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chapter 7:행복한 신기루(5)
* * *
사실, 알고 있었다.
이 관계가 언제까지고 이렇게 이어지지는 못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바랬다.
그것이 과한 욕심인 것일까.
가면을 쓰고, 그저 지금 이 순간만큼만 즐기고 싶었다.
앞으로의 일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가리고, 걸었다.
그 앞이 절벽이라는 것은 이미 눈을 가려도 잘 아는 사실.
그래도 눈을 가리고, 앞의 풍경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었다.
도피.
맞다, 내가 가장 잘하는 일.
나는 그저 이 상황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러면 안 돼?
어째서, 굳이 안대를 풀고, 앞을 바라보려는 거야?
고통스럽잖아.
공포스럽고, 후회스럽잖아.
어째서.
심지어 가장 먼저 나락으로 떨어질 운명인 네가, 현실을 직시하려는 걸까.
그냥, 지금까지 해 오던 것처럼 하루하루를 즐기면서 살면 안 되는 걸까.
나는 반지를 바라보았다.
상당히 비싸 보이는 보석에 금으로 만들어진 고리.
나를 위해서 건네준 이 반지가 그의 사랑을 나타내는 듯 보였다.
“하.”
모르겠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내가 처음부터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면.
우리가 평범하게 만났었다면.
그렇게 사랑을 키워가고, 사귀고.
그 다음 이 반지를 건네주었다면.
그런 세상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나는 반지 세게 쥐고는, 거칠게 집어던지려고 팔을 크게 흔들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나는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가 나를 사랑하지 말았으면 했다.
결국 죽어버릴 너가, 나를 사랑하지 말았으면 했다.
하지만, 세상은 역시 내가 바라는 대로 흘러간 적이 없었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내가 쓰던 안대를 부숴버리고 말았다.
이젠,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겠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꺌꺌 웃으며, 그 하루만을 바라보던 시절로.
그는 나에게 현실을 들이밀었고, 그 현실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시간은 어느새 흘러, 기대어 있던 골목길의 가로등에 불빛이 껌뻑거리며 켜지기 시작했다.
“하….”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사랑이란 뭘까.
나에게 있어서, 현수는 내 모든 것인데.
이것은 사랑이 맞긴 한 걸까?
애초에 사랑이 뭐야?
그를 사랑한다.
그 사랑이라는 것의 정의는, 나 스스로도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은 어떨까.
나는 피우던 담배를 대충 구겨서 집어 던졌다.
내가 이 몸이 되고 나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매우 극소수였다.
너는 답을 줄 수 있을까?
차가운 공기가 콧등을 빨갛게 물들인다.
시려워진 손을 주머니에 넣자, 반지의 감촉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
“그럼 마무리 잘 부탁해~ 먼저 들어간다?”
“예!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매니저 형님이 가게를 나갔다.
“후….드디어 퇴근이다아……”
나는 한껏 움츠러든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중얼거렸다.
이 카페에서 알바를 한 지도 벌써 반년을 훌쩍 넘겼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유니폼도 어느덧 학생 시절 교복처럼 익숙해졌고.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들도 어느새 많이 익숙해 졌다.
매니저 형님이 말하기를, 카페는 보통 여직원들이 많고, 우리 가게 또한 너 말고는 나밖에 남자가 없어서 힘쓰는 일에 딱이라며 날 채용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힘 쓰는 일에 부려 먹힐 줄은 몰랐는데.
“....시급은 더 높으니까 뭐….”
커피 머신 청소나 대용량 원두 포대를 옮기거나, 이렇게 마지막으로 카페 마감을 하는 일처럼 하는 일이 많기는 했지만, 다른 시간대의 알바들보다 시급을 더 받으니까 어쩔 수 없다는 느낌으로 일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이 느낌은 좀 괜찮단 말이지.”
힘들기는 하지만, 가끔 이런 것도 좋다.
아무도 없는 카페의 카운터에 서 있다 보면, 마치 내가 이 가게의 주인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마치 성공한 젊은 카페 사장 느낌?
“....아, 오늘도 저를 보러 오셨군요? 이런…저희 가게 커피는 비싸답니다?”
아무도 없는 가게에서는 나도 모르게 탠션이 올라가서 이렇게 개똥폼을 잡으면서 히히덕거리고는 했다.
딸랑딸랑.
“으힉!....아..손님? 오늘 장사는 끝났습니다만….”
그러던 찰나, 아직 카페 문을 잠그지 않았는지 카페의 문이 열리자, 나는 화들짝 놀라며 금방까지 잡던 똥폼을 집어던지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 장사가 끝나도 불이 켜져 있어서 아직 장사하는 줄 아는 손님이 많았기에 이런 일들은 익숙했다.
하지만.
“...오랜만이네?”
“....누나?”
어라.
이런 일은 익숙하지가 않은데.
*
“....정말 괜찮아?”
“네 뭐, 매니저 형님은 퇴근하셨고, 청소도 거의 끝나서 괜찮아요. 여기…”
“아…그래, 고맙다.”
“별말씀을요.”
괜찮냐는 물음에 호준은 미소를 지으며 내가 앉은 자리 앞에 커피를 내려놓았다.
“제가 원래 커피를 딱히 마시지는 않았는데, 알바하다 보면 결국 마시게 되는 날이 늘다보니….어느새 이렇게 마시게 되네요.”
“뭐, 그렇지….”
“그래도 아직 누나처럼 에스프레소는 무리….어으….어떻게 그리 쓴 걸 마시는 거에요?”
“...니가 아직 어려서 그래.”
“....매니저 형도 못 마시는 걸요….”
“그래? 그럼 어리다는 말 취소.”
“오!”
“그냥 아직 멀었네.”
“....그게 거기서 거기 아닌가요?”
“천잰데?”
“아니…! 그게 뭐에요…”
우리는 늦은 밤, 아무도 없는 카페에 서로 마주앉아, 마치 오랜 세월 동안 알고 지낸 친구사이처럼 서로 잡담을 즐겼다.
호준이 먼저 말문을 트고, 나는 거기에 적당히 맞춰준다.
서로간의 대화가 잘 통하는 것 같지만, 이 모든 대화는 순전히 호준의 배려로부터 이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무슨 일이에요?”
“........”
잠시간의 수다가 끝나고, 잔을 내려놓은 호준이 물었다.
“알아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저를 찾아올 이유가 없다는 것쯤은.”
“.....뭔가 미안하네….”
“아뇨, 저야말로. 그때 누나 상황도 모르는데 그런 말을 꺼내서 죄송했어요.”
“...아냐…”
그랬다.
나와 호준의 마지막은, 최악이었으니까.
[이런 일….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해서는 안 되는 일이잖아요...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호준은 나에 대해 무지했고. 그 때문에 나에게 상처를 남겼다.
[넌. 그렇게 살면 돼. 평범하게, 행복하게. 그런데, 선은 넘지 마.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래서 나는 그를 밀어내고, 나 또한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이렇게 모습을 맞대고 앉아있다고 한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아직도 나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나 또한 그저 내 바람을 이루기 위해 찾아왔을 뿐이니까.
“....하나 물어보자.”
“뭔데요?”
“넌, 날 사랑해?”
“....예?”
내가 물었다.
나를 사랑하냐고.
“....아니..그…아…”
“말해. 그것으로 너를 혐오하거나, 싫어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테니까.”
“....조금 남자답게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이건 글렀네요.”
“됐어, 그런 게 뭐가 남자답다고.”
“....예.”
급작스러운 내 질문에 그는 당황을 금치 못하고 손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결국 자신의 얼굴을 가리며 말했다.
“있지, 사랑이라는 게 뭐야?”
“....혹시 최근에 철학 공부라도 하시고 계신가요?”
“글세, 적어도 내 상황엔 그럴 시간은 없기는 한데.”
“사랑이 뭐냐니….”
“넌 날 따먹고 싶어?”
“아니….예!??”
“그저 육체적인 사랑인거야? 아니면 나를 좋아, 아니 사랑하는 이유가 뭐야? 어떤 점이. 왜 좋은지, 어째서 나를 사랑하는지. 그게 궁금해.”
그게 궁금했다.
다른 사람은, 어떤 식으로 사랑하는 지.
어떤 점에서 끌리는 것이며, 어째서 사랑에 빠지는지.
그것이 궁금했다.
나도 안다.
내가 하고 있는 짓이 쓰레기 같다는 점 정도는.
나보다 어린 동생에게 나를 빌미로 내가 원하는 것만 얻어가려는 쓰레기.
그런데,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다.
“....사랑….이라…….
있죠? 솔직히 저도 잘 몰라요.
그냥…누나가 제 첫….아이씨….그냥 네…그래서 그런 걸지도 모르죠.
아니면 누나가 그때 저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저 성욕이랑 사랑을 혼동하고 있는 줄도 모르죠.
그런데, 그거 하나는 알아요.”
한참 대답을 망설이던 호준은 떠듬떠듬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저 누나가 예뻐서, 그저 성욕 때문에, 그날 밤을 잊지 못해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니까, 예쁘고, 사랑하니까 그날 밤을 잊지 못한다는 것.
그것 만큼은 확실해요.”
“....”
“그냥…일을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뭘 해도 머릿속 어딘가에는 누나가 있고, 생각이 나요.
만나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고.
…..그게 사랑 아닐까요?”
“...........”
“...아니 난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는 거야….내가 미쳤지 미쳤어….하…”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얼굴을 아주 붉게 물들이며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가….그런 건가…?”
맞다.
호준이 말한 게 맞다.
나는 처음부터 그를 만나자마자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도, 돈도, 집도.
그와 함께 살아가며, 그에 대해 알게 되고.
그 또한 나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제야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뒤로는 언제나 그랬다.
호준이 말한 것 처럼.
뭘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나고.
계속 같이 있고 싶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붙어 있고 싶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다.
이게, 사랑이구나.
내가 이렇게 느낀 것을, 그 또한 나에게 가지고 있는 거구나.
“.....그래. 그렇네….그렇구나….”
“....그래서, 그걸 물어보러 오신 건가요?”
내가 그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리자, 호준이 물었다.
“....아니.”
하지만, 내가 들어야 할 답은, 이게 아니었다.
“그래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죄송한데 너무 직설적으로 말해주시지 않아 주시면 안될까요?
자꾸 그러시면 저 그냥 터질 것 같은데.”
나는 다시금 그를 응시하며 묻자, 호준은 내 눈을 바라보지 못하며 웅얼거렸다.
“언제나 같이 있고싶고, 대화를 나누고 싶고, 사랑한다고.”
“아 예에!! 맞아요! 오늘 저를 그냥 죽이세요!!”
하지만 나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가자, 그는 결국 마지못해 나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럼 말해 줘.
내가 죽으면, 너도 죽을 거야…?”
“.....네?”
그걸 말해줘.
이 사랑이.
내가 품고 있는 이 사랑이.
너와 같은 감정이 맞는지.
이게 사랑인건지.
아님 그저, 정신이 나갈 정도로 심각한 의존증 인건지.
나는 호준 몰래 주머니에 든 손을 꽉 쥐었다.
반지의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