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염뽀짝 로판의 헤비독자인 영원은 주인공이 고통받는 전개를 싫어했다. 최악은 사이다 샤워가 약속되지 않은 답답이 고구마 구간.
자고로 주인공에겐 늘 고구마로 막힌 목을 뻥 뚫는 사이다를 계획해두어야 하는 법.
‘근데 나…… 이 소설 주인공 아니었지…….’
‘게다가 여긴 귀염뽀짝 로판 세계도 아니고.’
‘나에겐 다 계획이 없었구나…….’
탈출을 위한 빌드업을 할 자본은커녕, 단돈 1만 원도 없었다. 어찌어찌 도망치더라도 밖으로 나가서 밥 한 끼 사 먹을 수도 없는 상황.
상대에게 얕잡아 보이는 엑스트라지만 (어쩌다 얻은 SSS급) 힘을 숨기고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장기적인 전략에는 도움이 될 테니까.
하지만 지금 이대로는 상대가 부여한 캐릭터, 즉 ‘멍청이 호구’에 찰떡같이 부합될 판이었다.
‘안 되지, 안 돼.’
사실 주변의 범법자들이 검거되게 할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떠오르긴 했다. 그러나 그 이후 이쪽 심영원의 인생이 쭉 안락하고 평온하게 유지되지 않을 것 같았다.
백치인 B급 가이드도 30억 이상의 가치를 지닌 세계에서, SSS급인 게 알려진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세계관도 자세히 파악하기 전에 실험대상부터 되는 건 사양이었다.
그리고 B급 가이드인 척 어찌어찌 연기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비선별 가이드’라는 신분이 걸렸다.
‘비선별’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침대에 늘어져서 꿀 빠는 엑스트라와는 거리가 너무나 먼 키워드 아닌가.
어쩐지 금발 주근깨 소녀와 그녀를 따라 탑을 오르면서 개고생을 미친 듯이 하는 흑발 미소년이 떠오르기도 하고.
‘그런 개고생 노 땡큐. 부디 내게 건네지 말고 고이 넣어둬요.’
그렇게, 빙의한 뒤 처음으로 꿀잠을 못 자고 날이 새도록 머리를 부여잡고 고뇌하던 중, 불현듯 시나리오 하나가 떠올랐다.
영원은 급히 상태창을 띄우고 S급 에스퍼 랭킹을 확인했다.
‘김 씨, 김…….’
시선은 3위에서 멈추었다. 에스퍼 김여현.
[대한민국 S급 에스퍼 랭킹 3위/8인]
S급 랭커 8인 중 유일한 김 씨.
영원에게 소설 초반에 나열되었던 S급 랭커 8인의 이름 및 특징을 한 번에 다 외워버릴 수 있는 순간기억능력은 없었다.
‘솔직히 10화까지 읽고도 주인공 이름 하나 못 외우는 독자들 지분 상당할걸. 하지만…….’
다만, 폭주한 에스퍼가 김 씨라는 것만은 분명하게 기억이 났다.
폭주.
그건 에스퍼의 힘의 그릇이 남김없이 다 비었을 때 일어나는 재앙을 말했다.
프롤로그에 묘사됐던 최악의 폭주 장면을 읽으면서 의식의 흐름이 도미노 무너지듯 촤르륵 이어졌다.
유일한 김 씨라니, 8명 중에 김 씨가 하나밖에 없는 게 대한민국의 통계에 부합할까? 이름이 중성적인데, 여자일까, 남자일까? 아, 키가 190cm 가까이 된다니까 남자일 확률이 높겠네.
그때는 고작해야 소설이라 생각하며 그런 딴생각이나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도롱.
‘어……?’
김여현. 그 이름을 손가락이 통과하자 정보창이 떠올랐다.
‘뭐야. 하위 탭이 있잖아?’
[에스퍼 김여현, 타이틀 ‘영원의 헌신자’]
탭으로 들어가니 새로운 정보와 함께 사진이 떴다.
검은 터틀넥에 검은 정장 재킷을 입은 상반신 사진.
‘……어깨 장난 없으시네.’
우월한 월드클래스 골격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운동선수와 패션모델 사이에서 좋은 것만 취사선택해 합친 느낌.
‘190cm에 가까운 괴물이라.’
괴물이라면…… 골격, 착장으로 볼 때 금욕 퇴폐 뱀파이어나 순혈 늑대인간 족장의 유일무이한 엘리트 후계자 재질.
다만, 목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검은 복면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려 이목구비는 볼 수 없었다.
복면이 마스크처럼 코를 가릴 뿐 아니라 눈 한쪽까지 사선으로 가리고 있으니, 시야가 확보되는 건 한쪽 눈밖에 없을 듯했다.
유심히 봐도 가려진 쪽은 미세한 구멍조차 뚫려 있지 않았다.
‘프롤로그에 그런 내용은 없었던 것 같은데, 한쪽 눈은 실명한 건가……?’
그리고 교통사고 이후로 방금까지 잊고 있었던 프롤로그의 부차적인 서술들이 연이어 떠올랐다.
김여현 에스퍼는 온도를 비롯한 물리량을 뒤흔드는 자신의 힘 때문에 화상을 입어 온몸이 흉터 범벅이다. 그는 모든 가이드가 거부하는 에스퍼여서, 3개월마다 세후 3억을 약속하며 센터에서 가이드들을 넘겨받았다. 3개월간 전담으로 선정된 가이드는 김여현 에스퍼 소유 200평짜리 한강뷰 펜트하우스에서 3개월 동안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또한, 김여현 에스퍼는 워낙 금욕적인 타입이라, 가이딩을 위해서도 손을 잡는 것 이상의 신체 접촉은 끔찍하게 싫어했다는 것.
이로써 명동에서 폭주한 랭커는 김여현 에스퍼라는 게 확실해졌다.
그리고 위의 모든 정보는 고아한 빛이 영롱하게 나는 아름다운 결론으로 영원을 이끌었다.
‘오…… 꿀인데.’
영원의 눈도 화사한 빛을 냈다.
그는 가이드가 필요하고, 이쪽은 세계 유일의 SSS급 가이드다. 이쪽은 저쪽이 폭주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움을 주고, 저쪽에서는 이쪽의 비밀을 묻어버린 다음 돈과 평온, 안전을 제공하는 거래가 성립할 수 있지 않을까.
곰곰이 생각해봐도, 쌍방 모두가 손해 볼 게 없는 합리적인 계약 같았다.
영원은 형체가 없어 두드려지지 않는 김여현 에스퍼의 사진을 넘기듯이 톡톡, 터치해봤다. 더 볼 수 있는 사진은 없었다.
온몸이 화상 범벅이라, 그래서 가이드들이 거부한 걸까? 징그러워서?
솔직히, 영원은 김여현 에스퍼가 저렇게 옷을 입기만 하면 조금도 거부감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피지컬이 워낙 은혜로우셔야지.
게다가 이제껏 살아오며 징그러운 걸 피할 수 없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던가.
어쩌다가 복면을 잠시 벗은 걸 본다고 해도, 뭐.
이쪽은 비위가 워낙 강한 편이라서, 걱정되는 건 하나도 없었다. 태연한 척 연기할 것도 없이 정말로 아무렇지 않을 테니까.
끔찍한 장면과 고통을 견디는 것에 관해서라면 이쪽 세계와 건너오기 전의 원래 세계를 통틀어 랭킹 1위를 먹을 자신도 있었다. 그 사실이 퍽 자랑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하물며, 고통도 없이 그냥 징그럽게 보이는 걸 가만히 관람하는 것쯤이야.
‘그래, 김여현 에스퍼랑 딜을 하자.’
푹.
아침에 가까워지는 새벽, 영원은 푹신한 베개에 뒤통수를 폭 넣고서 계획을 구체화해갔다.
‘그런데 정확히 어디에서, 어떻게 만나지.’
영원은 상태창을 띄웠다. 분명히 이럴 때 사용할 만한 기능이 있어 보였는데.
[랭커 채팅]
[대한민국 하이 랭커(S~A100) ★고인물★ 챗 - 익명가능]
S급이거나 A급 랭킹 100위 이내인 랭커밖에 참여할 수 없지만, 위 구간에 속하는 랭커라면 에스퍼든 가이드든 익명으로도 참여할 수 있는 채팅방을 열었다. SSS급이라면 당연히 접근 권한이 있을 터였다.
[SSS급 가이드 심영원, 참여 조건에 부합합니다]
[익명으로 참여하시겠습니까? Y/N]
‘익명으로 참여하면 누구인지 모르기는 하겠지?’
‘근데 갑자기 익명 누구냐고 물어보면 곤란할 것 같은데…….’
‘고인물★’이라는 수식어가 영원을 조금 더 긴장시켰다.
영원은 짧은 고민 끝에 Y를 눌렀다. 그러자 홀로그램이 위로 생성되었다.
[익명8이 대화에 참여합니다/ 참여자 총 24명]
그리고 영원은 미친 듯이 빠르게 쏟아지는 채팅 폭포를 마주했다.
조금 전 짧은 고민이 무색하게, 익명8에게는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백율(ES2): 아 이 XX들 그냥 다 쓸어버리려구ㅏ]
[이창결(EA7): 술 좀 그만 마시고 집에 들어가라]
[강화연(GS3): 저 이제 퇴원했어요.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요?]
[이창결(EA7): 나도 괜찮아. 현이는 연락은 안 받는데 어쨌거나 자기 집으로 돌아갔으니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생각 중]
[강화연(GS3): 다행이에요. 걱정 많이 했는데, 푹 쉬세요. 저도 좀 더 쉬려고 해요]
[진나진(GS5): 나도 퇴원! 쌩쌩하니 걱정 ㄴㄴ]
영원은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채팅을 감상했다.
두세 개쯤 되는 대화 주제가 중구난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 시간대를 고려하면 어마어마한 활성도였다.
E와 G는 에스퍼/가이드의 구분인 듯했고, 그 다음 알파벳은 등급, 그 뒤의 숫자는 랭킹으로 보였다.
채팅방에는 익명으로 들어온 이들이 꽤 있었으나, 채팅을 실제로 작성하는 이들은 거의 본명 사용자였다.
[진나진(GS5): 퇴원기념 프론트 가이딩 뛰려는데 강서 던전팟 없나? 여의도 부근 선호함]
[백율(ES2): 나! 나!]
[진나진(GS5): 주정뱅이는 사절-_- 여자탈 쓰고 속은 아재인 너님은 XX사절^-^]
[김지설(EA19): 나진 누낭♡ 저 지금 텨가욧!! >ㅅ<]
[김지설(EA19): 오데로 가까용♡ㅎㅅㅎ]
[백율(ES2): ㅇㅅㅇ]
[백율(ES2): ㅠㅅㅠ]
영원은 채팅을 가만히 보다가, 김여현 에스퍼와 랭커 채팅을 통해 의사소통하는 건 우선 백업플랜으로 두기로 했다.
랭커와의 개인 채팅을 시도하는 건 가능해 보였지만, 그랬다가는 너무 많은 정보가 노출될 테니 당장은 주의하는 게 나았다.
비선별 B급 가이드로 판별을 받았는데 사실은 SSS급 랭커라는 걸 곧장 알리면, 숨겨진 패를 대가 없이 오픈해버리는 실책이 될 가능성이 컸다.
게다가 마침 사이다를 마련할 적절한 방법도 떠올랐다. 그때까지 고구마를 피할 수 없다면 그동안 고구마를 맛있게 포식해주면 되지.
냠냠.
고답이가 싫은 거지 고구마는 맛있으니까. 달콤하고, 건강에도 좋고. 섬유질과 칼륨, 베타카로틴이 풍부한 국민 건강식품!
영원은 멍하니 천장을 보다가, 오늘 점심에는 고구마 맛탕을 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잠들기 전, 스케치북을 꺼내 고구마 맛탕을 열심히 그렸다. 아침에 출근할 간병인님께 의사가 부디 잘 전달되도록.
***
스윽.
‘미안요.’
같은 날 오후, 영원은 낮잠에 빠진 간병인의 폰을 슬쩍했다. 그리고는 발소리를 죽인 채 화장실에 들어갔다.
달칵.
얼마만의 폰 영접이란 말인가.
모바일 통신 속도 세계 1위에 이르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찐국민으로서, 일주일이 넘게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고도 정신과 신체가 멀쩡하다는 게 놀라울 노릇이었다.
영원은 슥슥 빠르게 잠금을 해제했다.
잠금해제 패턴은 어깨너머로 이미 파악해 둔 상태였다.
우선은 최근의 이슈를 파악하기 위해 검색부터 시작했다. 중요한 상식을 알아두고, 계획에 혹시 모를 위험요소가 없나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톡. 톡톡톡톡.
영원은 매우 빠른 속도로 검색하고자 했던 목록의 리스트를 하나하나 지워갔다.
현 대통령의 이름이 다르다. 그 전도, 전전도 다르다. 정당 이름까지 모두 생소하다. 유명 연예인의 이름도 거의 다르다.
그러나 21세기 이전까지 인류가 밟아온 역사의 맥락은 큰 틀에서 일치했다. 흔치 않지만, 이름이 변치 않은 역사 속의 인물들도 있기는 한 것 같았고.
또한 노란색 메신저, 초록색 검색창 등 익숙한 국민 플랫폼도 그대로였다. 작가명이 미묘하게 다른 것 같아도 소설, 연극, 영화 등도 비슷한 고전이 엄청나게 많았다.
‘역사를 만들어낸 개개인은 다소 다를지라도, 결국 인간이 따라 전진하는 역사의 철로는 이미 건설되어 있다는 컨셉인가?’
물론 역사가 분기점을 맞아 완전히 어긋나버린 시점은 존재했다.
시기상으로 정확하게 2001년, 21세기의 시작을 기점으로.
영원은 각성자에 관해서도 검색했다.
[에스퍼]
제일 상단에 뜨는 정의는, ‘그릇의 힘을 사용하는 초능력자.’
[가이드]
마찬가지로, 검색 결과로 뜨는 제일 상단의 정의는, ‘에스퍼의 그릇을 채우는 자.’
영원은 그 외의 중요정보도 속독한 뒤 다른 키워드를 더 찾아보았다.
[인신매매]
[가이드매매]
[마피아]
[조폭]
[대한민국 범죄 발생률]
역시. 자랑스러운 치안의 국가 대한민국.
세계에서 가장 S급 및 A급 각성자 비율이 높은 국가. 자진해서 센터에 소속된 각성자의 비율은 그야말로 압도적.
‘……다소 부끄럽지만, 작가님께서 국뽕 들이켜고 쓴 현판소의 K-패치가 이 어려운 걸 또 해냅니다.’
톡톡톡톡.
영원은 검색을 멈추지 않았다.
[검거율]
[센터]
[가이드 인신매매 신고]
Q. 가이드 인신매매가 이루어질 개연성 있는 상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나요?
A. 각성자 신고센터에 신고하시면 됩니다. 신고번호는 국번 없이 XXXX.
마침내, 영원은 계획이 스무스하게 풀리기를 기대하며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예. 각성자 신고센터입니다.
“제보를 하나 하려고 하는데요.”
영원은 작게 속삭였다.
―말씀하세요.
영원은 밖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없는지 주의했다.
“어…… 반포각성자요양병원 부근에요, 아마 시간은…….”
매우 다행스럽게도, 21세기 대한민국은 여기나 저기나 범죄 조직에 엿을 먹이기 위해서는 전화기 하나만 있으면 되는 국가였다.
게다가 검색을 하며 파악한 바로, 가이드 인신매매는 이쪽 세계의 정부들이 가장 절실하게 소탕하고자 하는 범죄인지라, 허위신고라며 출동하지 않을 가능성도 극히 낮아 보였다.
“네, 네. 넘기는 위치는 외진 부두라고 했어요.”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매우 상냥하고 사려 깊었고, 대화는 무리 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거기서 문제가 그칠 리 없지.
진짜 문제는 그다음에 올 것이다.
뚝.
영원은 통화를 마친 뒤 통화기록, 검색기록 및 일부 쿠키를 삭제했다.
그 이후, 영원은 다소 낯선, 거울 안의 심영원을 마주했다. 긴 머리카락은 팔꿈치에 닿을 정도로 치렁치렁했다. 여태껏 속옷 후크에 닿을 길이로도 길러본 적이 없었는데.
‘보기에 나쁘지는 않아. 씻고 말리는 게 귀찮아서 최악이지만.’
변하지 않은 건, 언뜻 회색빛이 섞인 것처럼도 보이는 눈. 핏줄이 푸르게 비칠 만큼 창백한 피부.
영원은 굳은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래도 많이 검어진 줄 알았는데, 화장실 조명이 밝아서인지 색이 흐렸다. 매일매일 뿌리염색을 하는 거냐고 오해받던 10대 시절이 떠올랐다.
스륵.
영원은 불필요한 상념을 떨치며 닫힌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