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chapter 5:두 번째 봄을 팔다.(5)
* * *
사각사각.
연필에 박힌 흑심이 천천히 흰 도화지 위를 달렸다.
현수의 가르침에 나는 어느덧 여러 가지 선들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선을 긋는 것도 지겨워졌다.
매일 매일 선들만 긋다 보니, 어느 정도 자신도 생겼고, 또 다른 그림도 그려보고 싶어졌다.
“흠….그러시면 이번엔 ‘도형’을 그려볼까요?”
“도형?”
선 긋기에 지친 내가 현수에게 가볍게 투덜대자, 그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
“예를 들어볼까요?”
그렇게 말하던 현수는 잠시 내 자리에 앉아, 무언가를 슥슥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건네준 연필을 받더니, 빠르게 손놀림을 이어 나갔다.
사각사각.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상당히 보기 좋은 나무 한 그루를 그려내었다.
“이걸 보면 어떤가요?”
“응…? 음…..잘 그렸다?”
나무 한 그루를 그려낸 현수는 갑작스럽게 나에게 나무의 감상을 물어보았다.
뭐….내가 보기에는 잘 그려낸 것 같은데…?
“하하….그렇게 말해주시니 쑥스럽네요. 하지만, 지금은 그걸 물어본 게 아니었어요.”
“그럼 뭔데?”
“미영 씨가 보시기에, 이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 것 같나요?”
“.....잘?”
나는 이어지는 혁수의 질문이 마치 어려운 퀴즈처럼 느껴질 정도로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모든 그림은, 뼈대가 존재해요.
저는 익숙해지다 보니 그대로 슥슥 그렸지만, 보통 그림을 그릴 때는 밑그림을 그리죠.”
현수는 이미 완성된 나무에 무언가를 덧칠해가며 그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시면, 나무 기둥은 원통, 나뭇잎과 가지들은 수많은 네모들과 세모들, 그리고 원으로 만들어져 있어요.”
그렇게 말하는 현수의 말을 들으며 그의 그림을 보자, 현수의 말대로 나무 한 그루에는 수많은 도형들이 숨겨져 있었다.
“대단하네….”
“이것처럼, 어떤 물건이나 인체를 그리려면, 도형으로 생각하며 그리는 편이 편해요.
하나 더 예를 들어볼까요?”
그렇게 그의 설명에 감탄하고 있자니, 현수는 또다시 새로운 도화지에 그림을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건...손?”
“손은, 인체를 그릴 때 가장 어려운 부위에요, 저도 최근 들어서야 감을 잡아가기 시작했어요. 전부 미영 씨 덕분이지만요.”
“아...하하….그래..?”
잘 그리긴 하지만 갑자기 낯 뜨거운 이야기 좀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확실히 잘 그렸다.
손의 각도라든지, 주름이라든지, 마디라든지.
아직 그림에 대해서 초짜인 내가 봐도 이 한 장을 그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들어갔는지 보였다.
그는 손가락을 굽힌 손을 그렸다.
“이번엔 이걸 따라서 미영 씨가 직접 그려보실래요?”
“이걸 그대로 따라서?”
“네.”
음.
확실히, 그대로 보고 따라 그린다고 해도, 완전히 비슷하게 그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엇비슷하게 라면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 한 번 해볼게!”
최근엔 선도 잘 그어졌고,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는 자리에 앉아 그가 그린 손 옆에 그대로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그렇게 손을 따라 그리기 시작한 지 몇 분이 지났다.
“어….어라? 이상하다…?”
처음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먼저 형태를 비슷하게 그리고, 선 하나하나를 힘을 줘서 그렸다.
그렇게 그리다 보니 엄지손가락은 조금 괜찮게 그려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엄지는 비슷하게 그려졌지만, 점차 그리다 보니 비율이 점차 엉망이 되어갔다.
선을 세게 그어서 그런지 잘못 그리고 지우고 할 때마다 그 흔적이 완벽하게 지워지지 않고 거뭇거뭇하게 흔적이 남았다.
결국 완성한 손 그림은, 전혀 다른 괴생명체같이 그려지고 말았다.
“왜…? 왜 안 그려지는 거지?”
이상하다.
분명 똑같이 보고 그렸는데….
“어때요? 그릴 만한가요?”
“....아니 전혀. 자꾸만 이상하게 그려지는 것 같아.”
그런 내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현수가 물어보자, 나는 처음의 자신 있는 태도가 아니라, 주눅이 든 채로 말하고 말았다.
“자, 다시금 설명해 드릴게요.
미영 씨는 그림을 그릴 때, 너무 사소한 것에 디테일을 잡아가며 힘을 줘서 그렸어요.
그래서 다른 비율을 신경 쓰지 못했던 거예요.
그림을 그릴 때, 처음에는 제가 아까 말했던 것처럼, 도형으로 먼저 밑그림 구도를 잡아주는 것이 중요해요.”
그렇게 말한 현수는 자신이 그렸던 손 그림에 아까 나무 그림에 덧칠해가던 도형을 그려가기 시작했다.
이 손바닥의 넓은 부분은 사각형으로 크기를 잡아주고, 손마디는 이렇게 원기둥으로.
어떠신가요? 이렇게 보니까 조금 이해가 갈까요?”
“오...정말 단순해 보이지만 손 모양 같아.”
“그렇죠?”
내 감탄에 현수는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응.”
“그럼 이번엔 다시금 한 번 그려보시겠어요?”
“좋아, 그전에 잠시 담배좀….”
난 잠시 숨도 돌릴 겸 작업실을 나와 베란다로 향했다.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이고, 연기를 빨아들인다.
“.........”
넌 알고 있을까?
네 앞에 있는 나는, 정말 힘들다는 것을.
억지로 협박당해, 마약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협박이 내가 아닌, 바로 너라는 것을.
하루하루가 고달프다.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너무나도 불안하고 무섭다.
자칫 잘못해서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무너지고, 부서지던 무언가가 완전히 쓰러져 버리고 말 것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너와 있는 시간은 정말로 즐겁고, 행복하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네 앞에서는 가면을 쓴다.
그저, 이 가면이, 거짓으로 만들어진 이 가면이 진짜 얼굴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니까 나는 오늘도 봄을 팔 수 있다.
네가 있기에, 나는 오늘도 봄을 팔고 있다.
언젠가 찾아올 당근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나는 봄을 팔고 있다.
*
상수 선배는 참 멋진 사람이다.
대학 새내기 시절, 나는 조금 달라지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는, 언제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있어도 그만, 없어도 딱히 상관없는 병풍 취급.
사람들 관계에 어떻게 끼여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너무나도 어색했다.
그래서 대학에 와서 나를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달라져야 할지 몰랐다.
결국, 대학에 들어와서도 그저 그런 사람.
그저 그런 학생으로 한 학기를 보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무표정으로 보내던 중, 상수 선배를 만났다.
화려한 염색 머리, 센스있는 복장.
선배의 입담은 화려해서 듣기만 해도 재미있고,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나랑 나이가 크게 차이가 나도 않으면서, 비싼 차를 몰고 다녔다.
그런 선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깨 좀 피고 살아.”
어째서 인기쟁이인 그 선배가 나에게 말을 걸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게 선배와 처음으로 말을 섞고 난 뒤, 상수 선배는 뭣도 모르는 나를 이끌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나는 선배를 따라 염색도 해보고. (탈색은 관리가 힘들 것 같아 갈색으로만 염색했다.)
처음으로 타투도 새겨 봤다.
화려한 그림이 내 몸에 새겨진다고 생각하자, 다음번에는 선배 없이 혼자서 이곳저곳 새기고 말았다.
언제나 허리를 펴고 당당하게 걸어 다녔으며, 잘나가는 옷 같은 것도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골라서 입어보았다.
그러자, 친구들이 생겼다.
사람들의 입속에서 내 이야기가 올라갔다.
나는 그것을 계기로 더욱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 여자를 잘 몰랐기에 처음으로 고백받았을 때는, 당황해서 거절하고 말았다.
나중에 가서야 알았지만, 그 여자애는 우리 과에서 상당한 미인으로 정평이 난 애였다.
친구들과 술도 마셔보고, 즐겁게 이야기를 해보고.
그러면 나는 정말로 대학생이 되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상수 선배가 참 고마웠다.
무언가 내 인생을 바꿔준 사람이, 상수 선배였다.
그렇게 지내던 중, 한 친구가 다른 친구들 보다 일찍 군대에 가게 되었다.
그래서 입대 전날, 친구를 위해 거하게 술자리를 만들어 마지막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다음날, 친구가 훈련소에 입소하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원래 살던 지역이 멀기도 하고, 근처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돌아가지 싶었다.
그리고 거기서 나는, 미영이 누나를 만났다.
*
“그래서, 무슨 일이세요?”
“응? 아~ 별건 아니고, 오늘 끝나고 뭐 할 일 있어?”
“음….오늘은 알바 쉬어서 딱히 일정은 없어요.”
“그래?”
갑자기 등 뒤에서 나타난 상수 선배는 더 갑작스럽게 오늘의 내 일정을 물어보았다.
“오늘 아는 친구들과 술 한잔할 건데, 올래?”
“술이요?”
“비싼 거 깔 거야, 오늘 안 오면 후회할걸?”
그렇게 말하는 상수 선배는 술잔을 마시는 척 손을 들어 보였다.
“음….제가 끼어도 된다면 가도 될까요?”
“그럼~! 오면 좋지! 돈 걱정은 하지 말고 몸만 와라~ 나중에 연락할게~”
“예~ 들어가세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상수 선배는 내 앞을 앞질러 나갔다.
술인가.
비싼 술은 뭐지?
“재미있겠다.”
나는 벅차오르는 기대감을 억누르며 중얼거렸다.
선배는 언제나 멋졌으니까.
비싼 술이라는 것도 궁금하고, 어디서 마실지도 궁금해졌다.
선배는 좋은 사람이니까, 정말 즐거울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음 강의실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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