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망한 듯.”
돌아가신 할머니의 말씀엔 일리가 있었다.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
심영원은 평소처럼 배달앱이나 돌렸어야 했다. 열흘 동안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간 사실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는 안 됐다. 토핑 가득 뚱뚱이 유부초밥을 포장해와야겠다고 집을 나서서는 절대로 안 됐다.
왜냐면…….
쾅!
그래서 차에 치였거든.
또 영원은, 차에 치이기 전에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갑자기 팝업으로 뜬 신작 소설을 읽어서도 안 되는 거였다.
그냥 침대에서 읽던 평화롭고 뽀짝뽀짝한 육아물 로판이나 계속 정주행 달렸어야 했다.
이건 왜냐면…….
“헉.”
그래서 그 소설에 빙의한 것 같거든.
무려…… 초반 3화밖에 안 읽은 현판에.
기왕이면 귀염뽀짝 여주 부등부등 로판이나 보고 있었을 것이지, 하필이면 평소엔 관심도 없던 현판, 현판이라니……!
프롤로그부터 개고생을 퍼 드시는 S급 랭커들 및 이하 기타 등등의 이미지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사실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어 잘은 모르겠지만) 현판의 스테레오 타입이란 노가다 및 뺑뺑이가 아니던가.
싫어, 개싫어. 절대 사양. 핵 사양.
제발 돈 많고, 출퇴근 안 하고, 안 유명하고, 존재감 없고, 주변에 잔소리꾼 없는 공기 같은 엑스트라여라.
하지만 운명은 친절하지 않았다.
[심영원, 필드 ‘대한민국’에 최초진입]
[특수 SSS급 가이드 한정, 필드 전체 각성자 선별 예고 및 공지 생략]
[선별, 심영원]
[가이드로 각성합니다]
[대한민국 가이드 랭킹 SSS급 1위/1인]
[세계 가이드 랭킹 SSS급 1위/1인]
[동일 등급 미존재로 SSS급 랭킹 폐쇄]
[SSS급 이하 인터페이스 전체 접근권한 부여]
이거 다 뭐야?
게다가, 거울 보니까 피부 겁나 좋아졌어.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눈도 좀 커지고 코도 약간 높아진 것 같은데…….
메인 캐릭터들은 보통 이런 버프 받지 않던가……?
아무래도 현판 소설에서 공기 같은 엑스트라로만 남을 캐릭은 아닌 것 같다.
“아니야……. 더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
지나치게 스펙터클했던 만 20세 무렵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필드의 감시자, 세계수가 세계 유일의 SSS급 가이드를 축복합니다]
[패시브 속성, 타이틀 ‘우연의 독재자’가 부여됩니다]
“이거…… 꿈이죠?”
[필드의 감시자, 세계수가 응답합니다]
【아니다】
믿을 수 없게 달콤한 음성이 다녀갔다.
덜컥. 쿵.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감각.
끔찍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방식의 소통.
심장이 진동했다.
정말로…….
어쩌다가 여기로 소환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제대로 망한 게 아닐까.
***
대한민국 하이 랭커(S~A100) 익명게시판
[질문글: 오늘 반포대교쪽 오후에 좀 이상한 거 있지 않았냐???
제목이곧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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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익명1: ??
└작성자: 논현 가려고 고터 지나가는데 좀 싸하더라고
└작성자: 대한민국 필드 최초 오픈 당시 느꼈던 세계수의느낌적인느낌느낌?
└익명1: 오후에 서초에 있었는데 몰겠는데
익명2: 어김없는 설정충 등판!ㅎㅇㅎㅇ
익명3: 뻘글에 과몰입은 말아주세요!!(게시판 정화♡>ㅅ<♡데헷)
익명4: ㅇㅣ태원에 종일 잇엇는데 남쪽동네 ㅇㅣ상한 거 1도 업엇슴
└작성자: 기분탓인가......
└익명3: ㅇㅇ
작성자: ㅇㅇㅋ 다들 ㅅㄱㅅㄱ
작성자: 좀이따 글 펑함]
(위 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제1장
유일무이 SSS급
영원은 유독 짧았던 어제를 회상했다.
처음 눈 뜬 곳은 1인실 병실이었다. 그래서 교통사고 후 119가 잘 출동했구나, 생각하며 어딘가 부러졌을 몸을 살폈다. 그런데 웬걸……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가 없었다.
‘뭐지……?’
‘이상…….’
그다음엔 환자복의 로고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보통 구급차가 환자를 태워가는 곳은 대형병원일 것이다. 그런데 로고 옆에 쓰인 이름은 ‘반포각성자요양병원’. 그런 대형병원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싸했다.
촤라락.
밖을 보려고, 창을 가린 블라인드를 걷었다.
저게 말이 되나.
멀리 보이는 거대한 물기둥.
“…….”
횡단보도 앞에서 읽고 있던 소설의 내용이 떠올랐다.
법칙을 거스르는 게이트, 초능력을 사용하는 에스퍼, 접촉으로 에스퍼를 치유하고 통제하는 가이드, 뭐 그런 것들.
마침 로고에 적힌 병원 이름도 ‘각성자’ 요양병원이었다. 소설에서는 에스퍼와 가이드를 합하여 각성자라고 칭했다.
“하…….”
개인실에 딸린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을 확인했다. 거울 속의 여자는 심영원이기는 했다. 언제나 그렇듯 색소가 옅은 외모의 심영원. 그러나 단발머리가 아닌 심영원. 가발을 쓴 것도 아닌 심영원. 피부가 더 깨끗해진 것 같은 심영원.
영원은, 어쩌면 부러진 뼈가 다 붙고 머리카락이 이만큼 자랄 때까지 잠에 빠져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려면 링거라도 팔에 꽂고 있었어야지.
그러다가…… 도로롱, 도롱. 이상한 알람이 울렸다. 어딘가 외부가 아니라, 머리 안에서 울리는 것만 같은 소리였다.
[심영원, 필드 ‘대한민국’에 최초진입]
[세계 가이드 랭킹 SSS급 1위/1인]
[동일 등급 미존재로 SSS급 랭킹 폐쇄]
홀로그램 같은 것이 눈앞에 좌르륵 생겨났다.
“망한 듯…….”
후회와 혼란이 밀려오는 와중, 끔찍하게 달콤한 목소리의 속삭임을 들었고.
잊으려고 애쓰고 있던 과거의 몇 장면을 회상했다.
‘세계를 구해.’
‘영원, 평화를 원한다지 않았나.’
과거에 영영 묻힌 줄 알았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듯했다.
영원은 표정을 굳힌 채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손을 댔다.
벌컥.
그 뒤엔 갑작스레 병실에 침입한 낯선 중년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그는 귀신을 본 것처럼 굳었다.
스륵.
영원은 다리에서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피곤함이 밀려왔다.
“영원아, 심영원……!”
“어…….”
“의사! 의사쌤 불러와요!”
남자가 병실 밖을 향해 소리쳤다.
노곤했다. 시야각이 천천히 좁아졌다. 남자의 구두가 다가왔다. 발이 반짝반짝하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의식이 끊겼다.
***
꼬박 하루를 잤다. 영원의 이름을 외쳤던 중년 남자의 말에 따르면 그랬다. 일어난 뒤에는 반나절 넘게 의료진의 감시하에 침대에만 있었다.
“기분은 좀 괜찮으세요?”
“아프신 곳은 없나요?”
영원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저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소설 도입부에 SSS급 가이드에 대한 사소한 단서라도 있었는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아쉽게도 특별히 떠오르는 정보는 없었다.
세계관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가이드버스라는 세계관을 다룬 현판이라는 사실 정도만 선명히 기억났다.
세계 곳곳에 예고 없이 ‘게이트’라는 차원의 균열이 열려 괴수가 튀어나오고, ‘에스퍼’들이 초능력으로 괴수를 퇴치하며, ‘가이드’들이 에스퍼들의 폭주를 막고 힘을 회복시킨다는 설정.
그 외에, 히든카드 같은 특별한 설정은 생각나는 게 없었다.
영원은 착잡한 표정으로 병실 천장을 눈에 담았다.
‘책 빙의를 했는데 정보력이 소설 속 일반인1 수준이라니. 노어이, 어이레스…….’
그나마 고급정보처럼 느껴지는 건 두 가지 정도였다.
(1) 프롤로그에서 S급 에스퍼(아마도 김 씨?)가 가이딩을 제때 받지 못하여 명동 한복판에서 폭주했다는 것.
(2) 그게 뭘 가리키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앞선 사건 이후 ‘비선별 러쉬’와 ‘게이트 웨이브’가 연이어 터졌다는 것.
그런데 세계의 멸망이나 거대사건은 둘째 치고,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다. 이쪽 세계의 ‘심영원’이라는 인간을 둘러싼 사람들은 모두 필요 이상으로 꺼림칙했다.
“영원아, 혹시 조금이라도 이상한 부분이 있으면 말해.”
이상한 부분이요? 전부 다요.
물론 영원은 그렇게 답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저 남자가 영원보다 꽤 연장자인 것 같은데, 말을 놓아도 되는지, 존댓말을 써야 하는지마저도 모르겠는 터라 목이 아픈 척 콜록대며 고갯짓으로만 의사를 표시했다.
“없다고? 그래? 그럼 더 편히 쉬어. 애니메 더 틀어줄 테니까 그거 보고.”
“…….”
“공주님이랑 왕자님 나오는 거. 여기 그림책도 있고.”
영원은 저 남자가 기억하는 심영원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도 몰랐다.
다만 남자의 깔보는 눈빛,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를 통해 확신했다. 분명히 ‘이쪽 심영원’은 환자이기에 앞서 그녀의 주변인들에게 상당히 미숙한 인격체로 여겨지고 있다고.
“어. 말해. 심영원 깨어났어.”
특히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소리를 들은 뒤로는 확신이 더욱 깊어졌다.
“똑같지, 뭐. 먹고, 누워 있고, 말 안 하고. 거의 뭐, 벙어리야. 등신.”
남자는 영원에게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지능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당장은 아직 오케이가 안 떠서. 어, 어. 더 가둬두려고. 좀만 더. 상태는 깨끗해.”
촉이 안 좋았다.
게다가 여기는 ‘각성자’ 병원인 듯한데, 누구도 심영원에게 심영원의 능력에 관하여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외에도 이상한 점은 많았다. 심영원의 유일한 보호자처럼 보이는 남자는 그녀에게 이쪽 세계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스마트폰 및 각종 전자기기를 하나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아픈 곳이 없어 보이는데도 언제 퇴원할 수 있다는 말도 해주지 않았다.
“다음엔 이거 보자. 이건 탐정 놀이 나오는 거야.”
대신, 초등학생들이나 좋아할 애니메이션만 틀어줬다.
분하지만…… 솔직히 재밌긴 했다.
그래서 거의 10기에 달한 분량이 쌓여 있는 애니메이션이나 정주행하면서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식충이 취급받는 거 사실 처음도 아니지 않냐고 스스로 위로하며 침대 생활을 좀 더 누리기로 했다. 밥도 환자식이 아니라 배달이나 포장 음식이라 맛있기도 했고.
의료진이나 남자의 언행을 통해 이 병실 안에 감시카메라가 없다는 건 확인한 터라, 혼자 있을 때는 상태창을 몰래몰래 조작해보기도 했다.
디링. 디링. 도로롱.
다행히 조작법은 직관적이었다.
‘환경설정 어디? 아, 거기.’
‘효과음 일부 무음설정……. 투명화/화면 내리기…….’
디테일까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에스퍼 랭킹」, 「가이드 랭킹」, 「랭커 채팅」 같은 탭들도 대강 어떤 용도인지 알 것 같았다.
처음 깐 스마트폰 앱이라도 대충 3분만 띡띡 터치해보면 대충 느낌이 오지 않던가. 상태창은 딱 그런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조작법을 대강 파악하는 데에는 30분도 차고 넘쳤다. 감시의 눈이 있을 때는 괜히 이상한 짓을 하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었던 터라 조금 더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여보세요. 응, 응……. 며칠 전에 일어났어.”
그러다 일주일쯤 지났을 때, 영원은 남자의 통화를 또 엿듣다가 걱정했던 사건의 타임 어택이 드디어 시작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여전히 똑같이 백치야.”
걸걸한 웃음소리.
“비선별 가이드야. 등급은 판별했지. B급 정도. 20억? 더 올려. 30에 딜하자고 해. 어, 어.”
다시 웃음소리.
“어차피 멀쩡히 머리 돌아가는 백업 가이드가 되지도 못해. 프론트는 말할 것도 없고.”
파편적인 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주변인들의 머릿속에 있는 심영원은 백치다.
그 백치는 얼마 전에 저들이 ‘비선별 가이드’로 칭하는 가이드로 각성했고, 그 수준은 B급 정도로 판별되었다.
그리고 지금 저 남자는 이 반포각성자요양병원에 존재하는 위법자들의 조력을 받아 심영원을 해외로 팔아넘기려 하고 있다.
“밀항 도울 선장 수배해놨어. 국제여객선. 다음 목요일, 19시 출항. 화물로 집어넣어서 띄울 거야. 넘기는 건 더 외진 부두에서 하고. 어디냐고? 그야, 청도.”
목적지는 중국, 칭다오.
아, 그렇게 둘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