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chapter 6:태풍의 눈 중심에서.(9)
* * *
쌀쌀하다.
한겨울에 차갑게 식혀진 계단 덕분에, 엉덩이에 감각이 사라진 것 같다.
급하게 집 밖으로 뛰쳐나가기는 했지만, 그 말대로 너무 당황해서 그런지 그 무엇하나 챙기지 않고 그대로 나와버렸기에 휴대폰도, 지갑도,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그저 집에서 입던 얇은 티셔츠와 수면 바지, 이미 새빨개진 발가락이 보이는 슬리퍼 말고는 가진 것이 없었다.
뭐, 그 상황에서 침착하게 금방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챙겨서 나왔다고 해도, 아마 지금처럼 똑같이 비상계단에서 쪼그려 앉아 있을 것 같지만, 있지만 하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은 꽤 크게 차이가 났다.
화를 냈다.
윽박지르고, 거칠게 손을 휘두르고, 날카로운 눈매로 나를 바라보았다.
단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 없었던 그가, 내가 생각 없이 저지른 그 행동으로 인해 그렇게 되었다.
그것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무서웠다.
그에게 그런 과거가 있는지 전혀 몰랐다.
나에게 현수란, 언제나 나를 포근하게 안아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그가 그런 과거가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돈이 있어야 뭐라도 할 텐데.
분명, 내 지갑에 있는 체크카드의 금액이라면, 급하게 모텔이라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봐야 임시방편이지만, 당장 잘 곳이 있어야 하니 별수 없었다.
그다음은, 다시금 일자리를 구해야 한다.
이왕이면 숙식이 가능한 일자리는 없을까.
저번에 첫 알바를 찾으며 알바구인 사이트를 뒤적거렸을 때, 얼핏 보였던 것 같았는데….
“일단….지갑을 들고 나와야겠다.”
당장 해야 할 일은 그거 하나였다.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나는 쪼그려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엉덩이와 다리 덕분에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자꾸만 삐그덕거렸다.
꺼지라고 해놓고 뻔뻔하게 다시금 집에 들어왔다고 화를 낼지도 모르지만, 어떻게든 지갑만 들고 쏜살같이 나온다면, 괜찮을 것이다.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다시금 몸을 움직이니 몸이 더욱 추워졌기에, 나는 발을 동동거리며 아래층으로 내려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렇게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부르려던 찰나.
“....또 도망가려고 하네…”
버튼을 누르려던 손가락이 멈췄다.
도망.
맞다. 도망친다.
저렇게 화를 내는 현수를 마주할 용기가 없다.
다시금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눈다면, 또다시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를 것 같다.
무섭다.
나는 언제나 도망쳤다.
마주할 용기가 없으니까.
크게 데었으니까.
그래서 뭐든 그냥 덮어버리고, 도망치고, 숨었다.
그러면 그 순간은 안전하니까, 안심되니까.
그런 나는 이제 내 마지막 안식처마저 제 발로 도망치려 하고 있다.
이게 정말로 맞는 걸까.
살짝 멈췄던 손가락은 어느새 주먹을 꽉 쥐고 있다.
‘
‘그래도 저는 미영 씨를 좋아해 줄게요.’
인자한 목소리.
‘누군가가 미영 씨를 싫어해도, 누군가가 미영 씨에게 관심이 없어도, 저는 미영 씨의 한 사람이 될게요.’
안심감 있는 말.
‘어때요? 든든한 같은 편이 반드시 있는걸요?’
같은 편.
맞아.
그는 나를 믿어준다고 했다.
나를 믿어주는 단 한 사람.
그런데, 나는 그를 믿지 않는 건가?
따뜻한 커피.
포근한 품.
부드러운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너였고, 그런 너에게 나는 구원받았다.
“.........”
나는 꽉 쥔 주먹을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작은 주먹.
당장 누구를 때릴 것 같이 힘을 줬지만, 이렇게나 가냘프고 작은 주먹.
이게 나다.
아무리 강한 척을 해도, 그렇지 않은 척해도, 나는 이렇게나 볼품없다.
여기서 도망가면, 정말로 편해질까?
아니.
나는 이제 답을 알고 있다.
어느새 주먹은 떨리지 않았다.
*
삐리리.
아무리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러도 도어락은 아주 큰 소리를 내며 잠금을 풀었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소리가 나는 부분에 손가락을 억지로 틀어막아, 금방보다는 작은 소리를 내며 문이 잠겼다.
“....킁.”
살금살금.
조심스럽게 슬리퍼를 벗어 가지런히 정리하고, 발끝을 세워 조심스럽게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귀를 쫑긋 세워보았다.
집 안은 무척이나 고요했다.
“...저…현수…야…?”
조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없는 고요한 집에, 나는 북받쳐오는 불안감을 간신히 억누르고, 그를 찾아 불렀다.
거실, 주방, 화장실, 그의 방.
이 모든 곳에도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현수야…”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던, 창고로 쓰일 예정이던 방으로 발을 옮기며 그를 불렀다.
“....!”
간신히 찾아간 그 방에서, 나는 현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그는 먼지투성이 바닥에 그대로 앉아, 하염없이 너덜너덜한 운동화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혀…현수..야?”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천히 그를 불렀지만,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꿀꺽.
긴장감에 목이 바싹바싹 마르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금이라도 이 광경을 외면하고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미안해..”
사과.
나는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
내 어리석음으로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러니, 나 또한 진심으로 그에게 사과해야만 한다.
이젠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ㄴ, 난…정말 몰랐어….네가 그런 과거가 있었는지….그저 몰랐다는 말은 그냥 변명일지도 모르지만…정말 미안해…내가 생각이 짧아서…..너에게 상처를 줬어…”
그가 들을지는 모르지만, 나는 진심을 짜내어 그에게 말했다.
“네가 어떤 심정인지, 나…나는 솔직히 잘 몰라….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째서 그토록 힘들어하는지, 나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웃기지..? 그래도 꽤 오래 같이 살았는데…”
비록 그가 무시하더라도, 경멸하더라도.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안해. 이것만큼은 내 진심이야.”
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을 거니까.
“.....많이 놀랬죠…?”
그리고, 목석같이 그저 같은 자세를 유지하던 그의 입이 열렸다.
“ㅈ, 저도 참….당황스럽네요….이토록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적은 오랜만이에요. 혹여나…미영 씨가 상처 입지는 않았을지…미안해요…”
그는 지금의 자신도 힘들 텐데, 그에게 상처를 준 나에게 되려 사과를 건넸다.
“아…아냐..! 내가 더 미안해…정..말..미안..”
한 발. 한 발.
천천히 그에게 다가간다.
언제나 넓고 듬직해 보이던 그의 등이, 지금은 너무나도 왜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글세요….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아..”
내 물음에 고개를 돌려 대답한 그의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현수는 울고 있었다.
과거의 나처럼, 힘들고, 슬퍼서 울고 있었다.
와락.
나는 그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괜…찮아….괜찮아……그러니까 울지 마.”
무어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내가 위로받았을 때처럼 무턱대고 그를 안고 계속해서 괜찮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위로를 건넨 적이 별로 없어서, 나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신격화하고 있었다.
언제나 멋있고, 듬직하고, 믿음직한.
완전무결한 존재라고.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어리광을 피웠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었다.
슬프면 울고, 괴로우면 아픈.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손이 차가워요….괜찮나요?”
“으응….괜찮아…”
“울고…계신가요…?”
“나도 모르겠어. 그냥, 네가 우니까, 나도 울음이 나와.”
“.....따뜻해요.”
“그래?”
“조금만, 조금만 이대로 있을게요.”
“응.”
나는 그렇게, 그가 울음을 멈출 때까지 그를 품에 안았다.
*
“정말 괜찮아?”
“네, 고마워요. 많이 진정됐네요.”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천천히 내 품에서 나와, 조금 미소를 지었다.
“....오래전에 이곳에 놔두고, 잊어버린 모양이에요. 아니면, 잊어버리려고 했었을지도 몰라요.”
그는 고개를 돌려 트로피와 상장, 운동화가 놓인 바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미안해.”
“아뇨, 제가 신경을 쓰지 못한 탓이에요. 미영 씨 잘못이 아니에요.”
“그래도….!”
“이제는,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이런 말을 해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뭔가요?”
“조금, 덜어내 보지 않을래?”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그에게 저 물건들이 어떤 존재일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는 그의 과거가 궁금했다.
이기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정면으로 부딪치기로 한 이상. 난 그의 일을 알고 싶었다.
“...그렇네요. 조금 덜어내면, 이 마음이 조금 나아질까요?”
“....여기서 내가 그렇다고 말한다 한들, 아무런 보장이 없어. 하지만, 네가 덜어내고 싶다면. 나는 옆에서 그저 묵묵하게 들어줄 수 있어.”
“그런가요…”
그 이후로, 잠시간 침묵이 우리 둘을 지나갔다.
그는 한참이나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나시나요?”
“어떤…말?”
“미영 씨가 어째서 집 전체에 어두운 커튼을 달아 놓았냐고. 물었을 때요.”
“아…”
그래.
분명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이다.
언제나 처진 암막 커튼 때문에, 집과 밖의 시간이 이상하게 단절된 것 같아 의아했던 내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분명, 현수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는 그 하늘을 느낄 수 없다. 고.
“....어째서 화가가 되었냐고 물었었죠?
그리움.
하지만, 그리움'도' 있을 뿐이죠.
도피.
맞아요. 저는 그저, 도망갈 곳이 필요했던 거에요.”
그는 조금 힘없이 웃으며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