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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봄을 팔고있다-42화 (42/91)

〈 42화 〉 chapter 4:우리가 춤추던 9월은, 분명 맑은 날 이었어요.(6)

* * *

“끄으....으윽....”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잠시 발을 딛었을 뿐인데, 마치 바닥이 깊디깊은 늪처럼 내 발을 빨아들이는 듯한 감각.

목은 미친 듯이 메말랐고, 속은 미쳐 날뛰는 것이, 내 몸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부...분명 박 실장이랑....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상했다.

분명,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계속해서 빙글빙글 도는 시야를 어떻게든 바로잡아서 보이는 술병도 고작 한 병 정도인데.

이렇게나 숙취가 심한가?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포기한 체,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다시금 잠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금 잠에서 깨어나자, 잠들기 전보다는 훨씬 몸 상태가 나아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움직여, 냉장고에 들어있는 물통을 그대로 들이켰다.

차가운 냉수가 내 목을 얼어붙게 만드는 것 같았지만, 잠자코 배가 터질 때까지 물을 욱여넣었다.

숙취 때는, 일단 물을 많이 마시는 편이 좋다는 것을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허....”

2리터짜리 물통의 1/3 정도를 비우고, 창밖을 바라보자, 환한 태양이 내 방을 비추고 있었다.

밤에 박 실장이랑 술을 마시고, 진탕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그렇게나 술을 많이 마셨나?”

이런 몸으로 변하기 전에도, 술을 자주 마시기는 했지만, 김미영이 되고 나서는, 마치 술에 의존이라도 하는 것처럼 매일같이 술을 들이켰다.

현수랑 만나고 나서, 조금 줄기는 했지만, 내 주량은 상당히 늘어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심한 숙취라면, 거의 새벽 내내 소주만 들이키고, 아침에 잠들어야 이렇게 심한 숙취가 될까 싶을 만큼 너무 심했다.

그런데, 내 방에 놓인 술병은, 고작 한 병.

그것도 아직 절반 이상이나 남아있었다.

줄창 마시고 잠든 나 대신, 박 실장이 치워줬다는 일이 있을 수도 있지만.

박 실장이 사 온 술은 아직 냉장고에 그득 차 있었다.

그 말은, 내가 마신 술은, 처음 첫 잔이라는 소리인데.

“....약이라도 탔나?.....하하....뭐 이런 병신 같은 생각을....”

그럴 리가 있나.

박 실장이 나에게 약이라도 먹일 이유가 없잖아.

집에 훔쳐 갈 게 있나, 날 따먹기라도 했나.

“.......역시 아니야.”

잠시 생각에 빠진 내가 바지를 들춰, 혹시나 잠든 사이에 뭐라도 했나 싶어, 살펴봤지만, 그런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으....아무튼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서 좀 쉬어야겠다...”

가뜩이나 숙취로 아픈 머리가, 복잡한 생각으로 자꾸 빠르게 돌아가려니, 자꾸만 욱신거렸다.

‘원래는, 현수의 집에 가던가 하려고 했지만, 오늘은 집에서 쉰다고 연락해야겠다.’

그렇게 결정한 나는, 현수에게 연락하기 위해, 충전기에 꽂혀있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저번 일이 있고 나서, 나는 언제나 휴대폰 배터리를 가득 채워놓는 습관이 생겼다.

그런데.

“....어? 뭐지..?”

이상했다.

분명, 어제는 화요일 이었을 텐데, 왜 지금은 목요일이지?

화요일 밤에 술을 마셨으니까, 오늘은 수요일이어야 했는데?

위화감.

이상하리만큼 위화감이 내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

나는 바삐 손을 움직여, 휴대폰의 잠금을 풀었다.

[무슨 일 있나요?]

X월 XX일 수요일.

어제.

어제 현수에게 연락이 왔었다.

“....뭔데...?”

이상해.

이상해. 이상해.

앞으로.

앞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긴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

“.....나가자.”

별일 아닐 거야.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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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은, 언제나 한산한 기분이 들었다.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무언가 여유가 있어 보였고, 느긋해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거리와 맞지 않게.

그런 느긋한 사람들과 맞지 않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달리고 있었다.

처음 집을 나올 때는, 분명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빠르게 걷기 시작했고, 이윽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달리고 있었다.

‘뭔데, 나 왜 달리고 있는 건데.’

나 자신조차 의문이 들 정도로, 나는 왜 달리고 있는 걸까.

분명, 별일 없을 텐데.

나중에 가서야 괜히 달려왔네. 할 텐데.

나는 멈추지 않았다.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지하철 입구가 보이자, 그제야 발을 멈출 수 있었다.

“허억....허억....”

이마에 흐른 땀이 자꾸만 눈을 찔렀다.

폐는 따끔거렸고, 심장은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후우....후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숨을 고르자, 가빴던 호흡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이제 지하철로 내려가, 확인만 하면, 이 갑갑한 마음이 해소가 될까.

“....한대만 피고 가자.”

그럼에도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확인을 해야 할 것처럼 뛰어왔던 나는, 지하철 입구까지 달려와 놓고 옆에 있는 흡연 부스로 들어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후욱, 하고 담배 연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

“....진짜 별 지랄을 다 하는 구나...”

담배를 피다 보니 흥분한 것처럼 날뛰던 가슴이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늦게 일어난 건, 그날따라 술이 너무 잘 받은 거고.

박 실장은 그냥, 혼자 마시기 적적해서 나랑 마신 거야.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 거, 돈 좀 가지고 와서, 현수한테 갈 때 뭐라도 하나 사 가자.’

지금까지, 현수에게 받기만 한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내 나름대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었다.

어느새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비자, 치지직 하면서 새빨갛게 타오르던 불이 꺼졌다.

“....뭘 좋아할까?”

그 녀석의 취향이라면....저번에 흘낏 봤던 뽑기 기계에 들어있던, 이상한 고양이 인형.

그런 걸 좋아할 것 같았다.

얼굴은 비대칭이고, 뭔가 얼빵하게 생긴 고양이 인형.

너는 내가 건네주는 인형을 받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새삼 웃기네...”

나는 지하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중얼거렸다.

달라졌다.

여자로 변하고, 부모님과 헤어지고, 제일 친했던 녀석에게 강간당하고, 매춘을 시작했다.

술이 유일한 친구이자, 담배가 내 진정제였다.

웃지를 않아서, 자연스럽게 웃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차현수.

너를 만나면서, 나는 달라졌다.

커피의 향기가 향기롭게 느껴졌고, 웃음을 지을 수가 있었다.

....내일을 꿈꿀 수가 있었다.

새로운 신분을 사고, 정상적인 일을 하고.

정말로 평범한, 평범한 사람이 되어서, 너를 만나고 싶어졌다.

락커 번호 25번.

“....뽑기는 자신이 없는데....일단 넉넉하게 챙겨가 봐야지.”

나는 어느새 질척하고, 무거웠던 마음이 홀가분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밀번호.

0829

“뭐, 어떻게든 하면 되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락커를 열었다.

“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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