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chapter 4:우리가 춤추던 9월은, 분명 맑은 날 이었어요.(11)
* * *
“으음......”
오른쪽?
아니면 왼쪽?
아니 여기서는 역시 오른쪽을 뽑아야 할까?
아니야, 내가 오른쪽을 뽑을 걸 예상해서 왼쪽으로?
잠시만? 그렇다면 내가 오른쪽을 뽑을 것을 간파해 왼쪽으로 뽑을 것을 간파한 오른쪽?
오른쪽? 왼쪽?
“끄으으....에이 몰라!”
수많은 생각이 교차하고, 머리가 복잡해지는 순간, 나는 그냥 오른쪽을 뽑아버렸다.
그 결과는....?
“아!.....이런....!!”
이런 내 기대와는 다르게, 트럼프의 카드는 나를 보며 마치 비웃는 것처럼 보이는 조커 카드였다.
“이번엔 제 차례죠? 앗! 다이아몬드 8! 이겼네요~!”
“아니...! 하....젠장....”
그렇게 울적해진 내가 쥐고 있는 카드 중 하나를 뽑은 현수가 카드를 탁자에 내려놓으며, 게임이 끝이 났다.
조커 뽑기.
둘이서 하는 조커 뽑기는, 상당히 빠르게 끝나는 모양이다.
“아....다음 판 해! 이번 판은 졌지만, 반드시 이긴다!”
“하하.”
현수의 집에서 지내는 나날은 언제나 평화로웠다.
따뜻한 밥도 나오고, 잘 곳도 있고, 그야말로 너무나 좋았다.
.....조금 지루한 것 빼고.
그래서 심심거리를 찾다가 우연히 찾은 트럼프.
그걸로 가끔 현수와 카드놀이를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넌 게임 같은 건 안 해?”
“게임이라면....컴퓨터 게임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아니 애초에 이 집에 컴퓨터가 있기는 해?”
“네, 제 방에 있죠.”
“오....나 컴퓨터 좀 써도 돼?”
“그럼요. 같이 가실까요?”
컴퓨터라...
예전에는 피시방을 제집 드나들 듯이 다녔고, 그렇게 하는 게임에서 높은 계급을 달고는 희열감에 빠지기도 했었지...
“응, 가보자!”
*
현수의 방.
생각해보니 여태까지 현수의 집에 드나들면서 처음으로 그의 방을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의 방은 어떻게 생겼을까?
집의 인테리어를 보면, 마찬가지로 온갖 이상하고 별난 가구들이 줄지어 늘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막 침대도 자동차 모양인 건 아니겠지?
‘뭐...뭐지? 왠지 두근거리는데...’
“여기가 제 방이에요.”
“헤에....”
그렇게 떨리는 마음을 간직한 체, 현수가 자신의 방문을 열자, 그 모습이 드러났다.
“.....평범해?”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현수의 방은 상당히 평범했다.
깔끔하고 무던한 가구 배치.
특이한 물건은 없고,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와 가구 몇 개, 책장. 그리고 탁자와 컴퓨터뿐이었다.
그나마 특이한 점이라 할 건, 바로 방 중심에 새워진 이젤과 캔버스였다.
“이건....그림? 왜 이것만 여기에 있는 거야?”
그 캔버스가 궁금해진 나는, 그림에 다가가 어떤 그림인지 살펴보았다.
그 그림은 언제나 그가 그리던 맑은 하늘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본래의 그림보다 약간 서투름? 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아....그건 제가 처음으로 그린 그림이에요, 뭔가....처음으로 그린 그림을 보관하고 싶어서, 이렇게 제 방에만 따로 놔뒀죠.”
“정말? 그럼 이게 네가 처음으로 화가가 된 그림이라는 거야?”
사람의 꿈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결과는, 상당히 신비했다.
무언가, 이 그림을 보다 보면, 그가 어떤 감정으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 점점 궁금해졌다.
“......잠시만요, 제가 조금 부끄러워서 그러는데, 천으로 좀 덮어놓을게요.”
“엥? 부끄러울 게 뭐가 있어? 엄청나게 잘 그렸는데?”
그렇게 멍하니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니, 어느샌가 다가온 현수가 새하얀 천으로 캔버스를 덮어버렸다.
“하하....그러게요....그런데 조금 부끄러워서....”
“알았어, 네가 그렇다면야. 자, 어서 컴퓨터나 한번 보자.”
이해는 잘 안 가지만, 현수가 그렇다면 더는 파고들지 말자고 결심한 나는 대화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컴퓨터가 있는 탁자로 다가갔다.
그런데.
“어....이거....언제 산 거야?”
그곳에는, 컴퓨터를 살 때, 절대로 피해야 하는 사무용 컴퓨터가 있었다.
공장에서 찍어내듯 만든 컴퓨터는, 따로 분해해서 부품을 끼울 수도 없었고, 성능도 낮았기에, 나는 언제나 조립형 컴퓨터를 사용했다.
“음...한 5년 전..? 이네요.”
“5년이나...이걸?”
나는 현수의 말에 경악하며 본체를 살펴보자, 막 컴퓨터를 샀을 때 붙여나오는 스티커가 제거되지도 않고, 그대로 눌어붙어 버린 것을 볼 수 있었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마치 공구가 소리를 내는 것처럼 시끄럽게 윙윙 울려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우와....이건 좀 심한데?”
부팅부터가 이 모양인데, 과연 켜지고 나면 어떨까?
검은 화면이 5분이나 지속되고 나서야 켜진 컴퓨터는, 가관이었다.
바탕화면에는 광고 바가 가득, 인터넷을 켜니 광고창만 수십 개가 파바박! 하고 뜨고, 화면이 로딩되는 시간조차 너무나도 오래 걸렸다.
“그런가요...?”
“넌 이걸로 인터넷이 가능해?”
“저야 일거리를 메일로 받을 때 아니면 거의 컴퓨터를 하지 않으니까요, 웬만한 건 휴대폰으로도 가능해서.”
그런 나와는 다르게, 무사태평한 현수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구나.....하지만 난 못 견딜 것 같아! 잠시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던 나는, 먼저 악성 광고를 흩뿌리는 바이러스부터 제거하고, 쿠키도 깔끔하게 비우는 등, 컴퓨터를 간단하게 정리해 주니, 그제야 오래된 도서관에 배치된 사무용 PC 정도는 되었다.
“오...! 인터넷이 빨라졌어요!”
“그래, 가끔은 이렇게 정리도 좀 해줘, 툴바는 뭐 이리 많은지야 원...”
“그래서, 미영씨가 하는 게임도 할 수 있나요?”
“음......아니, 못할 것 같아.”
애초에 이 정도 컴퓨터면, 웬만한 게임은 죄다 튕길 것이 뻔했다.
“컴퓨터는 비싼가요?”
“응? 음.....엄청나게 고사양의 컴퓨터는 비싸겠지만, 내가 할 만한 게임이 돌아가는 정도면, 저렴하게 살 수도 있어, 마우스나 키보드도 이전 버전으로 좀 구하면 될 것 같기는 한데....”
살까?
지금 나에게는, 현수가 모델비로 준 돈이 있다.
조금 빠듯하지만, 내가 직접 조립하면 더 저렴하게 살 수 있을 터.
“음.....잠시만 컴퓨터 좀 빌려도 돼? 조금 찾아보게.”
“저는 괜찮아요, 편할 대로 사용하셔도 괜찮아요!”
“고마워. 그럼 어디보자....”
그렇게 나는, 현수의 컴퓨터를 빌려, 필요한 부품을 파는 사이트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
“다 됐다!”
며칠 뒤. 나는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고는 미소를 지었다.
나는, 아직까지 내 명의가 없었기에, 현수의 아이디를 빌려, 인터넷 쇼핑몰에서 갖가지 부품들을 주문했고, 오늘 모두 도착했다.
예전부터 컴퓨터 조립은 혼자서도 척척 해내었기에, 그다지 어렵지 않게 조립 컴퓨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방에는 컴퓨터가 생기게 되었다.
“오....이게 조립하는 컴퓨터인가요? 신기하네요....저는 뭐가 뭔지도 모르겠어요.”
“헤헤....내가 예전에는 친구들 컴퓨터들도 조립해 주고는 했.....지.....응. 조립 다 했어, 켜볼까?”
그랬다.
내가 컴퓨터를 좀 만진다는 걸 아는 친구들은, 나에게 공물을 바쳐가며 컴퓨터에 관해 묻거나 조립을 부탁하고는 했다.
예전의 일이야.
이제 와서 동요하지 말자.
금방의 대화가 불편해진 나는, 빠르게 대화 주제를 바꾸며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다행히 잘 작동하기 시작한 컴퓨터가 켜지며, 이내 모니터에 불이 들어왔다.
“자....오랜만에 게임이나 해볼까?”
“그럼 저는 방해되지 않게, 이만 나가볼게요.”
“아, 응. 고마워.”
“나중에 저녁 식사 시간 때 부를게요!”
그런 나를 위해 자리를 피해 주는 현수가 방 밖으로 나왔다.
“그럼....오랜만에 한판 해볼까?”
그렇게 게임을 하려던 순간.
“잠깐만....지금 내 계정을 쓸 수가 없잖아?”
그러고 보니, 원래의 내 계정을 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나 혼자서 아이디를 만들 수도 없고....
“저....현수야? 미안한데, 다시 좀 와줄래?”
*
그렇게 현수의 도움으로 만든 계정으로, 게임을 시작했다.
[더블 킬!]
“그렇지! 오랜만에 하는 거지만, 실력은 안 죽었네!”
손가락이 원래의 나보다 작아져서, 키보드와 마우스를 움직이는 감각은 조금 적응하기 힘들지만, 나쁘지 않게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마무리!]
[아군이 용을 처치했습니다.]
“그래, 가자! 이대로 끝내버려!”
그렇게 흐름을 타던 우리 팀원들과 함께, 적의 본진을 밀어버리며 이번 판은 승리로 막을 내렸다.
“후! 이겼다!”
이번 판은 내가 움직이는 캐릭터가 적을 많이 처치해서, 승리에 큰 공을 기여했다.
그렇기에 내가 만들어낸 승리고, 그렇게 이겼다.
“......뭔가....재미없네.”
그런데 뭔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남자였을 시절에 느꼈던 감정이, 무뎌진 느낌이 들었다.
재미야 있다.
게임이란 것이 재미가 없을 리가.
순수하게 오락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재미는 있긴 하다.
그런데,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
그래서 나는, 컴퓨터 전원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어라? 금방 끝나셨네요? 즐거우셨나요?”
거실에 나오자, 현수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있지....같이 카드 게임 하지 않을래?”
“네? 저야 괜찮지만....며칠 전부터 컴퓨터 게임을 기대하지 않으셨나요?”
“그게 뭐....별로 재미가 없네...오랜만에 해서 그런가봐....!”
모르겠다.
이상하게, 최신식 기계로 하는 게임보다.
너와 얼굴을 맞대고 하는 구닥다리 카드 게임이 왜 이렇게 재미있는 걸까?
이상한 일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