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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봄을 팔고있다-87화 (87/91)

〈 87화 〉 chapter 7:행복한 신기루(13)

* * *

그때 보았던 풍경이 떠올랐다.

밝게 비치는 유리창은 태양 빛을 가득 머금었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 사이, 가을 향을 가득 담은 바람이 솔솔 불어와, 소독약 내음이 가득한 병실에서도 조금이지만,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렸다.

무엇을 그리고 있냐는 내 물음에 웃음으로 얼버무리던 그는, 손이 더 이상 손이라는 역할을 하지 못할 때까지 연필을 잡았다.

그리고, 내 손에는 그가 그려왔던 그림이 들어있는 스케치북이 들려 있었다.

"....."

무엇을 그렸을까.

언제나 그리던 하늘일까.

아니면 당당하게 하늘을 응시하게 된 이후로 보았던 바깥풍경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과연 무엇일까.

어느새 내 손은, 스케치북의 첫 장을 넘기고 있었다.

"아."

내 예상은, 반만 들어맞았다.

드높은 하늘과 주변에 보이는 경치로 보아서, 아마 산 정상의 풍경처럼 보였다.

하늘 아래 작지만, 가득 들어찬 건물이 보이고, 그 뒤에는 울창한 숲들이 그려져 있었다.

언제나 보았던 그의 그림.

하지만, 달랐다.

그림의 정중앙에서, 싼 거 사자고 투덜대다가 어쩔 수 없이 비싼 메이커 등산복을 입으며 투덜댔지만, 어느새 비싼 물건이 좋다며 헤헤 웃었던 사람.

혼자 등산하는 것도 힘든데 사람 한 명 부축해서 올라가려니까 죽겠다고 징징댔지만, 정작 정상에 오르니 그 경치에 감동하며 함박웃음을 짓던 사람.

"...나잖아…"

그의 그림에 그려진 나는, 아주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때 뒤에 있는 벤치에 앉아있던 현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렇게 보였다.

나는 다음 장을 넘겨본다.

이번엔 자동차 안이다.

창문 너머로 수많은 자동차들이 보이고,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내가 보인다.

환하게 웃던 내가 그려져 있다.

다음 장도, 그 다음 장도, 그 다음 다음 장도.

우리가 돌아다닌 수많은 장소의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페이지든 상관없이 매우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하하...이때 기억나네...차가 가득 밀려서 짜증을 내고 있더니, 노래나 듣자며 내가 좋아하던 노래를 틀어서 순식간에 노래방이 되었지."

"맞아, 이때 처음 들어가 본 온천….정말로 좋았지..? 그때 먹었던 회는 진짜로 맛있었는데…."

"캠프파이어는 군대에 가기 전에 친구들끼리 갔던 때가 처음이었는데...서툴러서 불에 넣었던 장작이 터져서 엄청 놀랐었어…."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그림의 질은 떨어져 갔다.

점점 병세가 악화하여, 펜을 들기 힘들 정도가 될 때까지 그림을 그렸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차츰. 차츰.

그때의 기억이 마치 물결에 파동이 퍼지듯이, 내 뇌 속으로 퍼져 나갔다.

그때의 우리는, 정말로 즐거웠다.

행복하고,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이 그림 속의 나는, 그때의 나처럼 너무나도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아…."

보고 싶어.

"현수….현수야아…..!"

너무 보고싶어.

"아아...아아아!!!!!"

안다.

지금까지 해온 봄은, 그저 신기루라는 것쯤은.

우리는 정말로, 즐거웠던 한때를 보냈다는 것을.

너무나도 행복하고, 즐거웠으니까.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으니까.

그런 네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없잖아.

봄은 그저 신기루를 보여줄 뿐, 영원히 본질에는 가까워질 수 없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가짜의 순간은 잠시, 눈을 뜨면 견딜 수 없는 차가운 현실이 나를 옭아맨다.

너무 괴롭다.

네가 없는 하루가, 너무나도 길어서.

"하하….."

보지 말걸.

그냥 없는 셈 치고, 그대로 보이지 않는 구석에 박아둘걸.

어째서 나는 이걸 열어봤던 걸까?

간신히 보려 하지 않았던 진실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그가 없다는 사실을 정통으로 때려 맞았다.

봄도, 결국에는 의미가 없다.

나는 봄을 팔았다.

몸도, 마약도, 그도.

그 무엇하나 남기지 않고 팔아버려서, 더 이상 봄을 느낄 수가 없다.

생명이 꺼져가는 춥고 외로운 겨울만이 나를 반겼다.

그래.

지금까지 신기루에 홀렸지만,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

네가 아닌 환상을 너라고 부르고, 너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젠 한계다.

이 춥고 힘든 겨울을, 나는 견디지 못하겠다.

그렇게 나는 마지막 장을 넘겼다.

[안녕하세요, 미역씨?]

"어."

삐뚤삐뚤하고, 알아보기 힘들지만,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편지.

그가 나에게 남기는 편지가, 마지막 페이지에 적혀있었다.

그의 마지막 편지.

그 글씨의 정체를 깨닫기 전에, 나는 이미 두번째 줄을 읽고 있었다.

[미영씨가 이 글을 읽을 때쯤, 저는 이미 죽었겠죠.

그러네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아직 미영씨가 살아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겠죠?

솔직히 말하자면, 기쁩니다.

아직 미영씨가 죽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아니면, 이제 곧 스스로 죽으려던 순간일지도 모르죠.

미영씨가 오열하며 저에게 부탁하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지 말아 달라고.

내가 없으면, 나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그리고 저는 대답했죠.

같이 죽어달라고.

그날, 미영씨가 돌아가고 혼자 남은 병실에서, 저는 수없이 고뇌였습니다.

이게 정녕 올바른 선택일까.

고작, 나 같은 사람이 당신 같은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해도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같이 죽어달라고 부탁하는 상황 자체가, 맞는 걸까.

솔직히, 저는 미영씨가 그 말을 한 것에 대해,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인간말종이죠?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없으면 더 이상 살기 힘들다고 하는데.

착잡하면서도, 그만큼 나라는 존재가 미영씨에게 아주 크게 존재한다는 사실이, 기뻤습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미영씨가 살았으면 하는 마음 또한 커다랍니다.

부디 나를 잊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배려해 짓던 거짓된 미소가 아니라, 진정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곧 죽습니다.

미영 씨 앞에서는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무섭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영원히 잠을 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천국과 지옥이 과연 실존할 것인가.

미지에서 오는 공포는, 저를 좀먹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저를 힘들게 한 것은, 다시는 미영 씨를 보지 못한다는 공포였습니다.

네.

미영씨가 그러했듯, 미영씨 또한 저에게 있어 아주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제서야 저는 비로소 미영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입장이 반대되어, 나 대신 미영씨가 죽어가는 모습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습니다.

미영씨가 죽음을 바라는 것처럼, 저 또한 그런 선택을 결정했을 테지요.

그래서, 저는 차마 미영씨에게 살아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말로, 정말로.

만약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제가 죽고, 아직 미영씨가 살아있고, 이 글을 보고 있다면.

죽지 말아주시길.

당신은 제게 있어, 봄이었습니다.

춥고 힘들던 겨울을 헤치고, 제 눈앞에 나타난 봄.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봄.

하지만, 봄은 언젠가 끝나고 말죠.

싱그럽게 피어나던 꽃들은 저물고, 따뜻한 햇볕도 어느새 저물고 맙니다.

또다시 겨울이 찾아올 겁니다.

춥고, 외롭고, 괴로운 겨울이.

너무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봄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영원한 봄도 없듯이, 영원한 겨울도 없습니다.

지금의 시기는 미영씨에게 있어, 겨울일지도 모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를 눈보라를 피해, 집에 틀어박힌다고 한들, 벽을 뚫고 들어오는 한기는 사람을 얼어붙게 합니다.

하지만, 그 시기를 버티고 버틴다면, 봄은 찾아옵니다.

따뜻하고, 싱그러운 봄이.

그렇기에 저는, 씨앗을 하나 남기겠습니다.

지금은 몰라도, 언젠가 찾아올 봄에 화사하게 피어날 씨앗을.

눈부시게 아름답고, 그리운 봄.

정말로 사랑합니다.

부디, 행복하시기를, 나의 봄이여.]

“.....아….”

봄.

그런가.

내가 그를 봄처럼 여겼듯, 그 또한 나를 봄으로 여겼구나.

이미 다 팔아버린 줄 알았지만, 나에게도 있었구나, 봄이.

나는 어느새 그의 스케치북이 담긴 상자와 같이 온 그림에 덮인 천을 잡아당겼다.

스르륵하고 천이 벗겨지자, 그 안에 가려진 그림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하고 포근한 분홍빛 벚꽃잎들이 나풀거렸다.

바닥에는 싱그러운 잔디들과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났다.

그리고, 내가 있었다.

찬란하게 미소를 짓는, 내가.

[나의 봄]

봄.

그림의 왼쪽 아래 구석에, 그렇게 적혀있었다.

“아…아아….!!”

나의 봄.

“아으…으…으아아아!!!!!!!!”

그는 내 봄이었다.

“아아아!!!!!!!!!!!!”

서늘하게 얼어붙고, 척박한 대지를 꿰뚫은 새싹이, 맑게 피어났다.

그것이 너무나도 기뻐서, 그리웠어서, 행복해서.

현수. 네가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나는 봄을 바랬다.

이제 그는 없다.

하지만, 봄은 지기 전, 씨앗을 남긴다.

다시금 돌아올 봄을 위해.

다시금 아름답게 피어날 꽃들을 위해.

*

어느새 창문을 덜컹거릴 만큼 불어오던 바람이 그쳤다.

먹구름에 감싸졌던 햇빛이 슬그머니 나와, 손님이 찾아왔다는 것을 알린다.

겨울잠에 빠졌던 짐승들이 찌뿌등한 몸을 풀고, 사람들은 저마다 본격적인 1년을 준비한다.

그렇게 나의 봄은, 씨앗을 남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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