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chapter 4:우리가 춤추던 9월은, 분명 맑은 날 이었어요.(14)
* * *
“어라, 외출하시나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니, 현수가 내 모습을 보며 물었다.
“아, 응. 머리가 많이 자라서 말이야.”
여성이 되고 나서, 장발이었던 적은, 초창기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머리가 길면 일단 귀찮다.
머리 감기도 힘들고, 관리를 안 해주면 쉽게 머릿결이 상해서, 불편했다.
그에 반해 단발로 자르면, 머리 감는 것도 편하고, 관리도 쉬웠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남자 시절 머리처럼 더 짧게 깎고 싶었지만, 손님들의 대부분은 그런 머리를 싫어했기에, 어깨 바로 위까지 올라오는 단발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뭐 이 머리가 적응했다고 치자.
빡빡 깎은 모습을 보이기는 싫으니까.
“그나저나, 엄청 오랜만에 외출이네.”
생각해보니, 현수의 집에 온 지 3주 만에 나가는 외출이었다.
담배야 아파트 바로 밑에 편의점이 있었으니 외출로 치기에는 좀 그렇고, 사람들이 가득한 시내로 나가는 외출은, 이게 처음이었다.
“혹시 필요한 거 있어? 나가는 김에 사 올게.”
이왕 나가는 김에, 현수가 필요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음.....당장 화구는 다 준비되어 있고....오늘 저녁엔 뭘 드시고 싶으신가요?”
현수는 늘 인터넷 쇼핑으로 자신이 필요한걸, 미리미리 대비하는 성격이라, 당장 무언가가 필요해 보이지는 않았는지, 오늘 저녁밥을 물었다.
“난 언제나 고기가 먹고 싶어.”
“푸핫...! 아..흑...! 그....그러면 오늘은 수육을 먹을까요?”
“응!”
그리고 고기가 먹고 싶다는 내 말에 갑자기 폭소를 터뜨리는 현수.
뭐야, 원래 사람은 누구나 고기가 먹고 싶지 않아...?
“그런데 수육도 할 줄 알아?”
“그럼요, 만드는 법은 간단해요.”
수육같이, 그냥 굽는 게 아니라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하는 요리도 저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니, 그의 요리실력에 더더욱 감탄하게 되었다.
“와....그럼 삼겹살이랑....쌈채소? 정도면 될까?”
“음....따로 필요한 건, 집에 다 있으니까, 네! 그 정도면 될 것 같아요!”
“과자도 좀 살까?”
“과자....는 괜찮아요, 요즘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서.”
“....그....그럼 나도 안 먹을래.”
“미영 씨는 좀 더 먹어요. 그쪽이 더 나아 보이는데.”
“아..아 몰라....그냥 안 먹어,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와요~”
이렇게 내가 나갈 때, 인사를 해주는 현수가 있다.
내가 집에 돌아오면, 나를 반기는 현수가 있다.
마치 수년간 같이 지낸 사람들같이, 친근감 있고 가까워 보이는 일상대화가 너무나도 즐거워서, 행복하다.
그래, 난 지금 상당히 즐겁고, 행복하다.
*
“어머 언니~ 머릿결 너무 부드러우시다~”
“예...? 아 예....감사합니다...”
미용사 여성이 내 머릿결을 만지작거리더니, 그렇게 말했다.
갑작스러운 칭찬에, 나는 약간 버벅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용실 직원들은 하나같이 붙임성이 좋아서, 약간 껄끄러운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그들 또한 서비스직이고, 이렇게 대화를 이어 나가며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그들의 일임을 알지만, 나는 그냥 조용한 사람이 좋았다.
말을 걸어도 요즘 트렌드나, 사건들, 유행하는 먹거리나 패션 같은 것들을 줄줄이 말하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곤란해져 왔다.
그런거엔 딱히 관심도 없었고, 특히 일하면서 지친 나는 그런 걸 일부러 찾아볼 힘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들이 머리를 만질 때면, 나는 상투적인 대답만 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다 보면, 직원들도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채는지 조용히 머리만 잘라주었다.
“머리는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아...그냥 대충 다듬어 주세요.”
“아~ 다듬어 드릴까요? 근데 너어무 아깝다~ 머리 한번 길러 볼 생각은 없어요?”
“네?...아...아뇨 딱히...”
그러나, 가끔씩 아무리 내가 딱딱하게 굴어도, 끝까지 대화를 청하는 사람들 또한 존재했다.
나는 남자일 때는 언제나 9mm 투블럭 으로만 잘랐고, 여자가 되고 나서도 언제나 똑같은 머리 모양으로 잘랐다.
딱히 머리카락에 관심도 없었고, 길어봤자 귀찮기만 했으니,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쉽다....언니 같은 스타일이 장발이면 남자들이 껌뻑 죽는데...”
흠칫.
“...저....정말요?”
“! 그러엄! 남자들은 긴 머리를 좋아하잖아~ 그리고 언니 스타일이면 그냥 장발도 좋고, 약간 웨이브를 넣어도 좋은데?”
“머리를....기르면...요?”
“응응! 그럼 오늘은 앞머리만 약간 자르고, 뒷머리는 기르게 쉽게 다듬기만 할까요?”
“.....네에...그...그렇게 해 주세요...”
남자들이 좋아 죽는다...인가.
그러고 보니, 나도 남자였던 시절, 긴 머리를 가진 여자들을 보면 내심 설레고 그랬다.
머리를 기르고, 장발이 되면, 현수는 어떻게 반응할까?
그냥, 기분이다.
한동안 단발만 했으니까. 뭐.
한 번쯤, 이미지 변신도...필요할 테니까...뭐...
그냥 그런 거야. 뭐.
*
“으음....뒷머리가 은근히 신경 쓰이네...”
장보기를 끝낸 나는, 뒷머리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보통 때보다 긴 뒷머리가 신경 쓰여서, 자꾸만 매만지게 되었다.
일단 미용실도 다녀왔고, 현수가 부탁한 장도 다 봤으니,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나는 잠시 발을 돌려, 집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딸랑딸랑.
가벼운 유리문에 달린 종이, 문이 열리자 소리를 내었다.
“어서 오세....누나?”
“어, 잘 지냈어...?”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침 커피추출기를 청소하던 호준이 나를 바라본다.
그런 그에게 조금 어색하지만, 손을 들어 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
“웬일이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아 응, 요즘 좀 바빴어. 넌 잘 지냈고?”
“저야 열심히 일하는 중이죠.”
흡연실에 들어온 나와 호준은 서로 담배 한 개비를 물으며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물었다.
“아 그...크흠....! 그...별건 아니고....그....”
“네?”
“...마워서...”
“뭐라고...하셨죠?”
“그냥...저번에 도와줘서 고맙다고....뭐....그냥 그거 전하려고 왔다.”
비가 마구 내리던 그 날.
삶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할 때 만난, 호준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렇게 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냥, 감사 인사라도 건네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찾아왔다.
“별 거 아니에요! 그....그래서 요즘은 괜찮으신가요?”
“어? 어어, 요즘은 좋아, 지낼 곳도 생겼고, 이것 봐! 오늘 저녁이야.”
“삼겹살이네요? 맛있겠다.”
“응, 그 녀석...요리 하나만큼은 기막히게 하더라고.”
“그 녀석....이요?”
“아 응, 내가 살고 있는 집 주인, 갈데없는 나를 자기 집에서 머물게 해줘, 요리도 잘하고 착해.”
“아...그렇...구나.”
“응? 이크! 시간이 너무 늦었다! 미안! 나 먼저 간다! 다음엔 커피 한 잔 정도는 사러 올게!”
“아, 네!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담배를 피우다 시계를 보니, 이내 시간이 꽤 흘렀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시급하게 꽁초를 재떨이에 비벼끄고, 후다닥 카페를 나왔다.
“다음엔 케이크라도 하나 사 먹어야 겠다.”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빠른 걸음으로 현수가 있는 집으로 향했다.
*
“하.....이게 뭐하는 짓 인지야 원...”
담배가 쓰다.
나 자신이 바보 같아졌다.
“.....에휴, 그냥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다......아...”
그렇게 웃으면서 내가 모르는 남자를 말하는 누나를, 보고 싶지 않았다.
*
“하...맛있었어...!”
“미영씨가 좋은 고기를 골라와서 그래요. 저도 맛있게 잘 먹었어요.”
저녁 식사를 끝내고, 거실에 앉아 커피를 즐기는 이 시간이 즐겁다.
현수는 역시나 대단했다.
수육은 입에 넣자마자 녹을 정도로 부드러웠고, 맛있었다.
그래서 결국, 배가 터질 정도로 욱여넣고 말았다.
“아 맞다.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넌....내가 장발이면...어떨 것...”
그런 내 앞에서 커피를 홀짝거리던 현수에게 뒷머리를 매만지며 물어보려던 찰나.
삐리리리!
“...응? 누구지..?”
갑작스럽게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일단 제가...”
“아...아냐, 내가 나가볼게, 쉬어.”
의문의 방문객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던 현수를 말리고, 내가 일어나서 현관으로 향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택배인가? 근데 이렇게나 늦은 시간에 오나..?
그렇게 가벼운 의문을 가진 내가 현관의 문을 열었다.
“네~ 누구세.....언니?”
그곳에는,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오랜만~ 잘 지냈어 미영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지, 붕대를 칭칭 감고, 목발을 짚은 하린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뒤에는 상당한 덩치의 외국인처럼 보이는 사내들이 한 발짝 뒤에서 위압감을 풍기며 서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