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저곳에서 무의미한 뻗치기는 그만.’
‘그래, 초심자의 행운이었음을 받아들이자.’
‘이제 플랜2를 가동한다.’
영원은 새로운 계획을 구상해냈다. 남들은 다 아는데 자신만 모르고 있던 고급정보 아닌 고급정보를 얻게 된 덕이었다.
우연한 이득은 자기 전 익명으로 보고 있던 랭커(고인물) 챗방에서 손에 넣었다.
[백율(ES2): 가이딩 싫어하는 너님 조카님은 별관에 박혀 계심?]
[이창결(EA7): 응 현이 계속 여기 있어 왜?]
[백율(ES2): 친구 조카님 응답해라 ㅎㅅㅎ]
[백율(ES2): 응답해라 오바 ㅇㅅㅇ)/ 어르신께서 부르신다 안하면 떼찌떼찌ㅇㅅㅇ)//]
[백율(ES2): 챗을 보든 전화를 받든 메신저 답을 하든 뭐든 하라고 이자슥이 살아는 있냐!!!!!!!!! 이 골병난 이모할머니가 친히 얼굴 보러 가주시겠다는데!!!!!!!!!! 이 동방예의지국에서 글러먹은놈ㅡㅡ^! 장유유서는 들어봤나!!!! 써글것!!]
[이창결(EA7): ㅎㅎ??]
[이창결(EA7): ㅋㅋ]
[이창결(EA7): 율아 지금 나랑 함 해보자는 거니^^]
[이창결(EA7): 나도 별관인데 시간 많으면 내 방으로 오렴^^]
[이창결(EA7): 오랜만에 오붓하게 얼굴이나 보자꾸나^^]
[백율(ES2): 시로시로ㅇㅅㅇ 아재 시로ㅠ^ㅠ]
[백율(ES2): 무셔;;;; 힝;;;; 8ㅅ8]
이것이 정녕 10대 중반이나 20대 초반이 아니라 30대 극후반 여사친(직업: 부장님)과 남사친(직업: 부장님)의 대화인가? 이곳 21세기 대한민국에 뉴-노멀이 도래했는가?
영원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퍼뜩 놀라운 깨달음을 얻었다.
별관에 있는 ‘가이딩 싫어하는 현’이가 바로 김여현 에스퍼라는 것!
이제 보니 다른 사람일 수가 없지 않은가.
‘인천 부두에서 사이다를 내려준 요련 언니네 부장님이 김여현 에스퍼의 삼촌이라니!’
다음 날 영원은, 요련보다도 이른 시간에 기상했다. 그리고 6시에 오픈하는 본부 밖 카페에 가서 요련에게 받았던 핸드드립커피뿐 아니라 쿠키세트까지 구매했다. 교육생에게 지급된 생활비를 탈탈 털어서. 요련에게 언뜻 들은 긴급출동 2부 부원들 명수만큼.
영원은 정말로 절실했다.
“뭐야, 영원. 이거 다 뭐야? 우리 부원들이랑 먹으라고?”
“하하. 언니, 잠시만, 진짜 잠시만 부장님 뵐 수 있을까?”
“우리 부장님?”
“응. 10분만, 아니, 5분만.”
그리고 다소 부적절한 상납품을 먹은 긴급출동 제2부 공무원들의 이런저런 도움 끝에, 부장실에 노크할 기회를 얻어냈다.
똑똑.
“이창결 부장님, 안녕하세요. 심영원 가이드입니다. 저번에 한 번 뵈었었죠.”
영원은 본인이 깔 수 있는 가장 두꺼운 철판을 얼굴에 깔았다. 이번 전략에는 체력보다는 뻔뻔함과 말솜씨가 중요했다.
“어, 네. 비선별…… 심영원 가이드님?”
“네. 맞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들어오세요.”
뻗치기 전략은 폐기했다.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였다.
VVIP를 만나는 다른 방법. 낙하산을 타고 떨어져 내려가 그 앞에 사뿐히 안착하기.
“무슨 일이시죠?”
“그게…….”
이제 2라운드였다.
***
구질구질하고 처절하게 빙빙 돌면서 많은 국면을 거친 자세한 대화 내용은 생략한다.
그래도 간단히 요약하자면, 영원은 이창결 에스퍼를 상대로 아주 구구절절한 웅변을 시도했다.
그도 센터 사람답게 ‘비선별 가이드를 센터에 묶어두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테니 그 책임감을 공략하기로 했다. 가이드로서 제 역할을 다하고 싶은 열망에 고아인 제 처지의 측은함, 그리고 여현을 향한 팬심을 버무려 일장연설을 했다.
“……그와 같이, 제 조국을 구원하심으로써 제 삶에 은혜를 내려주신 그분은 불우한 제 삶의 빛이 되었고…… (중략) ……그리하여 김여현 에스퍼님을 직접 뵈면 비선별 가이드로서 센터에 길이길이 남고 싶어질 것 같습니다.”
“이럴 수가……. 가이드님은 정말로 훌륭한 안목을 가진 인재시군요.”
이창결 부장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저 세상 조카콤 환자였다. 그래서 영원은 드라이브를 멈추지 않았다.
“네, 네! 어째서 다들 김여현 에스퍼님의 위대함을 저희만큼 찬양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맞아요. 우리 현이가 좀 많이 귀엽고 이쁘긴 하죠. 그걸 이토록 잘 알아주시다니!”
‘귀엽…… 이쁨……? 손이야 살면서 봐온 모든 섬섬옥수 저리 가라셨지만, 전체적으로 다 귀엽고 예쁘다고 보기는…… 상당한 무리가…….’
영원은 고개를 드는 반항심을 꾹꾹 눌렀다.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자기 조카의 (찐, 레알 찐) 삼촌팬인 부장님의 발언을 열심히 되풀이했다.
“네, 귀ㅇ…… 이ㅃ…… 그러세요.”
덕심에 개연성은 불필요하다. 영원은 그 사실을 열심히 되뇌었다.
“그래서 딱 한 번만이라도 직접 뵐 수 있게, 오늘쯤 자리를 주선해주시면 정말정말 감사드릴 것 같아요!”
그러나 10분가량 계속된 쌍방 주접만으로는 지하 60층행 티켓을 얻어낼 수 없었다.
“미안한데, 그건 안 될 것 같네요.”
거절은 단호했다.
그 이후 이어진 생떼1, 생떼2, 생떼3 등등도 모두 거절1, 거절2, 거절3 등등만 불러왔다.
결국 영원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른 카드를 꺼내들기로 했다.
자신의 정체에 의문을 품게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위험한 시도기는 했다. 세상과 거의 격리되어 있다가 몇 주 전에 구출된 비선별 가이드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당연히 의구심을 가질 테니까.
그러나 아무리 위험해봤자, ‘9시 출근, 퇴근 없음’의 위험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부장님. 혹시 등급 상향에 대해 아십니까? 세계수에게 등급을 재부여받는 것 말입니다.”
대체 얘가 왜 뜬금없이 다나까 하면서 장르 전환하지?
이창결 부장은 딱 그런 표정을 지었다가 대답했다.
“네, 뭐…… 흔치 않기는 해도 노력으로 등급을 올리는 게 가능은 하다고 알고 있습니다. 보통의 경우 자동으로 되는 건 아니고, 특수한 조건이 필요하다고 하죠.”
“네. 각성자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과로, 세계수가 어떤 각성자의 등급을 상향시켜야 한다고 판단을 내리면…….”
영원은 이창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한 템포 쉬어갔다.
“세계수는 그 각성자의 랭킹을 더 이상 상승시키지 않고, ‘특수한 조건’을 충족시키라는 퀘스트를 부여한다고 합니다. 자세히 알고 계셨습니까?”
“…….”
이창결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부장님께 부여되었을 뭔지 모를 그 특수한 조건, 앞으로 한동안은 채우실 생각이 없으신 거죠.”
“…….”
“매우 의도적으로요.”
순식간에 대화의 키워드가 #무개연성 #로코 #성덕희망 #주접물에서 #복선떡밥회수 #엄근진 #흑막 #협박물로 바뀌었다.
“부장님.”
달칵.
영원은 인천 부두에서 챙겼던 자동차의 잔해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힘의 본질을 알고 싶어 꾸준히 탐구해왔다. 그 덕에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그날 본 A급 물리계 에스퍼의 힘은, S급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까지도.
김여현 에스퍼에 필적하는 수준은 아니더라도, 물리계 S급 한 명이 더 있고 없고는 세계 외교 정세까지 뒤흔들 요인이었다.
무엇을 위해 감춘 걸까.
‘심지어, 일산 게이트에서 S급 힘을 보이며 김여현 에스퍼를 돕지도 않았지.’
사소한 이유 때문일 리가 없다.
“제가 어깨너머로 봤는데, 상부에 올라가는 보고서에 부장님과 부원들의 힘 운용능력이 상당히 과소평가되어 있던데요. 각자의 등급에 딱 맞게 하향 조정되어서.”
이창결 부장만이 아니었다. 영원은 요련에 대하여도 같은 판단을 마친 상태였다.
그녀는 절대 C급 수준의 가이드가 아니다.
“…….”
이창결 부장, 요련, 윤 교수, 그 외 센터의 많은 이들은 요양병원에서의 실장과 비슷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들을 주시하는 심영원을 과소평가한 것. 심지어는 그 집요한 주시를 알아채지도 못한 것.
그 덕에 영원은 이번에도 전략적 우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믿지 못하는 상대가 근처에 있으신 모양이에요.”
“…….”
“2부 부원들, 윤희유 교수님, 백율 부장님이랑은 한편이신 것 같고요.”
이창결 부장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막연했던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비밀을 폭로하고 함께 황천 가자는 제안을 드리는 게 아니에요.”
“…….”
“아까 한 말 전부가 사실은 아니지만, 제가 김여현 에스퍼님을 좋게 생각하고 있는 건 맞아요. 그래서 그 전담 가이드 자리에 관심이 있어요.”
이창결 부장은 차게 식은 표정으로 영원을 관찰했다.
“……가이드님.”
“네.”
“B급 가이드의 가이딩은 S급 에스퍼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특히 여현이에게는요.”
“부장님.”
제가 방금 드린 말씀 못 들으셨나요?
영원은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
그리고 덧붙였다.
“제 랭킹을 확인하지 못하시는 건, 세계수가 아직 제게 랭킹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에요.”
비선별의 경우, 각성과 최초의 랭킹 업데이트 사이에는 항상 시차가 있다. 평균적으로는 두 달여.
비선별 각성자에게 세계수의 알람이 늦게 울리거나, 비선별 각성자가 등록을 거부하는 경우 랭킹 업데이트가 그보다 상당히 늦어지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 비선별 각성자는 본인의 정확한 랭킹은 몰라도 등급 정도는 알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그 과정을 겪어낸 이창결은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았다.
“…….”
그의 표정에 혼란이 언뜻 스쳤다. 영원은 그에게 생각을 정리할 틈을 주지 않았다.
“지금 별관 밖에선 며칠째 하이에나들이 김여현 에스퍼님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찍어 보려고 화장실도 안 가고 진 치고 있어요. 제가 가서 물고 뜯을 기사거리 던져주면 아주 곤란해지시겠죠.”
“…….”
“만나게 해주세요. 부장님께서 아끼시는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거예요.”
그렇게 영원은 낙하산 하나를 어깨에 꽉 동여맬 수 있게 되었다.
***
띠링.
―지하 60층입니다.
마침내 영원은 목표한 곳에 도착했다.
어마어마하게 깊은 지하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층고가 엄청난 공간이 나타났다. 모든 지하층이 이 정도면, 지하 60층은 사실상 지하 120층과 다름없을 듯했다.
“에이아이 콜.”
삑.
―보안등급 미달 외부인이 섞여 있습니다.
―신원을 확인합니다. 등록된 가이드, 교육생, 심영원.
“이창결 부장 권한으로, 접근 임시 허가.”
―허가합니다.
삐빅.
―심영원 가이드의 접근을 일시적으로 허가합니다. 다섯 시간 안에 퇴거하여 주십시오.
모든 두꺼운 철문들이 슥슥 막힘없이 열렸다.
똑똑.
마지막 남은 문 하나만 자동문이 아니었다.
똑똑.
이창결 에스퍼는 답이 없는 문을 다시 두드렸다.
“현아.”
“…….”
“현아. 들어간다.”
찰칵.
이창결 에스퍼가 영원에게 먼저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영원은 침을 한 번 삼키고는, 김여현 에스퍼가 있을 공간으로 발을 들였다.
‘아…….’
영원은 잠시 호흡을 중단했다.
‘약 냄새…….’
하얀 벽으로 구획된 공간의 중앙에는, 영원의 기숙사 방 절반은 덮을 크기의 검정색 소파가 있었다.
그 소파에 김여현 에스퍼가 눕듯이 기대어 있었다. 엄청나게 많은 링거를 줄줄이 몸에 꽂은 채로.
얼핏 봐도 30여 개. 눈으로 하나하나 세어보니, 그의 몸과 연결된 관이 총 29개였다.
빨갛고, 파랗고, 투명하기도 하고, 희면서 탁하기도 한 각 액체의 정체는 모두 모호했다.
그러나 저런 기계에 관하여 완전히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얼핏 배운 바가 있었다.
삐빅. 스릉. 삑. 삑. 스릉.
삑삑 소리를 내며 바삐 흘러가는 색색의 기묘한 것들 속에서, 김여현 에스퍼는 가장 정적이었다.
“멀쩡히 깨어 있어요. 병든 것도 아니고.”
“아, 네…….”
“게이트에서 나온 지도 꽤 됐고. 그냥 쉬고 있는 거예요.”
“…….”
“사람한테 받는 가이딩도, 워낙 싫어해서 스스로 거부한 거고.”
설명을 듣고 나니, 그가 수많은 기기들에 잠식당하기보다는 그 모든 것을 지휘하며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다.
표정도 차분했다. 얼굴이 대부분 복면에 가려져 있어서 드러난 건 한쪽 눈뿐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보이는 만큼은.
‘저 기기들이 예상한 그거라면…… 저렇게 평온한 얼굴이 가능한 건가.’
착장은 며칠 전의 사복과 달랐다. 클래식한 정장보다도 더 각이 살아 있는 에스퍼 정복. 셔츠와 베스트만 입고, 재킷은 저 멀리 던져져 있어서 갑갑해 보이진 않았다.
피지컬은 변함없이 우월했다. 바늘을 꽂기 위해 걷어 올린 셔츠. 핏줄이 선명히 돋아난 팔. 반쯤 풀린 넥타이…….
‘음, 여러 가지로 독보적…….’
숨 막히게 야하려면 금욕적으로 보여야 한다. 그 명제에 부합하는 진득한 분위기가 그를 휘감고 있었다.
“현아.”
이창결 부장의 부름에도 여현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가 잠들어있지 않다는 건 모두가 알았다. 반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 가만히 있을 뿐이라는 것도.
영원은 그를 이해했다. 모든 방해를 모른 척하고 누워있는 걸, 그대로 두고 싶기도 했다.
“김여현 에스퍼님. 다시 저예요.”
그럼에도 당장은 편히 쉬도록 내버려둘 수 없었다.
“얘기 좀 들어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