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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봄을 팔고있다-64화 (64/91)

〈 64화 〉 chapter 6:태풍의 눈 중심에서.(2)

* * *

드디어, 바라고 바라던 신분을 손에 얻었다.

정말 간절히 바라고, 원해왔던 것을 얻었다.

그리고, 평범한 인생에 발을 내딛은 나는.

“........”

무기력하게 쇼파에 누워, 하루를 그냥저냥 보내고 있다.

기분은 좋다.

지금도 매일같이 지갑을 열어, 민증을 유심히 보다가, 베시시 웃고 만다.

하지만, 너무나도 무기력한 기운이 내 몸을 덮쳐왔다.

높디높은 목표를 잡은 것은 좋았다.

그런데,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신분만 손에 넣으면, 모든 것이 좋게 흘러갈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현수의 집에 얹혀살며, 그가 해주는 밥을 먹고, 편하디편하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간신히 무언가를 달성하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1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드디어 수능을 치고 일주일이 지난 느낌.

딱 그 느낌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목표를 따내고 나니, 압도적인 무력함이 찾아왔다.

그때야, 지금까지 힘들게 공부했으니, 나에게 상을 준다는 생각으로 매일같이 친구들과 피시방과 당구장을 넘나들며 생각을 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아....”

이제 신분이 생겼으니,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천천히 생각해 보았다.

일단, 대학을 다시 가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였을 시절, 힘들게 대학에 들어가고 군대 덕분에 휴학하고 여자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다시금 수능 공부해서, 수능을 쳐볼까?

그런데, 매일같이 공부만 하던 학생 시절에도 나쁜 머리를 쥐어짜며 간신히 턱걸이로 적당한 대학에 들어갔는데, 수능 공부에서 손을 뗀 지,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공부해서 들어갈 수 있을까?

아마, 의자에 앉아서 책을 펴다가, 30분도 견디지 못하고 잠시 숨 좀 돌린다는 느낌으로 담배 한 대 피우다가, 돌아와서는 공부는 커녕 휴대폰이나 보거나, 하면서 시간을 날려 보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현수한테 그림을 더욱 본격적으로 배워볼까?

그림은 재미가 있다.

흰 도화지에 내가 직접 무언가를 채워간다는 감각은, 색달랐고, 즐거운 감각이 있었다.

“졸리시나요?”

“....아니...”

그리고, 내 옆의 쇼파에 앉아 나에게 말을 거는 현수를 보고는, 금세 접어버렸다.

바로 내 옆에 천재 화가가 있는데, 내가 그림으로 먹고살 것 같지는 않았다.

인터넷 여캠 방송?

그게 남정네들한테 살랑거리며 돈을 뺏는 거랑 뭐가 다른 거지?

노가다?

이 몸으로?

장담하건데, 채 한 시간도 채우지 못하고 도망갈 것이 뻔했다.

.........모르겠다.

신분만 얻으면, 깜깜하던 내 인생이 마치 맑게 갠 하늘처럼 가려진 암흑이 사라질 것 같았는데.

미래의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깜깜하기만 했다.

“끄응....”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한 길이 생각나지 않아 복잡해진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렸다.

“커피 한잔하시겠어요?”

“아, 고마워.”

그런 나에게 언제 타왔는지 모를 커피 한 잔을 건네며 현수가 물었다.

후루룩.

커피 한 모금을 입속에 머금는다.

씁쓸하지만 부드러운, 다채로운 커피의 향이 솔솔 피어나는 느낌은 좋다.

“맛있다. 언제나 맛있어.”

“그렇게 말해주시니 열심히 탄 보람이 있네요.”

“농담 아니야. 정말 맛있어.”

이 커피.

어떻게 보면, 이 커피 한 잔 덕분에, 이런 고민도 할 수 있게 된 것 같았다.

몇 개월 전만 해도, 당장의 고민이라고는 내일 일거리가 잡힐까? 같은, 떠올리기도 싫은 고민만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미래의 일을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거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복잡해진 머리가 조금 개운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티 나?”

“그래 보여서요.”

“.....하하.”

나처럼 커피 한 모금을 마신 현수가 커피를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렇게 티가 많이 나나...?

“.......그냥....앞으로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

그런 실없는 현수의 미소에, 어느새 나는 마음속에 감추어 두던 고민을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힘들었거든.”

다시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하루하루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를 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현수, 너를 만나고, 행운이 찾아왔다.

이제야,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이라는 것에 발을 내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평범하게 살았던 적이 너무 오래 전이라....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하하...참 웃기지? 그런데, 그렇더라.

그때는, 그냥 하루하루 버티기만 신경을 썼어.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는 오아시스를 그저 신기루만 쫓아서 뜨거운 사막을 달리는 기분?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

그런데...인생이란 참 알다가도 모르겠더라?

그러다가 갑자기, 짜잔! 하고 내 앞에 오아시스가 나타난 거야.

그래서 너무 당황스러워.

사실, 이것도 신기루인 건 아닐까?

그 오아시스에 독이 들어간 건 아닐까?”

“...........”

“그래....이제 알 것 같아.

.....무서워.”

그랬다.

나는 사실, 무서웠던 거다.

갑자기, 너무나도 갑자기 모든 것이 해결되어 버렸다.

그렇게나 고통스러웠는데, 그렇게나 힘들었는데.

내 인생은 나락뿐이라고, 어떻게든 상처 난 마음을 덕지덕지 기워가며 살아가는데.

갑자기 짜잔~ 이제 당신은 평범해졌어요~ 이제 하고 싶은 것을 하세요~ 라고 하니까.

불안했다.

나는, 내 몸을 팔고, 마약을 팔고, 그런 어두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평범한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을까?

배척당하는 건 아닐까?

잘, 해낼 수 있을까?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시작도 안 해 보고 왜 그렇게 쫄아있냐고?

모르겠다.

모르니까, 무섭다.

잠깐의 망상이, 어느새 고민이 되고, 이내 내 몸을 갉아 먹고 있다.

이때까지 살아온 김상국을 버리고, 평범한 ‘여자’ 김미영으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난 다른 여자들이 하는 것처럼 화장도 고작 기초화장 같은 것밖에 못하고.

끼를 부리거나, 매력을 어필하거나.

그것도 아닌, 아예 평범한 사람들과 엮여보지 못했는데.

그때도 그랬다.

군대에 입대했을 때는, 어서 빨리 제대만을 기다렸다.

이 악물고 버티고, 오로지 전역만을 기대하고, 바래왔다.

그런데, 한없이 멀리만 보였던 전역 날이 이내 바로 앞으로 찾아오니까, 무서워졌다.

군대에서 살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막상 사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하니, 불안했다.

복학은 잘 할 수 있을지.

군대로 인한 대학 동기들과의 시간차를 좁힐 수 있을지.

공부는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미치도록 불안하고 무서웠다.

그때도 그만큼 힘들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성별로 내가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지.

그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머리가 아파졌다.

어쩌면 좋을까...

“.....미영 씨.”

“.....아, 미...미안. 너무 궁상맞지? 나이도 먹어놓고 이게 뭔 소리인지....”

“미영씨가 말하는 ‘평범’이란, 뭔가요?”

“어?”

평범.

그냥 모나지 않고 평균적이라는 의미.

갑작스러운 현수의 질문에, 곧바로 이런 뜻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가 이런 대답을 바라고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닐 터였다.

평범.

.....평범하다. 라는 건, 뭐지?

“글세...? 그냥...초중고 다니다가 졸업해서 대학에 들어갔다가, 졸업하고서는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그렇게 사는 거?”

그의 질문에, 나는 아주 보편적인 인간의 일생을 늘어놓았다.

“그게, 미영 씨가 생각하는 평범인가요?”

“그렇지 않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다들 이렇게 살아가잖아.”

“그렇다면, 저는 평범한가요?”

“어? 그.....글세...? 평범.....하지는 않지?”

“어떤 점에서 그런가요?”

“....일단 어린 나이에 돈 많이 버는 화가?.....잖아?”

“....그리고 다리도 이렇죠.”

“......”

그의 질문에 어정쩡하게 대답하자, 현수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의 다리를 툭툭 쳤다.

“저는 미영 씨의 시선에서는 평범하지 않아요. 그런데, 미영 씨의 눈에는 제가, 불행해 보이시나요?”

“그, 그럴 리가 없지!”

“......그럼요, 제가 그렇게 보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응?”

“아뇨, 평범하지 않은 저도, 미영 씨가 보기에는 불행하게 보이지 않아요.

그렇다면, 미영 씨가 말하는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도, 모두 행복할까요?“

“........”

“굳이 평범이라는 것에 목매지 말아주세요.

제 인생은 평범하지 않아도 제 인생이고, 미영 씨의 인생도 미영 씨의 인생인걸요.

저는, 미영 씨가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보다. ‘행복’하게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아.”

나는 어느새 평범한 삶을 바래왔다.

왜냐하면, 언제나 누리던 것이었으니까.

평범한 대학 생활, 평범한 인간관계, 평범한 부모님.

그리고, 평범한 나.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했고, 그대로 흘러가야만 했다.

하지만, 내가 여자가 되어, 그 평범함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평범함을 바랐다.

참 웃기는 소리다.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날을, 그리워할 뿐이었다.

신분을 얻어도, 직장을 구해도, 다른 사람들과 평범하게 지내도.

다시는, 다시는 절대로 그때의 평범함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말이다.

“....그런가....”

나는 이때까지 김상국의 발자취를 따라가고 싶었다.

김상국의 인생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김미영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건가.

“무언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네.”

“괜찮아요. 천천히, 천천히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괜찮아요.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요.”

아리송하다는 얼굴을 짓자, 현수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 점이 치사한 거라고.

“.....차라리 나랑 결혼해줄래?”

“...네? 아 그....그러니까...어...음....”

느닷없는 프로포즈에, 현수는 잠시 동공이 커지더니, 크게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하하! 농담이야.”

“.....그런가요?”

“그래도 고마워, 잘 모르겠지만. 지금은 이 고민을 순수하게 즐겨볼래.”

그래.

김상국의 인생은 김상국이었던 것처럼, 앞으로의 내 인생은 더 이상 김상국의 인생이 아닌, 김미영의 인생이다.

일단, 고민하자.

불안해도 괜찮다.

무서워도 괜찮다.

그럴 때는 언제나, 네가 내 곁에 있을 테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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