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chapter 4:우리가 춤추던 9월은, 분명 맑은 날 이었어요.(15)
* * *
“어...언니?”
갑작스러운 하린의 방문에, 나는 무어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체, 어버버 거리고 말았다.
하린.
그녀는 분명, 박 실장의 차에서 가끔 만나던 여성이었다.
아직 미숙하던 나를 도와주고, 언제나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던 그녀.
오랜만에 보게 된 그녀의 얼굴이 반갑기도 하다.
하지만, 상황이 자꾸만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다리는 붕대로 둘둘 감싸져 있기에, 무언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보여 주었고.
그런 그녀의 뒤를 근엄하게 지키는 두 남자는 또 뭘까?
혼란스럽다.
“오~ 여기가 네 남자 친구랑 사는 곳이야?”
“나..나나나...남친 이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현수는 그냥 제.....”
잠시 얼빠진 얼굴을 짓던 나를 보던 그녀가 씨익 웃어 보이더니, 놀리는 듯이 가볍게 묻자, 나는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극구 부인 했....
잠시만.
“.....어떻게 제가 현수랑 살고 있는 걸 아시는 거죠?”
이상해.
내가 한창 일을 할 때도, 현수에 대해서는 하린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말하기도 전에 애초에 난 하린의 연락처도 몰랐고, 그녀는 언제나 나보다 일찍 내리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박 실장이 사라지고 난 뒤에는, 단 한 번도 그녀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내가 있는 곳을 찾아냈으며, 어떻게 내가 현수랑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낸 거지?
“...미영 씨?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현관이 시끌벅적해지자, 의아함을 느꼈는지 현수는 목발을 짚은 체로 현관에 나와, 무슨 일인지 물었다.
“흐음~실례지만, 여친 분 좀 빌려도 될까요?”
“네?”
“.....아무것도 아니야! 머...먼저 들어가 있어!”
불길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수를 이 여자와 엮이게 하면 안 될 것 같다.
“....?”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죠.”
“좋아, 커피라도 한잔하면서 있었던 이야기 화포나 풀까?”
그렇기에 나는 현수에게 손을 내밀고는, 하린을 이끌고 집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
부웅하는 엔진음이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에휴....다리가 아파서 그런지, 차가 없으면 죽겠다니까?”
“...........”
뒷좌석 에서 나와 같이 앉은 하린이 투덜대는 듯이 말했다.
상당히 좋은 승용차.
마치 경호원처럼 그녀를 따라다니는 외국인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무리 봐도, 나처럼 돈에 쪼들려서 매춘이나 하는 여자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박 실장의 차에 타서 나와 노닥거렸는지, 왜 나에게 다가왔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으음.....그래.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
“그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게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내 질문에 싱긋 웃고 있던 그녀의 표정이 바뀐다.
“박 실장 어디 있어.”
“윽...!”
날카로운 날붙이가 내 허벅지를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정면을 바라본다.
금방까지 실실 웃고 있던 그녀의 표정은, 마치 당장이라도 내 목을 물어뜯어 버릴 것만 같이 날카롭고, 살벌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그게 무슨....!?”
“네가 제일 마지막으로 박 실장과 있었다는 건 알아. 그리고, 박 실장이 사라지자마자, 네년도 모습을 감췄더라?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지. 아무리 봐도, 수상하지 않아? 응?”
“모...몰라!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전혀 모른다고...!”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지. 내 뇌로는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박 실장은 그냥 내 돈을 들고 튄 거 아닌가?
그런데 왜 하린은 박 실장을 찾고 있는 거지?
그리고 어째서, 내가 의심받고 있는 거지?
“나 지금 장난치는 거 아니야.”
“...아악...! 크힉...!”
푹. 하는 소리와 함께, 내 허벅지가 무언가에 찔리는 감촉과 고통이 내 뇌를 관통했다.
“으힉....으으....아...아파.....!”
“그 새끼가 내 허벅지에 야무지게 박아 넣었더라고, 지금은 가볍게 찔렀지만, 네가 말하는 거에 따라서 이게 어디로 들어갈지....잘 생각하고 말해.”
아프다.
무섭다.
지금 상황을 따라가는 것조차 너무나도 벅찼다.
두려움과 고통에 내 눈은 어느새 뿌옇게 물들더니,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시....시바알.....바...박 실장은....내...내 돈....내 오...오 천만원을 들고 튀었단 말이야....! 나....난 그거 밖에 몰라...! 가뜩이나 주...죽여버리고 싶은데...! 내가 박 실장..그 새끼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아...!”
“.........”
시발.
그녀는 헛다리를 짚어도 완전히 잘못 짚었다.
박 실장.
내 돈을 뺏어간 최악의 쓰레기를, 내가 숨겨주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하린에게, 욕설을 뱉으며 처절하게 대답했다.
“....그 돈이 네 돈이었나....미안~ 내가 잘못 알았나 봐~”
“흐힉....! 흐....흐익...!”
그녀는 잠시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이 중얼거리더니, 순식간에 다시금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내 허벅지에 있던 날붙이를 떼어내었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사람을 찔러놓고, 아무렇지도 않아 하고 있다니.
“....이...이제 됐지...? 이제 내...내려줘...! 당장...!”
당장이라도 도망가야 했다.
더는, 이 뱀 같은 여자와 있다가는, 상당히 큰일이 날 것만 같았다.
“으음.....그건 곤란한데....”
“오...왜! 말 다 해줬잖아...! 난 아무 관련도 없잖아!!”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나를 절망시키기에는 충분한 대답이었다.
“있지~? 우리 미영이, 언니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지금 와서 무슨 소리야....? 그딴 건 상관없으니...쿠헥....!”
“일단 들어.”
“끄....흐흑....!”
복부가 움푹 들어갈 것만 같은 충격에,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머리를 의자 시트에 박으며 움찔거렸다.
“있지~ 언니는 약을 팔고 있단다? 맞아, 네가 생각하는 그거. 그런데.....그 씨발 새끼가 내 허벅지를 찔러서, 움직이기가 힘들어. 당장 우리 조직에 딜러로 움직일만한 사람은, 한국인인 나 밖에 없거드은.....그런데, 내가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약을 팔 수가 없지 않겠니...?”
“....그거랑 내가 무슨 상관....”
“그러니까, 미영이. 네가 좀 도와줘야겠어.”
“....뭐?”
귀를 의심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영화에서나 보던 마약을, 실제로 파는 사람이고.
당장 움직이게 힘들어지자, 나를 이용해 마약을 팔겠다고, 내 앞에서 말하고 있었다.
“너, 신분도 없다며? 만일 네가 실수해서, 증거를 남겨도, 걸릴 일도 없고, 얼마나 좋아?”
“...미...미쳤어...!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미쳤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목에 걸린 은색 십자가가, 이상하리만큼 반짝거리고 있었다.
“현수....였나?”
“!?”
아니야.
“본명, 차현수. 올해로 스물셋. 다리가 불편한 천재 화가. 현재 약 45정의 그림을 판매하였으며, 그 그림 한 장 한 장이 상당히 호평으로 팔리고 있다....인가?”
아니야. 저건 아니야.
“그런 화가의 손이 분질러지기라도 하면....엄청 슬프겠다~ 그치?”
저건. 아니야.
“.......뭘 하면 되는데...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현수가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나 때문에 현수가 그림을 못 그리게 되어 버린다면, 난 살아갈 자신이 없어질 것이다.
“응응! 대답 좋아! 걱정하지 마~ 내가 아무리 그래도, 아무런 보상 없이 일을 시키지는 않아~”
“...?”
“한 팀장이지? 돈을 들고 오면, 신분을 준다는 거. 하 참....양아치 건달 새끼가 팀장은 개뿔...푸흐흐....”
아.
“내 일을 잘 도와주면, 내가 그 신분을 살 돈을 줄게. 그러니까아...열심히 일해야 해?”
신분.
내가 바라지 못해 미칠 것만 같은 것.
일을 시작한 계기도 신분이었고, 나에게 남은 마지막 일이 신분이었다.
그만큼 내게 중요한 것을, 자신의 일을 도와주면 주겠다고, 하린은 말했다.
이 여자는 위험하다.
내가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게, 당근과 채찍을 아주 능숙하게 다루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판타지 세계에 나오는 미믹이라는 생명체처럼.
아주 영롱하고 아름다운 유혹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처럼.
“.........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뱀 같은 얼굴을 바라보며 대답하고 말았다.
스스로.
스스로 함정속으로 걸어가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나는 막을 수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