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Epilogue:그래서 나는, 봄을 팔고있다.
* * *
“야, 넌 뭐 마실 거야?”
“나? 엄….에이드?”
“여기 커피가 진짜 맛있는데, 난 아메리카노.”
“그래…? 그럼 나도.”
커피는 좋다.
새파란 원두 콩을 볶으면, 고소한 향이 난다.
금방까지 새싹 같던 원두들이 점점 열을 받으며 갈색으로 물드는 모습을 보다 보면, 어째서 그가 그렇게나 커피를 좋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미리 볶아둔 커피콩을 분쇄기에 담아, 거름망에 차곡히 담아준다.
따뜻한 물을 주전자에 담아 천천히, 그러면서도 섬세하게.
그래, 마치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천천히 원을 두르며 부어준다.
물을 가득 머금은 원두가루는 마치 빵처럼 부풀며, 자신이 담아둔 맛을 흘려낸다.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
“아, 왔다.”
“자리는, 맡아놨어?”
“저 구석은 어때?”
“구석? 거기도 나쁘지는 않지만….어라? 여기 앉아도 되는 건가요?”
“네~ 앉으셔도 돼요.”
“그렇다네? 여기 앉을래?”
“여기? 사장님 바로 앞인데?”
“뭐 어때~ 이왕이면 사장님 일하시는 모습도 보고 좋지~ 아, 혹시 실례인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예쁘신 손님들 얼굴 보면서 일하니까 일 할 맛이 나는걸요?”
“어머머 대박이야ㅋㅋ 들었지? 들었지?”
“너한테 한 말이 아니거든?”
“뭐래, 이 기집애야!”
가벼운 한 마디지만, 그것 한 마디라도 사람의 기분은 천차만별이 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나저나, 여기 디자인 엄청 좋다~ 뭐라고 해야 하지…?”
“야, 칭찬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그게 뭐야?”
“그게 아니라….그림들이 엄청 많잖아. 그…예술가? 맞아! 마치 미술관 같아.”
“그렇기는 하네? 사장님, 여기 그림들 다 어디서 구하신 거에요? 엄청 잘 그렸다~”
“아하하….그냥, 제 남편…남편이 화가에요.”
“남편이요?”
“아, 지금 보니까 반지 있으시네, 예쁘다아~”
“이렇게나 멋진 그림을 그리다니, 남편분이 멋지시네요!”
“그렇죠? 네, 아주 멋져요.”
손님 중 한명이 내 왼손을 가리키자, 나 또한 내 손을 바라본다.
내 손에는 그 무엇보다도 반짝이는 보석이 박힌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
책장 서랍을 열자, 그곳에는 내가 꽁꽁 감춰두었던 보랏빛 반지 케이스가 담겨 있었다.
“....”
그때, 그가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을 때.
정작 끼워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담아둔 반지.
그가 죽고 나서도, 지금까지 열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두려우니까.
이 반지는, 그의 마음이자, 그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반지를 쳐다볼 엄두도 내지 않고 약에 취했다.
아니, 지금의 나 또한 이 반지를 끼워도 될지 모르겠다.
만감이 교차하던 나는, 결국 반지 케이스를 열었다.
“.....아.”
반지 두 쪽.
그와 내가 끼울 예정이던 반지.
오랫동안 주인을 찾지 못했던 반지가, 무척이나 반짝이고 있었다.
*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림에 그려진 사람들, 전부 사장님 아니에요?”
“그러게? 완전 똑 닮았는데?”
“사장님 좋겠다아~ 남편분이 엄청 로맨티시스트네요?”
“하….나도 남친이 저런 거 하나 그려주면 엄청 감동할 것 같은데…”
그녀들이 말한 대로, 카페 곳곳에 걸린 그림들에는 예외 없이 내가 그려져 있었다.
언제나 활짝 웃고 있는 나.
그가 이곳에 남겨준, 씨앗이었다.
“....네. 정말 기뻐요.”
씨앗은, 봄이 아니다.
외롭고, 추운 겨울에 씨앗은 꽃을 피워내지 못한다.
지금도 밤이 무섭다.
언제나 오롯이 혼자 마주하는 어둠은, 어느새 그리움으로 바뀌어간다.
씨앗은 봄이 되어주지 못했다.
봄에 대한 그리움은 계속해서 커져만 가고, 그 사실이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나저나, 이 가게 사장님 혼자서 영업하시는 거에요?”
“힘들 것 같은데?”
“하하…혼자서는 무리죠, 그래서 최근에 아르바이트생을 한 명 고용했어요.”
덜컹.
“사장님! 새로 주문하신 원두, 창고에 넣어둘까요?”
“응? 아~ 그래, 부탁할게?”
밀어버린 지 한참은 됐지만 아직은 군인티가 팍팍 나는 머리카락.
이제 민간인이라며 마구 피어싱을 해서 마치 전시장 같은 귓볼.
왼 팔뚝에만 있던 타투는 전염이라도 되는 듯 오른 팔뚝에도 번져있었다.
타투는 추억을 의미한다며 벚꽃이 그려진 채 퉁퉁 부은 오른팔을 보이며 눈물을 보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넵! 알겠슴다!”
“그래~”
호준은 단련된 팔뚝을 자랑하듯 원두를 잠시 공중으로 살짝 던지며 우렁찬 대답과 함께 다시금 자리를 비웠다.
“어머, 쟤 귀엽다.”
“그래?”
“아직 군인 티가 팍팍 나잖아~”
호준은 그 일 뒤로 군대에 입대했다.
그러더니 연락 한 통 없이 내 가게를 어찌 알았는지 찾아와서는 여기서 일하고 싶다며 싱긋 웃어 보였다.
마침 일손이 모자라기도 했고, 카페에서 일한 경험도 있던 호준이었기에, 고용은 일사천리가 되었다.
“그렇네요~ 귀엽죠?”
“어머머! 사장님! 유부녀시면서 그러면 안 되죠!”
“대박ㅋㅋ”
미안했다.
그가 나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호준은 나를 사랑한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그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감정을 받아 줄 수가 없다.
이미 내 마음은, 가득 차 버려서, 누군가를 받아들이기에는 힘들었다.
이 사실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지만, 호준은 불평 하나 없이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그가 언젠가 그 마음을 돌리기를 바랄 뿐.
나는 그 마음을 받아줄 수가 없으니까.
“아, 생각났다.”
“어?”
“내가 아까전에 이 가게 디자인에 대해서 뭔가 말하려고 했는데…..그래! 그거!
봄! 마치 봄 같아!”
“.....봄?”
“안 그래? 여기는 화분도 가득하고, 걸려있는 그림들도 화사하고 싱그러운 느낌이 들잖아?
마침 가게 이름도 봄 느낌도 나고!”
“그러네? 뭔가 낭만있다~!”
봄.
나는 봄을 팔았다.
첫번째는 내 몸이었다.
나는, 나라는 꽃의 꽃잎을 한 잎, 한 잎 떼어내 헐값에 팔아치웠다.
어쩔수 없었다, 하는 수 없지, 라는 변명과 함께.
생각해보면, 더 좋은 방법이 있었을 것이다.
어떻게든 부모님을 설득해본다든지, 국가의 지원을 받아본다든지.
그 짓을 하는 것보다는 더욱 좋은 일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어렸고, 무지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깊고 어두운 늪의 중앙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닿을지도 모르는 밧줄만을 바라보며, 나는 발버둥쳤다.
그 밧줄은 이미 닳고 삭아서 나를 더 깊은 늪으로 박아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도, 나는 오직 밧줄만을 보며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오로지 그것이 최선인 줄 알았다.
결국 밧줄은 잡는 것조차 허용되지 못했고, 나는 더 깊은 나락으로 곤두박질치게 되었다.
두번째는, 마약이었다.
사랑하는 그를 지키기 위해서.
아니, 사랑하는 그와 동등하게 있고 싶어서, 팔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모두들 안대를 쓰고, 현실을 보려 하지 않았다.
마약이 전해주는 포근한 봄은, 삭막한 겨울보다 따뜻하고, 달콤했으니까.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그 모든 것이 거짓되고,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는 것쯤은 다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기루를 바랬다.
그 순간만큼은, 추운 겨울이 아니라 따뜻한 봄이 왔으니까.
마치 추운 겨울밤, 도시의 골목에서 성냥을 태우던 소녀처럼, 따뜻한 환상을 원했다.
나는 카페를 하나 열었다.
현수는 내가 내리는 커피를 좋아했고, 그렇기에 나는 더욱 그의 곁에서 커피를 공부했다.
가게 인수는 걱정 없었다.
그의 유산은 어마어마했고, 가게 하나쯤 내는 것은 충분히 여유가 있었다.
굳이 카페를 열지 않고 살아도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카페를 열었다.
그가 그려준 내가 담긴 그림을 장식하고, 싱그러운 화분과 꽃들을 배치했다.
씨앗은 봄이 되어주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봄이 온다면, 이 씨앗은 아주 화려한 꽃을 피워낼 것임을.
나는 그가 남겨준 씨앗을 심고, 봄을 기다렸다.
봄이 되자, 그 씨앗은 새싹을 틔워내고, 어느덧 훌륭한 거목이 되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벚꽃잎을 가지에 물들였다.
나는 그저, 그가 남겨준 씨앗에서 태어난 꽃의 꽃잎을 한 장 떼어, 이 커피에 담아낸다.
그래.
세번째 봄.
나는 지금 봄을 팔고 있다.
그가 남겨준 봄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겨울은 삭막하다.
춥고, 외롭고, 고통스럽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추위에 사람들은 움츠러들고, 조금이라도 추위를 견디기 위해 마음의 문을 닫는다.
나또한 너무나도 힘들고, 괴롭다.
네가 없는 이 세상이 견디기 무척이나 힘들어서, 잠들지 못하는 밤을 세기에도 지친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리면, 편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봄은 반드시 온다.
정말 힘들고 지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자.
그렇다면 어느새, 대지를 새하얗게 덮었던 눈들이 녹아 푸른 잔디들이 자라나고, 새들이 지저귀며, 꽃들이 피어날 것이다.
딸랑. 딸랑.
가게의 출입문이 열리고, 손님들이 봄을 찾아온다.
“어서 오세요! 카페, ‘블로섬’ 입니다!”
그래서 나는, 봄을 팔고 있다.
나같이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가 남겨준 씨앗에서 태어난 봄을, 팔고 있다.
출입문이 열림과 동시에 바람이 불어온다.
싱그럽고, 촉촉한 대지를 가득 품은 바람이.
아.
봄이 오려나 보다.
그래서 나는, 봄을 팔고있다.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