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chapter 4:우리가 춤추던 9월은, 분명 맑은 날 이었어요.(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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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믿는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행위인가.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있다.
그 가면들은 수많은 표정을 보여주며, 자신을 숨긴다.
그 가면 아래의 짐승들은, 그 가면을 미끼로 삼아, 순식간에 숨통을 조여온다.
그 짐승들에 당한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갈갈이 찢겨나가,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데.
사람을 믿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는, 그렇게 다시금 모든 게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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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추적하게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분홍빛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우산 위로, 토도독! 하며 빗물들이 쏟아져 내렸다.
세상은 잿빛에 물들고, 어두운 구름에 덮여갔다.
그런 세상에서, 나는 그저 걸었다.
걷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걸었다.
빗물에 푹 젖은 옷 때문에, 입술이 덜덜 떨렸다.
손은 자꾸만 시려왔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걷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멈춰버린다면, 나는 그대로 쓰러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나는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음침한 골목길에서, 거대한 네온사인이 걸린 곳 아래.
그곳은 네온사인이 새겨진 전광판 덕분에 비가 닿지를 않았다.
나는 그곳에 쪼그려 않아, 담배를 한 개비 물었다.
하늘처럼 잿빛에 물든 연기가, 폐를 뚫고 지나간다.
“....이제 어떻게 할까.”
나는 그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게도 머릿속은 말끔했고, 단순한 대답을 내놓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지금까지 모아두었던 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박 실장은 도망쳤고, 살 곳마저 사라졌다.
지금, 내가 가진 전 재산이라곤, 클러치 백에 들어있던 2만 7천원과 내가 살던 곳으로 이사 온 여성이 건네준 5만 원 뿐.
돈.
돈을 구해야지.
그렇다면 어떻게 할까.
다시금 피시방을 전진하며, 지금과 마찬가지로 몸을 팔 곳을 찾아볼까?
그런 곳이 있긴 할까?
더 심한 꼴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돈을 모았다가, 강탈당할지도 몰랐다.
나는 다시금 담배를 빨아들이고, 연기를 내뱉었다.
담배 연기는 마치 신기루처럼,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신기루.
그래, 나는 여태까지 신기루를 보고 있었다.
돈은 착착 모였고, 곧 신분을 살 수 있었다.
힘들겠지만, 차근차근 정상적인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일하고, 보증금을 모은다.
취직 활동을 위해, 지금까지 놓았던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딴다.
공부를 안 한 지 몇 년은 지났지만, 썩어도 준치라고, 내가 들어갔던 대학은 상당히 좋은 축에 들어갔던 만큼, 다시금 시작하면 굳었던 머리가 잘 돌아갈 것이었다.
대기업은 바라지도 않았다. 아니, 공무원 시험도 나쁘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평범한 직장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다.
결혼? 글쎄, 요즘엔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으니, 굳이 결혼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렇게 직장 동료와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 주말에 여행을 가거나 맛집을 돌아다니는 거다.
커피 머신도 사야지.
그저 그런 인생을 바랐다.
평범하고, 누구나 살아갈 법한.
고뇌도 하고, 소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는, 그런 평범한 인생.
하지만 나에게, 그런 인생이란 마치 신기루 같은 것이었다.
감히 네까짓 게 그런 인생을 바라는 것이냐? 라고 세계가 나에게 말하는 것 같다.
“죽을까?”
감히.
감히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하려고 하지도 않은, 입 밖으로 내뱉기도 무서웠던 발언이, 너무나도 쉽게 나왔다.
그러자, 너무나도 머리가 맑아져 왔다.
그래.
모든 게 무너져 내렸는데, 더는 살 필요가 있을까?
억지로 버텨가며 살아왔는데, 그저 평범한 인생을 바라왔는데, 그것마저 안된다면, 죽는 것밖에 답이 없지 않나?
왜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했을까?
바로, 이 빌어먹을 신기루에 머리가 잠식당해서 그랬다.
그래.
죽자.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온몸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
쪼그려 앉았던 바닥에서 일어나려는 다리에 힘이 나고, 눈은 또렷해졌다.
마치, 꺼지기 직전의 촛불이 강하게 빛나는 것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지금 죽으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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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자동으로 열리는 편의점 문을 지나쳐, 나는 바깥으로 나왔다.
내 손에 들린 검은 봉투 안에는, 소주가 가득했다.
이왕 죽을 거, 거하게 취하고 죽고 싶었다.
대충 편의점 앞에 있는 벤치에 걸터앉아, 소주 뚜껑을 돌려 깠다.
파라솔이 달린 벤치라서, 비도 막아주니, 나쁘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소주병을 든 채 그대로 꿀꺽꿀꺽 소주를 들이켰다.
“.....크하..! 맛 좋다!”
이상하게도, 언제나 쓰게 느껴졌던 소주가, 너무나도 달게 느껴졌다.
마치 설탕물을 퍼먹는 것 같은 맛에, 나는 연달아 꿀떡꿀떡 소주를 목 뒤로 넘겼다.
목과 위장이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순식간에 소주 한 병을 채우고, 다음 병을 따려던 그 순간.
“...누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엉...? 아아...너구나?”
우산을 든 팔뚝에 그려진 타투.
밝은 갈색 머리를 가진, 남자.
호준이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곤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호준의 행색을 보아하니, 편의점에서 대충 뭔가를 사려고 잠시 밖으로 나온 것 같았다.
집이 근처인가.
“여기서 뭐 하시는 거예요? 비에 홀딱 젖었잖아요! 감기 걸려요!”
“어...? 감기? 됐어, 그딴 거 신경 안 써.”
그는 내 행색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나에게 다가왔다.
감기는 무슨.
이제 곧 죽을 건데.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이렇게나 술을 많이 사 놓고는....”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내가 앉아있는 밴치의 맞은편에 앉아, 물었다.
“아...뭐...별건 아니고, 그냥 일이 좀 있었어.”
아무리 그래도, 오랜만에 본 사람한테, ‘나 곧 자살하려고.’라는 말을 꺼내기는 좀 그랬다.
저 녀석의 성격대로라면, 당연히 호들갑을 떨어댈 것이고, 그게 귀찮았다.
그리고 괜한 감정을, 그에게 씌워주기는 싫었다.
“이...일단 옷좀 제대로 입어요...! 누가 볼 것 같아요...”
“엉?”
그는 유심히 내 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리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제서야 나는, 내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급하게 나온 터라 흰 티에 후드 하나 걸친 내 모습은, 후드는 지퍼가 열려있었고, 흰 티는 물을 먹어서 속이 다 비치고 있었다.
브래지어는 하고 있었지만, 누구나 상당히 부끄러운 꼴이었다.
하지만 알 바인가.
“조심 좀 하세요...그러다가 누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호준은 나처럼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서 중얼거렸다.
아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나를 좋아한다고 했나?
“꼴리냐?”
“....네?”
“꼴리냐고, 내가.”
나는 묘한 흥미가 생겨, 은근슬쩍 비치는 가슴을 강조하며, 그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물었다.
호준의 얼굴은 마치 터질 것만 같았다.
“아직도 내가 좋아? 응?”
“.........네.”
그런 주제에, 이런 질문에는 꼬박꼬박 대답을 잘했다.
“그래애...? 그럼 대줄까?”
“....예?”
“오늘 하루 대줄게, 물론 공짜로~어때? 좋지?”
이대로 인생 마감하기 전에, 지금까지 몇 번이고 한 일.
저번에 민준을 마주쳤을 때, 나를 도와주기도 했고, 죽기 전에 이 정도 일은 해줄 수 있었다.
어차피 남자 새끼들은 여자 구멍에 미친 놈들 뿐이니까.
“응? 어때?”
“...!”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호준의 손을 잡아당겨, 내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이왕 죽는 거, 착한 일 하나 하고 가자.
혹시 모르지, 자살하고 나서 사후세계에 갔더니, 위대하고 대단한 신이라는 작자가, ‘오오, 너는 여자로 변한 뒤로, 수많은 남자들을 자기 몸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구나! 내 그것을 크게 삼아, 너를 천국으로 보내주마!’ 라고 할지.
그렇게 생각하니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술 너무 많이 드셨어요.”
“....응?”
호준은 그런 내 손을 뿌리치고, 자신이 걸친 외투를 벗었다.
“비도 많이 맞으셔서 추우실 텐데, 일단 이거 입어요.”
“.....뭐 하는 거야?”
그러더니, 그 외투를 나에게 덮어주었다.
뭔데.
지금 뭐 하는 거야.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나는 호준의 외투를 집어 던지고, 소리를 질렀다.
“너 나 좋아한다며? 그러니까 대준다니까? 그러니까 얼른 모텔이든 네 집이든 데려가서 저번처럼 구멍에 쑤셔 박으라고!!”
그만둬.
“너 고자야? 어? 아니지, 저번엔 건강하던데, 어? 근데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대준다고!”
나한테 이러지 마.
나는 이미 수십 번은 고함을 질러 갈라지는 목소리로, 호준에게 소리쳤다.
“.....저는 누나를 좋아해요.”
“그런데 왜?”
“.....그렇기에, 이러는 거예요.”
그럼에도 호준은, 묵묵히 떨어진 외투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다시금 나에게 걸쳐 주었다.
“지금 많이 취하셨어요, 집에 돌아가서 샤워하고, 마음을 진정시켜요.”
그러지 마.
제발.
“그러지...마...”
“...네?”
“나에게...친절하게 대하지 말라고....”
아파.
마음이 아파.
어째서 나한테 이러는 거야?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지는 나한테, 왜?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죽으려는 나한테, 왜?
왜, 상냥하게, 친절하게 구는 건데?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난, 더는 속지 않아.
분명, 나에게 뭔가를 바라는 거야.
“이런다고 내가 너한테 반하기라도 할 것 같아?”
이렇게 친절하게 대하면, 점수라도 딸 줄 알았나 보지?
틀렸어.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어때? 정곡이지?
응?
“.....글쎄요, 그런 건 생각 안 했어요.”
“...뭐?”
“그냥, 누나가 힘들어 보이니까, 도와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하는 호준은,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아무튼! 그 외투는 돌려주지 않으셔도 되니까! 어서 집으로 돌아가요! 제가 있으면 불편할 것 같네요....그럼!”
“...! 야...야..!”
그러던 호준은, 자신의 우산을 펼치더니,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돌아갈 곳도 없는데....멍청이....”
상냥함.
“그냥....흑...죽..죽으려고 했는....데...”
따뜻함.
미련하고, 멍청한 녀석.
어느새 내 눈에서 빗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사실, 죽고 싶지 않았다.
더 살고 싶었다.
아등바등 발버둥 치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그런 내가, 죽고 싶을 리가 없었다.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모든 것을 잃어도, 나는 살고 싶었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시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람을 믿는다.
그 얼마나 어리석고, 멍청한 행위인가.
그런데.
역시 나는 어리석고 멍청한 놈 인가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