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화 〉 IF: 거짓으로 점칠된 봄.
* * *
IF: 만약 미영이가 현수의 아이를 가진다면?
기뻤다.
그가 나와 함께 죽어준다니.
내 봄이 같이 나와 함께 죽어준다니.
사랑스러운 내 봄.
아아.
내 봄.
아니야.
이게 아니야.
나는 봄을 원해.
영원히 나를 감싸줄 봄.
나는, 영원한 봄을 원해.
*
드르륵.
어두운 밤.
어느덧 길던 하루가 끝나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난을 토로하며 잠에 든다.
하지만, 위중한 환자들이 있는 병원은, 불빛이 줄어들지언정, 사그라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지치며, 졸리기 마련.
그렇게 되면 아주 자연스럽게 바짝 세우던 정신도 노곤해질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 틈을 노렸다.
“.........”
침착하고 조용하게, 나는 병실을 열었다.
그래, 현수가 입원한 그 병실.
그 누구도 모르게, 아주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다시금 문을 닫았다.
“............”
달빛이 병실을 비추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고요하게 잠든 현수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현수의 곁으로 다가갔다.
“...수야..”
“........”
“현수야…”
“현수야…일어나…”
나는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으음…으…음…음? 어…어어..?”
반쯤 잠겼던 동공이 점차 커졌다.
놀람과 당혹이 담긴 그의 눈동자.
“미…미영 씨가 여길 어떻게…!”
“쉿.”
어느새 번쩍 뜨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의 입을 급하게 틀어막았다.
“.....있지. 나, 기뻤다?”
기뻤다.
네가 나를 사랑해줘서.
내가 추잡하게 몸을 팔았어도.
내가 남자였음에도, 나를 사랑해줘서.
“나, 너무나도 기뻤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준다는 것이, 이렇게나 기뻐.
있지.
나, 솔직히 아직까지 나 스스로 남자였던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너를 사랑하는 게 무서웠어.
만약, 내가 남자였다는 것을, 네가 안다면.
그것으로 인해서 나를 거절하면 어쩌지…? 하고 말이야.”
“미영씨…”
나는 천천히, 천천히 그의 입에 가져다 댔던 손을 떼어냈다.
“나는, 조금 더 알고 싶어.
여자가 된 자신을.
진정으로 여자가 되어, 너를 사랑하고 싶어.”
급하게 걸친 가디건의 안쪽에 손을 넣어, 등 뒤에 있는 브래지어의 후크를 열었다.
“있지, 나한테.
여자를 알려주지 않을래…?”
매춘으로 인한 섹스가 아닌.
진정으로 사랑으로 인한.
여자의 행복을 느끼게 해줘.
나는 그의 입술에 내 입을 포개었다.
살짝 말라서 바삭하던 그의 입술이, 어느새 촉촉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
그가 죽었다.
어쩌면 예정된, 그럼에도 갑작스러운 비극.
나의 봄은 그렇게 떠나갔다.
하지만, 나는 반드시 봄을 얻을 것이다.
반드시.
*
“오랜만…이네요?”
쭈뼛쭈뼛.
그의 손이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허공을 빙 돌았다.
멋지게 차려입은 옷.
단정한 머리.
살짝 붉게 물든 뺨.
그는 어떻게 봐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러게, 내가 조금..바빠서….일단 에이드로 시켰는데, 괜찮지?”
“아…네! 제가 사도 되는데…”
“괜찮아. 내가 보자고 한 거잖아?”
그렇다.
오늘, 내가 스스로 그에게 연락하여 만나자고 부탁했다.
“그….무슨 일이신가요? ㅈ, 저는 괜찮으니까! 뭐든지 이야기해 주세요!”
힘찬 기합이 들어간 목소리.
과연, 이게 옳은 일일까?
그에게, 너무나도 큰 짐을 씌우는 것은 아닐까?
이게, 맞는 걸까?
그래.
나는 봄을 원해.
그러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거야.
“나랑 결혼해줘..”
“아?”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유리컵에 담긴 자몽 에이드의 찌꺼기가 바닥을 더럽혔다.
“소, 손님! 괜찮으신가요? 곧바로 치워 드릴게요.”
“죄송합니다.”
“아네요~”
유리가 깨지는 소리는 요란하게 카페에 울려 퍼졌고, 그 소리에 곧바로 알바생이 달려와 자리를 치웠다.
깨진 유리잔을 쓸고, 바닥에 쏟은 에이드를 닦아낼 때까지 호준은 그대로 굳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ㅎ, 하? 아니..그……네?!? 아니….가…갑자기 ㄱ…겨…겨겨…결혼이요?”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고, 그가 마시다 만 에이드가 다시금 탁자에 올라올 때쯤이 되어서야 호준은 입을 열었다.
“정확히는, 결혼할 사람이 필요해. 그리고 너는 내가 찾던 사람에 딱 맞아.”
“아…그…기쁘기는 한…아니…그게 아니라…갑자기 결혼이요? 네?”
“돈은 걱정하지 마. 집도, 차도, 원한다면 내 몸도 내어줄게.
그러니까, 나랑 결혼하자.”
“자…잠시만요…제…제 뇌가 지금 이 상황을 따라잡지 못하는데…이게 무슨 상ㅎ…아니..하…”
그는 양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일단, 조금 마시고 진정 좀 할까요…?”
“그래, 어서 마셔.”
“...누나..는 요?”
그러고보니, 나에게는 마실 것이 없다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호준이 물었다.
“아, 나는 괜찮아. 커피를 못 마시거든. 커피 말고는 딱히 마시고 싶은 것도 없고.”
“커피를 못 마신다니요? 그…무슨 알레르기..? 같은 것이라도?”
“임신했어.”
쨍그랑.
이번에는 또 뭐냐는 듯이 짜증이 약간 서린 알바생이 자리를 치웠다.
“이…이이이이…임신이요?”
“이제 한 6주..? 지났나? 아직 크게 티는 안 나지?”
“아니…그…임신…하….그….그…애…..애 아빠는…요?”
“죽었어.”
“....아아…! 이게 뭔데요? 지금? 저 혹시 놀리고 계신 건가요??? 네? 아직 만우절 아닌데?? 아??”
그는 매우 당혹스러워하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 상당히 괜찮은 머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해졌다.
“있지. 지금 이 상황은 너를 놀리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농담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야.
난, 이 아이를 행복하게 키워줄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아빠 역할이 필요해.
그래서, 너를 골랐어.”
“.......”
그래.
나는 이 아이에게 행복을 줄 거야.
그러기 위해서는, 완벽한 가정이 있어야 해.
엄마와 아빠.
그 둘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니까.
“있지. 나를 좋아하지?”
지금부터 나는, 아주 비겁하고, 추잡한 짓을 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아직 어린 그의 인생을, 내 욕심으로 인해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면, 와 줘.
방해가 된다면 친구도, 형제자매도, 부모님도 버리고, 나에게 와.
나를 사랑하지?”
그의 애틋하고 풋풋한 사랑을, 무참하게 짓밟고, 더럽히는 것이다.
“결혼하자.”
그럼에도 나는 거리낌 없이 행한다.
오로지, 내 봄을 위해서.
*
그 뒤로 일을 빠르게 해결되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오로지 사랑만을 갈구한다.
갑작스러운 결혼을 반대하는 호준의 부모님.
당연했다.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아들이, 그것도 임산부와 결혼을 하겠다는데 거리낌없이 승낙하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리고 호준은, 부모를 버리고 나왔다.
죄책감은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나를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곧바로 결혼식을 올리고 결혼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하면, 봄이 우리의 사이를 의심하지 않겠지.
그리고 곧바로 그는 군입대를 신청했고, 입대했다.
아직 갓난아기일 때 군대로 떠나고, 아이가 조금씩 자라기 시작할 때부터 같이 있어주면, 호준을 아빠라고 인식하겠지.
그 사이 만삭이 된 나의 몸을, 그는 미친 듯이 탐했다.
괜찮아.
나는 그의 사랑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의 마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좋을 대로 짓뭉개버렸다.
호준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내 곁에 있기를 선택했다.
나는 그 마음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내가 호준이었어도, 그리했을 테니까.
사랑은 눈을 멀게 만들고, 그것 외는 아무것도 모르게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랑은 심장을 파고들고, 뇌를 파고들고,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으큭…!”
아프다.
정말로 찢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의 극심한 고통이 찾아왔다.
“산모님! 조금만 힘을 내세요! 머리가 보이네요!”
“아아악!!!!!!!”
“심호흡하시고, 침착하게…신호에 맞춰서 힘을 주세요…! 자, 하나…둘..!”
“머리가 보여요!”
이게 여성의 고통인가.
하지만, 괜찮다.
이제, 봄이 찾아오니까.
“응애! 응애!”
갑작스러운 허탈감과 고통이 잦아들었다.
전신이 후들거리고 입술이 떨렸다.
그리고, 내 귀를 맹렬하게 뚫는 소리가 들렸다.
“축하합니다! 듬직한 사내아이네요!”
“허허, 목소리 봐라. 장군감이네!”
“......얼굴….얼굴…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지만, 나는 전력을 다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새하얀 수건에 덮인, 봄이 보였다.
“아…아아…!”
봄.
사랑스러운 내 봄.
이제 찾아와줬구나.
“이름은, 어떻게 지으실건가요?”
“...수…”
“네?”
“현….수…”
그래.
현수.
내 봄.
이 아이는, 현수가 될 것이다.
매일 웃어줘야지.
항상 건강하고 맛있는 밥만 줘야지.
행복하게 해 줘야지.
달리기를 좋아하게 해야지.
사랑해 줘야지.
그리고, 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야지.
“현수…현수…”
절망을 줘야지.
비굴함을 줘야지.
비통함을 줘야지.
그리고, 죽을만큼 고통스럽게 만들어야지.
그래.
현수와 똑같이, 만들어야지.
내 봄과, 똑같은 봄으로 만들 거야.
“사랑해. 현수야…”
이로서 나는, 영원한 봄을 가졌다.
그것이 거짓으로 점칠 된, 가짜임에도, 나는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