 정도라서, 폭주의 문턱까지 갔다가 수십 번을 살아 돌아온 거겠지.

완벽하게 납득했다.

가까이서 아무런 필터 없이 김여현의 컨트롤을 목격함으로써 정확하게 이해했다.

“가이드님께서 저에 대해 많이 묻고 다니셨다던데.”

영원은 정신을 다잡고 여현의 말에 집중했다.

“제가 가이드를 통한 가이딩 싫어하는 거, 하지만 센터랑 타협해서 전담 가이드 자체는 3개월 이상 공백 없이 두기로 한 거, 그런 얘긴 충분히 들으셨겠죠. 그래서 그런 겁 없는 제안을 하게 되신 모양이고.”

“……네.”

“저도 비선별 가이드님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들었습니다.”

“어떤……?”

“열여섯 번째 비선별 가이드. 등급은 B급.”

“…….”

“제 전담 가이드 자리를 얻으시려면, 나름대로 센터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셔야 할 텐데. 애석하게도 B급 수준의 가이딩은 저한테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B급 가이딩은 여현의 몸에 연결되어 있던 기기 하나 정도의 효과만 겨우 낼 터였다. 영원 역시 알았다.

달칵.

여현은 찻잔 하나를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

“그러니, 상상 이상의 능력 같은 걸 논하시면서 거래를 제안하실 입장이 못 되십니다.”

“…….”

“저한테 주실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거래가 성립합니까.”

너랑 나랑 수준이 맞아야지.

행간에 그렇게 묵음 처리된 문장이 하나 스며들었다.

물론 여현이 뱉거나 뱉지 않은 날 선 문장들은 납치당하는 차 트렁크에서도 꿀잠을 잘 수 있는 멘탈킹 심영원의 멘탈 실드를 1나노미터도 넘어서지 못했다.

말 공격으로 인한 타격감은 제로.

영원은 다만, 귀에 완전히 감기는 여현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감탄했다. 매력 포인트 하나 추가.

‘에스퍼님, 성격 좀 있으시네.’

‘비주얼에 어울리는 날 선 말투.’

‘저기에 내 여자한테만 미친 듯이 다정하고 상냥하고 애틋하고 절절하면서 집착을 감추는 반전 킬링포인트만 있으면…….’

‘거기가 내 무덤자리…….’

영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망상에 빠질 때가 아니라 목적을 달성할 때였다.

“음료도 대접하면서 예의는 갖추었으니, 다 드시고 나가주시면 좋겠네요.”

여현은 볼일이 끝난 듯 돌아섰다.

슥.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 찻잔이 영원 앞으로 밀려왔다.

영원은 바로 앞까지 배달된 붉은색 액체를 봤다. 액체는 미동도 없었다.

세심한 컨트롤은 보고 또 봐도 대단했다. 심지어 시선이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기에, 눈으로 보면서 조종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한쪽 눈이 가려져 있으니까 원근감도 거의 없을 텐데…… 어떻게 이게 되는 거지?’

영원은 다시 여현을 주시했다.

그러다, 이유를 알아냈다. 옅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다음에 입술이 벌어졌다.

“B급. 다 제가 B급임을 전제로 말씀하시네요. 제가 제 자신이 B급인 걸 잊어버리고 상상 이상의 능력을 운운했을까요.”

“…….”

“그리고 센터가 어떤 기준을 들이대건, 김여현 에스퍼님이 밀어붙이려고 하면 제가 어떤 등급이든 저한테 전담 가이드 자리를 주실 수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요.”

오늘 여현에게 SSS급임을 밝힐 계획은 없었지만, B급이 아니라는 것까지는 알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에스퍼님. 제가 백율 부장님보다 먼저 이창결 부장님과 여기에 왔습니다. 이 부장님께서, 아무나 이곳에 데려오시던가요.”

“…….”

“어떤 각성자가, 알려진 것과 다른 등급에 걸맞은 힘을 가지고 있는 걸 에스퍼님은 목격한 적 없으신가요?”

눈이 마주쳤다.

A급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S급 수준의 힘을 가진 물리계 에스퍼가 있다는 걸 김여현이 모를 리가 없다. 자신의 능력을 감추는 이창결 부장. 영원은 여현이 그와 공범이라고 확신했다.

“하나가 있는데, 둘은 안 되나요?”

그는 질문의 의미를 바로 알아챌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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