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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봄을 팔고있다-48화 (48/91)

〈 48화 〉 chapter 4:우리가 춤추던 9월은, 분명 맑은 날 이었어요.(12)

* * *

“그림 그리는 건 어때? 재미있어?”

오늘도 나는 현수가 준비해 준 쇼파에 앉아, 그가 그리기 쉽도록 정면을 바라보다가, 문득 하고 말이 튀어나왔다.

“그림....말인가요?”

“응, 너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에 투자하잖아. 그걸로 돈을 벌지?”

“그렇죠?”

“근데 대부분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도, 직업이 되면 힘들고 하기 싫어진다던데, 넌 어떤가 해서.”

그런 말이 있다.

좋아하는 취미가 일이 되면,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되는 일이 많다는 이야기.

단순 취미로 즐길 때는, 그게 너무나도 즐겁고, 재미있지만, 돈을 벌게 되고, 직업이 된다면, 그에 대한 압박감으로 인해, 지치게 된다고.

분명 현수는, 그림을 잘 그린다.

잘 그리니까 그걸로 돈을 벌거나 하겠지.

그런데, 그럼 그걸 그리는 그는 정말로 즐거울까?

지치는 건 아닐까?

현수가 그리는 모습을 볼 때면 떠올리던 생각들이, 드디어 입 밖으로 나온 것이다.

“흠....저 같은 경우는, 유일하게 즐기는 취미와 유일하게 돈을 벌 기회가 겹치는 것이 그림이었기에....아직까지는 그리는 게 즐거워요. 그림은 아름다운 것을 캔버스에 옮기는 것이니까요. 마치 지금의 그림처럼.”

“그....그래....그렇구나....응....”

“? 왜 그러신 가요? 얼굴이 빨간데....”

“....! 모...몰라! 나 담배 피고 올래!”

그런 내 질문에 해맑게 웃으며 답변하는 현수의 얼굴을 보던 나는, 얼굴이 화끈해진 것을 보이기 싫어, 급하게 방을 나왔다.

“뭐가 아름답다는 거야.....멍청이....”

아름다운 것을 캔버스에 옮긴다, 지금처럼.

금방까지 나는 그의 앞에 서서 모델을 섰고, 그는 그런 내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아름답다니.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 가슴이 쿵쾅거려서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현수는 알아채지 못한 것 같지만, 저 녀석은 뜬금없이 사람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며 뒤흔드는 것이 특기처럼 보였다.

“후....”

매캐한 연기를 내뱉으며, 다시금 평정을 되찾았다.

“일....인가....”

일.

한 사람의 노동력을 소비하고, 그에 걸맞은 대가를 받는 행위.

사람들은 저마다의 일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물론, 나 또한 지난 3년 동안은 일하며, 돈을 모아갔다.

그것이 불법인데다가 마음을 죽이는 행위일지라도.

매춘.

그것이 나에게는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내 자존심을 죽이고, 수치심을 내던지고, 내 마음을 찢어발겼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솔직히, 현재의 나는 매우 나태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현수가 만들어 주는 아침을 먹고, 가벼운 간식과 커피를 마시며 그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아침 식사가 끝나면 나는 자신이 하겠다는 것을 어떻게든 억지를 부려 얻은 설거지를 하고, 그는 작업방에 들어가 그림을 그린다.

가끔씩 작업방을 지나칠 때마다 보지만, 그는 늘 맑은 하늘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었다.

그동안 나는 거실에 앉아 TV를 보거나, 내 방에 있는 컴퓨터를 하거나,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거나, 책을 읽는 등, 매우 편안한 시간을 보낸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현수가 만들어 준 요리를 먹고, 또다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고 나면, 그의 모델이 되어 몇 시간 정도 쇼파에 앉아 있다가, 잠에 빠져든다.

약 2주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이 루트를 벗어나지 않고, 그대로 나태한 삶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좋기는 좋은데.....너무 좋으니까 문제야....”

현수는 이런 나에게 단 한 번도 무언가를 부탁하지 않았다.

이상하리만큼, 너무나도 내가 원하는 대로 뭐든지 들어주었다.

마치 나를 키우는 고양이처럼, 상냥하게만 해주니까, 나도 그것에 맞추어 나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아니야....”

그랬다.

아무리 지금은 현수의 집에서 편안하게 지낸다고는 해도, 이건 안 된다.

이대로 지낸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바보 천지가 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지내는 시간 동안, 뭐라도 해보면 좋을텐데....

어느새 다 피운 꽁초를 재떨이에 비비적 끄자, 시원한 밤바람이 내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달이 참 밝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자, 둥글게 떠오른 보름달이 은은하게 나를 비추었다.

컴컴한 밤에 떠오른 달은, 마치 신성한 기분이 들 정도로 아련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늘인가? 그런가....”

나는 무언가를 결심한 채, 베란다의 문을 열었다.

*

“그림을...배워보고 싶으시다고요?”

“응!”

이대로 현수의 집에서 뒹굴뒹굴하는 것도 그만두고, 뭐라도 해볼 마음이 들었던 나는, 현수에게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당장 무언가를 하려고 해도, 독학으로는 한계가 있고, 현수의 그림을 보고 가끔씩 흥미가 돋은 것은 사실이었다.

“이대로 네 집에 얹혀서 아무것도 안하는 것도 그렇고.....한 번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서 말이야, 혹시....안될까?”

“물론 저야 좋죠! 자! 그럼 뭐부터 배워볼까요? 이...일단 새로운 이젤과 캔버스를...!”

“어...자...잠시만! 진정해!”

혹시나 바쁘다고 거절하면 어쩌지 싶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사라질 만큼, 현수는 내 부탁이 엄청나게 기쁜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목발도 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것을 내가 겨우 막아 세웠다.

*

“음.....좋아, 준비 됬어! 이제 어떻게 하면 될까?!”

그렇게 나는 현수가 준비해 준 새로운 캔버스 앞에 앉아,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에게 물었다.

새하얀 캔버스는 마치, 첫눈이 내린 거리 같아서, 어서 무언가를 채워보고 싶었다.

“그럼 일단....선을 그어 볼까요?”

“선?”

“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총 5번씩만 한번 그어 보시겠어요?”

“? 알았어.”

한참 열정에 휩싸인 나는 원기둥이나 사과 같은 것을 그리라고 할 줄 알았는데, 단순한 선을 그으라고 하니까, 약간 김이 새는 것 같았다.

스으으으윽.

흑연으로 찬 연필이 캔버스에 길다란 선을 새기고 있다.

“이렇게 하면 되?”

나는 현수가 시킨 대로, 가로세로 선을 그어 보였다.

“네, 그럼 잠시만요....”

현수는 내가 그은 선을 보더니, 나에게서 연필을 가져가 캔버스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자, 미영씨가 그은 선과, 제가 그은 선,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음.....그러니까...나는 뭔가...삐뚤빼뚤....? 한데, 너는 마치 자로 그은 선 같네....”

내가 그은 선은 일직선이 아닌, 떨리는 선, 포물선으로 된 선, 지그재그 등, 직선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아닌 것 같은데, 현수가 그은 선은 정말로 자로 그은 것처럼, 일정하고 깨끗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먼저 선을 자유자재로 그릴 줄 알아야 해요, 선을 그릴 줄 알아야 선으로 면을 만들고, 면이 입체가 되어가죠.”

그러더니 현수는 연필을 쥐어 또 다른 선들을 그어 보였다.

“직선 긋기가 조금 익숙해지시면, 이렇게 곡선을 주거나....강약을 조절해가는 것을 배울 거예요.”

“오....”

이번에는 직선만이 아닌, 다양한 선들을 그어 보인 현수가, 새삼 더 화가같이 느껴졌다.

“그...그럼 어떻게 연습하면 돼?”

“간단해요, 계속 직선을 그어 볼까요?”

“....그냥?”

“네.”

“얼마만큼...?”

“일단....이 캔버스가 가득 찰 때까지네요, 일단 처음에는 캔버스의 질감을 한번 느껴보시고, 다음 연습은 스케치북을 사용할 거예요!”

“아하....그렇구나...”

그렇게 나는 연필을 되잡고 선을 긋기 시작했다.

*

“끄응....!”

분명 시킨 대로 선을 긋고는 있는데....

“왜 이렇게 잘 안되지...?”

이미 캔버스는 연필로 인해 회색빛이 빽빽하게 들어앉았고, 연필 또한 다 닳아서 깎아야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내 가 그은 선들은, 현수가 그은 선에 비하면 죄다 울퉁불퉁 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잘 되어가시나요?”

“으음....그닥?”

그사이, 현수는 어느샌가 챙겨온 스케치북을 들고 나에게 물어봤다.

“일단 시킨 대로 선을 그어보기는 하는데, 잘 안되는 것 같아...”

“그런가요....그럼 잠시만...”

현수는 내 선들을 지켜보더니, 자신이 들고 온 스케치북을 이젤에 올려, 새로운 종이로 바꾸었다.

“한번 다시금 그어 보시겠어요?”

“응....”

스윽, 스윽.

내가 선을 긋는 동안, 현수는 말없이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음....약간 힘이 많이 들어가신 것 같아요. 잠시만요...”

“히약!”

“앗, 죄송해요, 놀라셨나요?”

“아...아냐...괜찮아....계속해줘...”

무언가 조언을 하려던 현수는, 어느새 내 곁에 다가와 내가 연필을 쥐고 있는 손을 감싸 잡았다.

그것에 놀란 내가 새된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럼....자...연필은 이렇게 잡으시고....네, 좋아요. 선을 그을 때, 약간 힘을 빼고, 좋아요, 잘하고 있어요...! 이대로 쭈욱! 그어 보세요.”

“으...응....”

현수는 내 손을 포갠 상태로 어떤 식으로 그으면 되는지 착실하게 알려주었고, 나는 그 뜻에 맞추어 천천히 선을 그어갔다.

그러자, 내가 여태까지 그었던 선들 중, 가장 반듯하게 직선이 나오게 되었다.

“오! 잘했어요! 이제 이대로 쭉 연습하시면....”

“ㄴ....나 잠시 담배 좀...!”

“앗.”

그 선을 보던 혁수가 나를 칭찬했지만, 나는 곧바로 의자를 박차고 작업실을 나왔다.

‘가...가깝잖아...!’

그의 숨결이 내 귀에 느껴졌다.

그의 따뜻한 손결이, 내 손 위에 포개어졌다.

동시에 같이 움직이고,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에휴.....줄 담배 좀 피고 들어가야지...”

그렇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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